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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군, 부산 해전에서 왜선 120척을 부수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3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32
입력시간 : 2011. 03.02. 00:00
아산 현충사 사당에 있는 부산해전도
"적의 소굴 없애버려야 간담 꺾을 수 있다"
역전의 장수 정걸, 왜군 심장부 깨트리자고 건의
9월1일 첫닭 울자 모든 전선 지휘 부산포로 돌진
이순신 함대 군사들 죽음 무릅쓰고 적선 때려부셔
7월10일 한산도에서 크게 패한 일본 수군은 이후 부산 본영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육지에 성을 쌓고 육전에 대비하는 듯하였다. 곧 진주성을 공격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여수 본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에 곧바로 왜군의 심장부인 부산 공격 준비를 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듯이.
부산 섬멸 작전은 조방장 정걸(丁傑, 1514~1597)이 도맡았다. 정걸은 이순신에게 부산이 지금 적의 소굴이 되어 있는데 여기를 친다면 적을 필시 깨트릴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하였고, 이순신은 그의 말을 따랐다. 이는 '호남절의록'에 나온다.
정걸은 이순신 보다 나이가 30살이나 많은 팔순을 바라보는 백발장군이었다. 그는 이미 경상좌수사, 전라좌수사, 전라우수사, 전라병사를 역임한 역전의 장수이었다. 고흥 출신인 그는 1555년 을묘왜변 때 전라관찰사 이준경의 막하에 들어가 달량포 (지금의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싸움에서 왜구를 쳐부수었다. 1561년에 온성부사, 1568년 종성부사로 특진하여 11년간이나 여진정벌과 국경수비에 앞장섰다.
육전과 해전에 능한 백전노장 정걸은 1591년에 이순신의 조방장이 되어 판옥선 개량에 앞장서고, 화전·철익전·대총통 등 여러 가지 군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합동훈련을 하자고 전갈을 보냈다. 8월1일부터 전라 좌·우 수군은 본영 여수에 모여 피나는 맹훈련을 하였다. 출전에 앞서 전라 좌·우 수군이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함대도 증강되었다. 전선 74척과 협선 92척, 모두 166척이었다. 전선은 한산해전 때의 52척보다 40% 늘어났다.
합동훈련 실시 중에 이순신은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로부터 공문을 받았다.
육상으로 진군한 왜적들이 낮이면 숨고 밤이면 행군하여 양산 김해 방면으로 내려오는데 짐짝들을 가득히 실은 것이 도망치려는 자취가 현저하다
이순신은 서둘러 출전 일을 8월24일로 잡았다. 출전 날의 난중일기를 읽어 보자.
'24일 맑다. 객사 동헌에서 조방장 정걸과 아침을 먹고, 곧 침벽정으로 갔다. 우수사(이억기)와 점심을 먹었는데 조방장도 함께 했다. 오후 4시쯤 배를 출발시켰다. 노질을 재촉해 노량 뒷 바다에 닻을 내렸다.' (후략)
이순신 함대는 8월25일 사량도에서 원균과 합류하였고, 당포에서 하룻밤을 잤다. 26일은 거제도에서, 27일에는 원포에서 밤을 지냈고, 28일에는 가덕도에서 잤다.
8월 29일 조선함대는 가덕도를 출발하여 양산, 김해 앞바다에 도착하였는데, 동래 땅 장림포 앞바다에 왜적 300명이 큰 배 4척과 작은 배 2척에 나누어 타고 양산으로부터 나오다가 우리 군사를 보고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였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그들을 깨트리고 불태웠다.
그런 다음 군사를 좌우로 나누어 그곳으로 들어가려 하였지만 강폭이 좁아서 판옥선이 들어가서 싸울 수 없기에,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에 가덕도 북쪽으로 돌아와서 밤새워 원균, 이억기 등과 작전을 상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순신은 “부산은 적의 근거지가 되었으니 그 소굴을 없애버려야만 적의 간담을 꺾을 수가 있을 것이다”하여 이번 작전의 중요성을 다시금 밝혔다.
9월1일에 첫 닭이 울자, 이순신은 모든 전선을 지휘하여 부산포로 향하였다. 아침 8시경 물운대를 지날 무렵에는 갑자기 동풍이 일고 파도가 거세게 일어 배를 부리기가 어려웠다. 화준구미에서 왜군의 대선 5척, 다대포 앞 바다에 이르러 왜선 8척, 서평포(부산시 구평동)에서 9척, 절영도(지금의 영도)에서 왜선 2척을 각각 만났는데 모두 기슭에 줄지어 정박하여 있었다.
3도수사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조방장 정걸 등과 합세하여 왜적의 배들을 남김없이 때려 부수고 혹은 불태워버렸다. 그런데 왜군들은 산 위로 도망하였기 때문에 사살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어서 절영도 안팎을 샅샅이 뒤졌으나 적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작은 배를 부산 앞바다로 보내어 왜적의 배들을 찾아보게 하였더니 약 500여척의 배들이 선창 동쪽 산기슭 언덕 아래 줄지어 정박해 있고, 선봉에 있던 왜적의 큰 배 4척이 멀리 초량항 쪽으로 나가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였다.
이순신은 이억기 등과 상의하기를 “우리 군사의 위세를 가지고 만약 지금 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간다면 적들은 반드시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고는, 깃발을 흔들어 싸움을 독려하여 달려 나갔다.
우부장인 녹도 만호 정운, 거북선의 돌격장인 신의 군관 이언량, 전부장인 방답 첨사 이순신, 중위장인 순천 부사 권준, 좌부장인 낙안 군수 신호 등이 앞장서서 왜적의 선봉 배 4척을 때려 부수고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왜적들은 헤엄을 쳐서 육지로 올라갔고, 그 때 뒤에 있던 조선의 여러 배들은 승세를 타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긴 뱀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 (장사진 長蛇陣)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왜군의 배들은 부산진성 동쪽에 있는 한 산으로부터 5리쯤 되는 언덕 밑 세 군데에 정박해 있었다. 큰 배, 중간 배, 작은 배, 모두 합쳐 470여척쯤 되었는데 왜군들은 우리의 위세에 겁을 먹고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조선 배들이 곧바로 쳐들어가자 왜선에 있던 왜군들과 산 위의 소굴 속에 있던 왜적들은 모조리 산으로 올라가서 여섯 군데로 나뉘어 진을 치고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총알과 화살을 쏘아댔는데, 마치 비오듯 우박 쏟아지듯 퍼부었다. 편전과 큰 철환도 쏘았는데 그 크기가 모과 만하였으며 아군 배에 많이 떨어졌다.
정걸 장군 관련 사진(신도비와 묘소)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함대의 군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천자포, 지자포, 장군전, 피령전, 장편전, 철환 등을 일제히 쏘아대며 하루 종일 맞붙어 싸웠다. 이윽고 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었다.
조선 함대는 힘을 합쳐 적선 100여척을 때려 부수었다. 왜적들은 토굴 속으로 도망하였다. 조선 함대는 여러 배에서 용사들을 뽑아 육지로 올려 보내 왜적을 모조리 섬멸하고 싶었으나, 성 안팎 6, 7군데에 진을 치고 있는 수많은 왜적들이 말을 타고 용맹을 과시하고 있고 날도 이미 저물어서, 부득이 자정 경에 가덕도로 돌아와서 밤을 지새웠다.
조선 함대는 다음날인 9월2일에 다시 되돌아가서 쳐부술 생각을 하였으나 뭍으로 올라간 왜군들이 예상보다 많고, 기병전에 능한 왜군과 승리하다는 보장도 없어서 더 이상의 전투를 하지 않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부산포해전은 이순신이 선조에게 보낸 장계에 썼듯이 어느 해전보다 성과가 큰 전투였다.
'그동안 전후로 4차례 출전하여 10번 맞붙어 싸워서 전부 승리하였으나, 장수와 군사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싸움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전에 서로 싸울 때는 적선의 수가 많아도 70여척에 불과했으나, 이번에는 적의 소굴로 들어가 정박하여 있는 470여척의 왜선 중에서 100여척을 때려 부수어 적들의 간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1592.9.17 부산에서 왜적을 쳐부순 장계)
이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은 이 해전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다'라는 제목의 선조 수정실록(1592.8.1)을 읽어 보자.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왜병이 해상의 전투에서 여러 번 패하자 부산 · 동래에 모여 웅거하면서 전함을 벌여놓고 항구를 지켰다. 순신이 원균과 함께 수군을 총동원하여 진격하였으나 적이 군사를 거두고 전투에 응하지 않고 높은 곳에 올라가 총을 쏘므로 수군이 육지로 오르지 못하고 빈 배 100여척만 태워버리고 퇴각하였다. 이때 녹도 만호 정운이 앞장서서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는데 순신이 애통해 하였다.'
오늘의 부산 시민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부산포 해전 승리의 날인 9월1일(양력 10월5일)을 부산 시민의 날로 정하고 매년 10월5일 다채로운 행사를 하고 있다.
아무튼 부산해전은 이후 전쟁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은 무너졌다.
한 가지 덧붙이면 부산포 해전은 조방장 정걸과 녹도만호 정운의 명암이 엇갈린 전투이다. 정걸은 그 공을 인정받아 충청수사가 되었고, 1593년 2월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우게 된다. 행주산성 전투 중에 화살이 다 떨어져서 아군이 곤경에 빠졌을 때 화살을 배에 가득 싣고 가서 권율을 도운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순신이 가장 아끼던 장수 정운은 전사한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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