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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만호 정운, 부산해전에서 전사하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33 (2부 끝)
고흥 쌍충사, 순천 충무사, 해남 충절사
입력시간 : 2011. 03.09. 00:00

쌍충사, 고흥군 도양읍에 있다. 이대원과 정운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충무공이 아낀 조선수군 최고의 돌격장
불의에 타협 않고 담력 겸비 선봉 이끌어
부산해전 120척 격침과정서 왜탄에 순직

1592년 9월1일 조선수군은 왜군의 심장부 부산으로 쳐들어가서 왜선 120여척을 격침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조선수군도 피해를 입었다. 6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중에서도 가장 큰 손실은 녹도만호 정운(鄭運 1543-1592)이 전사한 것이다. 그는 이순신이 가장 아끼는 장수였고, 조선 수군 최고의 돌격장이었다. 

이순신은 정운의 전사를 슬퍼하면서 고흥 녹도에 있는 이대원(李大源 1566 ~ 1587) 사당에 추배하도록 선조임금에게 별도의 장계를 올리었다. 녹도만호 이대원은 1587년에 왜구와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삼가 아뢰옵나이다. 녹도만호 정운은 맡은 바 직책에 충실하고 담력까지 겸비하여 신이 어려운 일을 같이 의논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변란이 일어난 이래로 의기가 북받쳐 올라 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마음이 조금도 해이함이 없이 변경 방어에 힘쓰기를 이전보다 두 배나 하였습니다. 신이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라고는 정운 등 두 세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간 세 번 싸워 이길 때 매번 앞장을 섰고, 부산의 큰 싸움에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죽음을 무릎 쓰고 적의 소굴로 쳐들어가 하루 종일 싸웠는데, 힘껏 쏘아댔기에 적들은 꼼짝도 못하였습니다. 이는 오직 정운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배를 돌릴 무렵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는데, 그 늠름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부질없이 사라져 후세에 알려지지 못한다면 이야말로 지극히 애통한 일입니다.

이대원의 사당이 아직도 그 포구에 있으니, 초혼하여 같은 제단에 함께 모시고 제사를 올린다면, 한편으로는 의로운 혼백을 위로함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경계함이 될 것입니다.' (정운을 이대원 사당에 추배하는 것을 청하는 장계, 1592년 9월 11일)

정운은 해남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였다. 그는 평소에 정충보국(貞忠報國 절개가 곧고 충성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이라는 네 글자를 칼에 새겨 자기의 검명(劍銘)으로 삼았다. 

그는 1570년, 나이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1579년에 훈련원 봉사가 되고, 1580년에 거산찰방이 되었다. 이 시절에 관찰사의 수행원이 불의한 장난을 하고 돌아다니므로 잡아다가 매를 때렸던 일로 관찰사에게 미움을 받았다. 이후 정운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 강령현감, 웅천현감을 지내다가 거기서도 곧 물러났다. 1585년에 해주목 판관이 되었을 때도 역시 목사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는 어디서나 강직하고 정의감이 강하여 불의와 타협을 하지 않아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였다. 그는 1588년에 시복시 판관이 되었다가 1591년에 유성룡의 천거로 이순신과 함께 전라좌수영 소속의 녹도(지금의 고흥군 도양읍)만호 (종4품)가 되었다. 부임 후에는 총포부대장으로서 전선에 대포를 설치하고 함포사격 훈련을 하는 등 이순신과 호흡을 맞추었다. 정운은 이순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읽은 장수였다. 그는 이순신과 함께 네 차례의 전투에 참여하였고 전투 때 마다 돌격장으로서 항상 선봉에 섰다. 

특히 전라좌수군의 첫 출전인 옥포해전에 있어 이순신이 아직 조정의 허락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경상도에 출전하는 것을 망설였을 때, 왜군을 치는 데는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가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도 정운이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이순신은 여수 진남관에서 지휘관들을 소집하였다. 그는 지금까지의 전황을 설명하고 경상도로 싸우러가는 것에 대하여 의견을 물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난상 토론을 하게 함으로서 결집된 의견을 모아 전쟁에 한 치의 흔들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날 낙안 군수 신호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은 출전에 반대하였다. “전라도만 수비하면 되지, 관할구역이 아닌 경상도까지 가서 전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는 신중론을 폈다.

그러자 군관 송희립이 나서서 출전을 주장하였다. “왜적이 침범하여 그 형세가 마구 뻗치었는데 앉아서 외로운 성을 지킨다하여 그 성이 보존될 수가 없으니 마땅히 출전하여야 합니다. 출전하여 다행히 이기면 적의 기세를 꺾을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죽는 다 하더라도 신하된 도리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녹도만호 정운도 경상도 출전에 찬성하였다. 

"평소에 나라의 은혜를 입고 국록을 먹는 신하로서 어찌 이럴 때에 죽지 않고 그냥 앉아서 바라볼 수만 있겠습니까? 왜적을 치는 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있습니까? 영남이 무너지고 나면 우리는 어찌 할 것입니까. 적이 울타리 밖에 있을 때는 막기가 쉽지만 울타리 안에 들어오고 나면 막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영남은 호남의 울타리인데 울타리가 무너지면 여기도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군병을 이끌고 나가 쳐서 영남을 돕고 한편으로는 호남을 지킬 생각을 안 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눈앞의 편안함만 찾으려 한다면 그야말로 적을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격입니다.” 

여러 장수들의 토론을 듣고 있던 이순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들의 의견을 다 들었소. 이제 결심이 굳어졌소. 경상도로 출전하는 것이요. 이렇게 결정한 이상 앞으로 다른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용서 없이 군율에 처할 것이요.” 

정운은 매번 출전 시마다 돌격대 장수로 앞장서서 싸웠다. 그리하여 품계를 뛰어 넘어 정3품 절충장군으로 특진을 한다. 부산해전에서도 그는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 동래의 몰운대 아래에서 적을 무찌르면서 정운은 몰운대의 ´운(雲)´자와 자신 이름의 ´운(運)´자가 동일한 음이라는 것을 알고 부하에게 "필시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 만일 내가 죽더라도 적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하여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는 치열하게 벌어진 부산포해전에서 앞장서서 싸우다가 적이 쏜 대철환에 이마를 맞고 전사하였다. 



충무사, 순천시 해룡면에 있다. 이순신, 정운, 송희립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이순신의 장계를 받은 조정에서는 정운을 북병사로 추증한다(1592년 10월27일 조선왕조실록). 이 추증이 이루어진 후에 이순신은 손수 제문을 지어 정운을 흠향한다. 

아!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데에는 필시 천명이 있으니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이야 정말로 아까울 게 없으나
유독 그대의 죽음에 대해서만 나의 가슴 아픈 까닭 무엇인가요.
 
국운이 불행하여 섬 오랑캐들 쳐들어오니
영남의 여러 성들 바람 앞에 무너지고
몰아치는 그들 앞에 막아서는 자 하나 없고
도성도 하루 저녁에 적의 소굴로 변했다오.

(중략)

네 번이나 싸워 이겼으니 그 누구의 공이었는가. 
종묘사직 회복함도 몇 날 남지 않은 듯하였을 때
어찌 알았으랴. 하늘이 돕지 않아 적의 총알에 맞을 줄을
저 푸른 하늘이시여, 당신의 뜻은 참으로 알기 어렵나이다.

배를 돌려 다시 쳐들어가 맹세코 원수를 갚고 싶었지만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바람조차 불순하여
소원 이루지 못해 평생 원통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오.
이 일을 말하고 나니 나의 살 에듯이 아픕니다.

믿고 의지했던 것은 오직 그대였는데 앞으로는 어이하리.
진중의 여러 장수들 원통해 하기 그지없다오.
백발의 늙으신 부모님은 장차 그 누가 모실는지. 
황천까지 뻗친 원한 언제 가서야 눈을 감을는지.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그 재주 다 못 폈을 때 지위는 낮았으나 덕은 높았으니
나라의 불행이고 군사들과 백성들의 복 없음이로다.
그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었으니
나라 위해 던진 몸 죽었으나 오히려 살아 있음이어라. 

아, 슬프다 . 이 세상에 그 누가 내 마음 알아주랴
슬픔 머금고 극진한 정성 담아 한 잔 술 바치오니 
아, 슬프도다!

1796년에 정조 임금은 정운을 병조판서로 추증하였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리었으며 1798년에 부산 동래의 몰운대에 충신 정운순의비를 세웠다. 고흥군 도양읍에 있는 쌍충사, 순천시 해룡면의 충무사, 해남군 옥천면에 위치한 충절사에는 그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녹도만호 정운. 그는 진정으로 충성을 다하여 국가에 몸을 바친 장군이다. 

김세곤 (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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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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