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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44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44
입력시간 : 2014. 04.29. 00:00
완도 고금도 충무사 - 이순신과 이영남을 모신 곳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다시 그 역사에 얽매인다.
우연치 않게 이순신이 전사한 날 유성룡이 파직을 당했다. 그는 낙향하여 1604년에 '징비록'을 썼다.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징계하는 의미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312년이 되는 1910년 일본은 조선을 손아귀에 넣었다. 역사를 망각한 조선이 망한 것이다
우연치 않게 이순신이 전사한 날 유성룡이 파직을 당했다. 그는 낙향하여 1604년에 '징비록'을 썼다.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징계하는 의미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312년이 되는 1910년 일본은 조선을 손아귀에 넣었다. 역사를 망각한 조선이 망한 것이다
1597년 10월29일에 이순신은 목포 고하도로 진영을 옮겼다. 그는 곧바로 월동준비를 하였다. 막사를 만들었고 해로통행첩을 발행하여 군량을 확보하였다. 배 운행에 통행첩을 소지하도록 하고 배의 크기에 따라 대형은 쌀 3석, 중형 2석, 소형 1석의 통행료를 받았다. 그리하여 10일 동안에 1만석이 되었다. 또한 40척의 배를 건조하였다.
1598년 2월17일에 이순신은 완도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고금도는 여건이 한산도보다 더 좋았다. 주민도 1천 5백여 호나 되어 자체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순신은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하여 함선이 80여척, 군사도 8천명에 이르렀다. 이 때 큰 역할을 한 사람이 흥양현감 최희량이었다. 최희량은 백성들을 이끌고 전선을 건조하였고 구리와 쇠를 실어다가 대포 등도 만들었다.
7월16일에 명나라 수군 500여 척이 고금도에 도착하였다. 도독 진린은 성격이 난폭하고 거만하기로 소문이 난 자였다.
18일에 이순신은 왜선 100여 척이 녹도에 침범했다는 보고를 받고 진린과 함께 출전하였다. 연합함대가 고흥군 금당도에 이르렀을 때 왜선들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이튿날 이순신은 녹도만호 송여종에게 배 8척으로 절이도(고흥군 거금도)에서 복병하도록 하고 진린도 30척을 남겨두었다.
7월24일에 이순신은 진린에게 술자리를 베풀었다. 흥이 한창 돋워질 무렵 명나라 군관 한 사람이 진린에게 보고하기를 “오늘 새벽에 절이도에 침입한 왜선 11척을 송여종이 공격해서 그 중 6척을 나포하고 왜군 머리 69급을 취했습니다. 명나라 수군은 싸우지 못했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진린은 술잔을 집어 던지며 그 군관을 끌어내라고 하였다. 이 때 이순신은 진린을 진정시키고 수급 69급 중에 40급을 진린에게 주었다.
이러자 송여종이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순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왜적들의 머리는 썩은 뼈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가지고 저 사람들과 다투자는 말인가. 너의 공적은 내 보고서에 들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하였다. 그랬다. 이순신은 장계를 조정에 보내면서 송여종의 공로를 낱낱이 적었다.
8월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가 후시미 성에서 죽었다. 나이 62세였다. 그는 죽으면서 이런 시를 남기었다.
이슬처럼 떨어졌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이런가.
나니와(옛 오사카의 지명)의 영화는 꿈에 또 꿈인 것을.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5대로에게 5살 난 아들 히데요리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내가 죽거든 지체 없이 조선에서 철병하라”고 유언하였다.
히데요시 사망을 계기로 5대로는 조선의 주둔군 철수에 착수하였다. 10월1일에 일본 특사가 부산으로 건너왔다. 특사는 가토·고니시·시마즈 등을 만나 철군을 지시했다. 일반 사병에게는 비밀로 붙여졌다. 그러나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다.
히데요시의 사망소식을 알게 된 조명연합군은 대대적인 공격에 들어갔다. 명군은 병력을 네 방향으로 나누어 울산· 사천· 순천 등지의 왜군을 공략하였다.
9월 중순에 제독 마귀의 동로군이 울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가토의 응전 회피로 점령에 실패하였다. 더구나 왜군 구원병이 부산에서 올 것이라는 소문이 나자 명군은 경주로 퇴각하고 말았다.
제독 동일원이 이끄는 중로군은 사천성을 공격하였다. 중로군은 초반에는 승전보를 올리며 진격했다. 9월28일에는 사천성을 포위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명군의 규모가 큰 것을 알고 병력들을 사천 신성으로 후퇴시키고 유인작전을 썼다. 동일원은 작은 승리에 취하여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다. 시마즈는 대대적인 반격을 하여 중로군은 10월1일에 대패하고 말았다. 시마즈는 3만8천717개의 머리에서 코를 베어 일본으로 보냈다.
한편 명나라 제독 유정과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서로군도 순천 왜교성를 공격하였다. 진린과 이순신의 연합수군도 참여하였다.
9월20일에 제독 유정은 고니시 유키나카를 사로잡을 작전을 폈다. 강화를 하겠다는 속임수를 썼다. 그런데 고니시가 회담장으로 가고 있을 때 명군이 미리 대포를 쏘고 말았다. 이를 수상히 여긴 고니시는 곧바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 고니시 생포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겸연쩍은 유정은 바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9월21일에는 조명수군도 예교성을 공격했는데 물이 얕아 가까이 가서 싸울 수 없었다. 22일에도 조명수군은 공격을 하였지만 명나라 유격 계금이 어깨에 탄환을 맞았고 명군 11명이 죽었다.
9월23일에 유정은 전투를 중지하였다. 공성전을 펼칠 사다리를 준비한다는 핑계였다. 10월2일부터 서로군은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때 수로군은 적극 공세를 펼쳤으나 육군은 소극적이었다.
10월2일 오전에 조명 연합수군이 진격하여 정오까지 적을 많이 죽였으나, 유정의 육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3일에는 명나라 함대 300척이 초저녁부터 자정이 될 때까지 싸웠는데 조수 시간을 놓쳐 40여척이 갯벌 위에 갇혔다가 왜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4일에도 진린은 연합함대를 이끌고 공격을 계속했으나 육군이 호응하지 않아 물러나고 말았다. 이에 진린은 유정을 찾아가 엄중 항의하였다.
6일에 권율은 이순신에게 군관을 보내어 유정이 달아나려 한다는 편지를 전하였다. 이순신은 일기에 “분하고, 분하다! 나랏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적었다.
7일에 명나라 유정은 전력을 정비한 후에 다시 공격한다고 하고 부유창으로 퇴각하였다. 9일에 유정은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로써 조명연합군의 순천왜성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일본 특사는 왜군 장수들에게 11월15일까지 부산으로 철수하여 귀국하라는 명령서를 전달했다.
고니시도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고니시는 명나라 제독 유정과 은밀하게 화의를 진행하였다. 그는 유정에게 순천왜성을 고스란히 내주기로 하고 철수를 보장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수군이었다.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공세를 펼쳤다. 뇌물을 받은 진린은 고니시의 통신선 1척을 남해 쪽으로 보내주고 말았다. 이것이 노량해전의 시발이었다. 순천 왜성이 고립되었다는 소식이 시마즈에게 전해진 것이다.
통신선 1척이 순천을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안 이순신은 급히 군관 송희립과 해남현감 유형 등 여러 장수를 불러 의논하였다. 회의는 남해 쪽으로 출진하여 일본 구원군을 공격하기로 결정되었다.
11월15일에 이순신은 진린에게 고니시의 배를 보낸 것을 항의하였다. 그런데 이 날도 왜선 두 척이 강화하자고 진린의 진중을 드나들었고, 진린은 이순신에게 철군하는 왜군을 그냥 돌려보내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원수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고 결연히 거절하자 진린은 별수 없이 그 뜻을 따랐다.
11월18일에 조선수군 70여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5천명이었다.
충무공 이순신대첩비와 타루비 - 여수시 고소동 소재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와 남해의 소 요시토시 군대는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노량바다로 집결했다. 왜선 5백 척에 군사 1만 명이었다.
18일 오후 6시, 이순신은 무수한 적들이 노량에 닿았다는 보고를 받고 작전을 점검했다. 결전에 앞서 이순신은 갑판에 올라가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 적을 모두 죽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이순신은 남해 관음포에 진린은 곤양 죽도 부근에 닻을 내리고 숨 죽여 왜선을 기다렸다.
19일 새벽 2시경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순신의 함대가 선봉에 섰다. 전투는 과거 다른 해전과는 달리 근접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거의 천 여 척에 달하는 함대가 서로 엉켜 싸웠다. 더구나 캄캄한 밤에 대 혼전이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일본 수군은 조선함대의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왜군은 관음포를 큰 바다로 가는 수로로 생각하고 진입하였다. 날이 밝자 육지에 막힌 포구라는 사실을 안 일본 수군 일부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했고, 나머지 일부는 조명 수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사생결단을 하였다.
이 와중에 왜군 한 명이 이순신에게 조총을 쏘았다. 이순신은 탄환을 맞았는데 치명상이었다. 그는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절명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회과 조카 완이 울음을 터트리려 하자, 곁에 있던 송희립이 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송희립은 이순신의 유해를 옷으로 가린 다음 북을 치며 전투를 독려했다.
11월19일 정오 무렵에 전투가 끝났다. 일본수군은 200척이 침몰 당하였다. 시마즈와 소 요시토시는 가까스로 도망쳤고, 고니시도 남해도 외해를 통해 부산으로 탈출하였다.
전투가 끝나자 진린이 이순신의 배에 다가와 감사를 표하려다가 비로소 그의 죽음을 알았다. 진린은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
노량해전에서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가리포 첨사 이영남도 전사하였다. 이영남은 조방장도 겸하였는데 완도 고금도 충무사에 이순신과 함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우연치 않게 이순신이 전사한 날 유성룡이 파직을 당했다. 그는 안동으로 낙향하여 1604년에 '징비록'을 썼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징계하는 의미였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지 312년이 되는 1910년에 일본은 조선을 손아귀에 넣었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조선이 망한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다시 한 번 그 역사에 얽매이게 된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 입구에 적힌 글)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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