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4265

'경제전쟁' 앞둔 한국... 백범이 생각나는 이유
[중국 속에서 15년 48- 한중관계⑤] 중국과 미국 사이, 중립외교 펼친 백범 김구
14.08.20 14:04 l 최종 업데이트 14.08.20 14:04 l 조창완(chogaci)

그의 조국은 오랜 시간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다. 그 조국마저도 을사늑약(1905년)과 경술국치(1910년)로 일본에게 국권을 차례로 빼앗겼다. 기미년 삼일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출범, 희망이 생기는 듯했지만 초대 대통령을 맡았던 이승만은 타국으로 떠났다. 베이징 등지에서는 의열단이나 조선혁명당이 의혈투쟁으로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남방의 국제도시 상하이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극히 작았다.  

당시 임시정부의 위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 유럽에 이주한 팔레스타인 국민들보다도 못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조국이 있는 반면, 당시 임정 사람들에게 조국이란 실체는 역사 속에서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임시정부에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이 차례로 찾아왔고, 잇따라 의혈투쟁을 성공했다. 특히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홍코우공원 의거는 국민당 정부나 공산당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이후 자신의 신념을 담은 글에서 이렇게 썼다. 

"근래에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큰 이웃 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 정신을 잃은 미친 놈이라고 밖에 볼 길이 없다. 피와 역사와 민족을 같이 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은 것이다."

'그'는 바로 김구 선생이다. 일제 식민지배 하 타국에서 가장 빈천한 처지로 임시정부를 유지했고, 때로는 흉탄에 맞아 사경에까지 이르렀지만 김구 선생은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에서 확실한 노선을 유지했다. 잃어 버린 조국을 가진 이들이 타국에서 36년 동안 투쟁을 한다는 것은 순간순간이 공포이고,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념을 잃지 않았다. 


▲  윤봉길 의거 후 김구선생은 지아싱에서 피신 생활을 하면서 항저우 등지를 다녔다. 지아싱 정부는 이를 기려 김구 피난처를 기념공원으로 조성했다 ⓒ 조창완

임시정부 보면 동아시아 난제 해법 보인다

중국에 있는 동안 필자가 가장 몰두한 것 가운데 하나가 임시정부와 항일독립운동이었다. 다양한 방편으로 그 길을 쫓았고, 글은 물론이고 직접 임시정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기도 했다. 임시정부의 여정을 쫓다 보면 당시는 물론이고 우리가 현재의 중국이나 일본 등을 어떻게 접근해야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다시 김구 선생을 따라 임시정부의 흔적을 쫓아보자. 1919년 3월 29일, 3·1만세운동으로 쫓기는 몸이 된 백범 김구 선생은 동료들과 함께 상하이 행을 결심하고 여정을 떠났다. 15명의 일행은 많은 고비를 넘기고 신의주에서 배를 탄 지 보름여 만에 상하이 푸동선창에 닿았다. 이들은 공승서리 15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미 일제의 먹구름 속에 빠진 조국의 명운을 지키기 위한 기나긴 투쟁을 시작했다. 

백범이 삼일만세 운동을 마치고 이곳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일제 10년의 역사를 경험한 후였다.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미 마흔네 살의 나이에 접어든 그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지난 인생역정이 떠올랐을 것이다. <백범일지>는 네루의 옥중일기가 그러하듯이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솔직히 알려주기 위한 취지로 쓰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부 집필이 시작됐을 때, 백범의 일행이 상하이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1929년이었기 때문이다.

상하이 역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도시 중에 하나다. 19세기 후반 상하이는 개방의 선두도시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또한 조선에 동학에 비견할 태평천국의 난에서 완전히 격리될 수 없었고, 후에는 공산당 운동의 태동지로서 역할까지 하게 된 격변의 땅이다. 상하이는 번성을 거듭했고, 지금은 2천만 명의 인구로 중국 내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 충칭 한국 임시정부 해방을 맞았던 충칭 옌화디의 임시정부 구지. 정부와 기업이 힘을 모아 기념관을 만들었다 ⓒ 조창완

백범 선생은 임시정부의 초대 정무국장을 맡았다. 지금도 초라한 모습으로 명맥만을 유지하는 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3·1만세운동 이후 이곳에 모여들어 임정을 만들었던 이들은 너무나 궁핍한 생활과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운 조국의 현실에 하나둘씩 변심해서 이곳을 떠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급자족하는 것은 물론이고, 곡기가 어려워 굶는 일도 허다했던 임시정부. 그래도 사라져 가는 조국의 등불을 지키겠다는 이들은 적지 않게 찾아들었다. 먼저 찾아든 이가 이봉창 열사였다. 일본어에 능숙하고 혁명의지에 불타던 이 열사는 어렵게 마련된 폭탄 두 개를 들고 일본으로 떠나면서도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라고 말했다. 

이봉창 열사의 의거는 폭탄 하나가 터지지 않는 바람에 일본 왕을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한민족과 조선인의 감정을 악화 시키기 위한 일본의 계략이었던 만보산 사건의 갈등을 유화 시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백범일지>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백범과 윤봉길 의사가 홍코우공원에서 민단장 가와바다를 비롯해 시라카와 대장 등 수명의 중요 인물을 폭살 시킨 사건이다. 그 시절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윤봉길 의사의 열정을 알아차린 백범의 혜안과 노력이 동반된 이 의거로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에 대한민국의 독립의지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 상하이 루쉰공원 윤봉길 의거 기념비 상하이 루쉰공원(원명은 홍코우 공원) 내에 있는 윤봉길 의사 의거터. 내부에는 윤의사의 호를 따서 만든 매정 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 조창완


▲ 옌안 항일군정학교 충칭 임시정부시기부터는 좌우가 연합해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다. '아리랑의 노래'를 쓴 김산이 물리 등을 가르쳤던 연안 항일군정학교는 많은 독립투사가 공부했던 곳이다 ⓒ 조창완

이후 임시정부는 일본을 피해 중국 곳곳으로 피신해야 했다. 초반기에는 임시정부 사무실은 지아싱과 항저우를 전전했다. 김구 선생도 지아싱과 하이옌 재청별서 등을 움직이면서 피신생활을 했다. 지아싱 메이완지에에 있는 김구 피난처와 하이옌의 재청별서, 항저우 후비엔춘은 한국이 국제적 위상이 커지면서 관련 기념관이 만들어졌다.

같은 민족에게 저격 두 차례...쉽지 않았던 '나라 바로세우기'


▲  이곳에서 김구선생과 이청천 등이 회의를 하다가 이운한의 저격을 받고, 죽음 직전까지 다달았다. 후난성 정부는 이곳에 임시정부 기념지를 만들었다. ⓒ 조창완

이후 임시정부는 난징(1935~1937), 창사(1937~1938), 광저우(1936~1939), 치장(1939~1940), 충칭(1940~1945)을 옮겨 다니면서 우리 민족의 법통을 유지했다. 가장 극적인 곳 가운데 하나가 창사다. 

1938년 5월 6일 밤 창사 시내에 있는 난무팅에서 국무위원 김구를 비롯해 군사위원 현익철, 유동열, 이청천 등이 회의를 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운한이 들어와 총을 난사했다. 현익철은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숨졌고, 김구 선생 역시 얼마 가지 못할 것으로 파악해 치료조차 포기했다. 다행히 여전히 숨이 붙어있자 치료를 시작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1년 후 역시 같은 민족의 흉탄에 쓰러질 운명이었지만. 

천신만고 끝에 김구 선생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충칭에 도착했고, 광복군 조직 등 한반도 진공을 위한 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일본군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중국 남부 대륙은 지나 임시정부에 도착한 김준엽 등도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이런 시도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임시정부의 힘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카이로회담 등을 통해 확인된 한국의 독립은 이런 노력들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임정 요원들은 광복 이후 미국의 방해에 부딪쳐 11월에야 귀국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에 돌아온 백범의 여정 역시 수많은 갈등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분단된 대한민국은 있을 수 없다며 남북을 드나들던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운명했다. 그토록 염려하던 조국의 분열을 부른 한국전쟁은 꼬박 1년 뒤에 왔다. 

임시정부가 진행되던 시기 중국과의 역학 관계는 동아시아 패권 쟁탈과 중국의 내전이라는 복잡한 상황이 같이 동반됐다. 중국은 제 1차 국공합작(1924.1~1927.7)과 2차 국공합작(1937.9~1945.8)을 거치면서 내부적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역학관계가 정리되던 시기였다.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 9월)으로 야욕을 보이기 시작했고, 중일전쟁(1937년 7월)을 거치면서 그 욕망의 수치는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았다. 

우리 임시정부는 초반기부터 민족주의 노선을 좇았다. 의혈투쟁보다는 외교적 노력 등을 우선적으로 사용했다. 반면에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이나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항일운동 세력은 무력전을 중심으로 했다. 다행히 1940년대 들어서는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좌우익을 통합하면서 한반도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그럼에도 한반도는 분단의 방향으로 나아갔고, 결국 이런 현실은 한국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으로 치달았다. 

무력전쟁에서 경제전쟁으로

당시가 군사에 의한 '무력전쟁'의 시기라면 지금은 무역과 금융 등이 복잡하게 융합되어 있는 '경제전쟁'의 시기다. 경제성장의 동력을 잃어 버린 일본은 금융 권력을 유지하려는 미국과 함께 중국 세력을 역이용해 다시 한 번 성장 동력을 잡기 위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대결의 방아쇠 같은 역할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특히 중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26%에 달하는 상황이라 중국의 입장을 외면했다간 순식간에 경제 동력을 잃어 버릴 수 있다는 점도 위기감을 고조 시킨다. 반면 금융 정책 등이 중국 쪽에 가까워질 경우 미국과 일본의 협공을 받아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질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선 성급한 선택보다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이 촉발하던 무력 전쟁의 시대가 아니다. 또 필연적으로 중국은 한반도가 위기로 가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이 상황에서 섣부른 판단은 자칫 위기를 만들 수 있다.

김구 선생은 국내의 지원이 거의 없는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중국에 의탁하기 보다는 독자적인 힘을 기르기 위해 끊임없는 외교적 노력을 시도했다. 특히 광복군을 미국 전략정보국(OSS)에게 위탁해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는 등 중립외교에도 힘썼다. 장제스의 국민당 도움도 받았지만, 마오쩌둥의 팔로군과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립외교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런 의지가 담긴 글이 앞에서 소개한 '나의 소원'이다. 

김구 선생은 귀국해 정권을 이루지도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그가 가진 정신이나 행동은 중국 땅 곳곳에서 후손들을 일깨우고 있다. 


▲  임시정부 요원들 ⓒ wikimedia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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