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장성[千里長城]
천리장성[千里長城] - do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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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대 천리장성과 고려시대 천리장성이 있는데, 고구려시대 천리장성은 고구려 말기 중국으로부터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구려의 서부 변경(요동지방)에 연개소문의 지휘 하에 쌓은 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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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대 천리장성과 고려시대 천리장성이 있는데, 고구려시대 천리장성은 고구려 말기 중국으로부터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구려의 서부 변경(요동지방)에 연개소문의 지휘 하에 쌓은 장성이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곧 당에 의하여 망하였다(618). 그후 626년 당나라 태종이 즉위한 후 당과 고구려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당 태종은 국내의 세력을 완전 장악하고 세계제국 건설의 야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동돌궐을 침략하는 등 주변 국가에 위협적이 되었다. 영류왕 13년(631)에 당나라 사신 장손사(長孫師)는 고구려에 와서, 과거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京觀)이란 기념물을 헐어버렸다.
당이 주변국을 침략한다는 정보가 알려지고 있던 터라 이에 고구려는 당에 대하여 매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즉시 서쪽의 경계를 방어하기 위하여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북쪽으로는 만주 중부지역인 부여성(지금의 눙안農安)에서 시작하여 남쪽 끝은 발해만에 있는 비사성(지금의 다롄 大連)에 이르는 천리가 되는 장성이었다.
장성은 곳곳에 있는 토성들을 연결하면서 쌓은 토축성이다. 너비가 약 6m이며 높이는 2~3미터의 고르지 않은 성벽이다. 석축성에 있는 성문이나 누각, 돈대 등이 없는 단조로운 성으로 영구성보다는 임시방편으로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성을 축조하는 데는 무려 16년이 걸려 647년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당군은 645년부터 648년까지 3차에 걸려 침입하였다. 장성은 얼마정도의 적군 저지력은 있었으나 당나라 대군을 막아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성의 축조는 영류왕의 명령으로 축조되었다는 설과 연개소문의 건의에 의해 구축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어쨌든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구축된 것은 사실이다. 연개소문은 성을 축조하는 동안 642년 10월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침공하여 영류왕과 자신을 반대하는 파를 모조리 제거하고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무단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고구려 말기 서부국경의 방어를 위하여 축조한 성.
626년 당나라 태종이 즉위한 뒤부터 당나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631년(영류왕 14) 당나라 사신 장손사(長孫師)가 와서 고구려가 지난 날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경관(京觀)을 헐어버린 사건이 발생하자 고구려의 당에 대한 경계심은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이해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는 동북쪽으로는 부여성(扶餘城:지금의 눙안[農安])에서 서남쪽으로는 발해만의 비사성(卑沙城:지금의 다롄[大連])에 이르기까지 1,000리에 걸친 장성으로 16년 만인 647년에 완성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주청으로 천리장성이 축조되었다고 했으나, 〈삼국사기〉에는 영류왕의 명으로 연개소문이 642년 1월 공사를 감독했다고 한다. 어쨌든 천리장성의 축조는 연개소문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공사를 감독하던 연개소문은 642년 10월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들어가 영류왕 이하 자신의 반대파를 대량 학살하고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잡았다.
〈봉천통지 奉天通志〉·〈회덕현지 懷德縣志〉에 기재된 천리장성 유적에 관한 기록을 토대로 조사한 결과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삼황묘(三皇廟)와 동황화전자(東黃花甸子) 일대의 성벽은 그 너비가 6m, 높이가 2~3m 되며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은 토축성으로 밝혀졌다. 한편 천리장성에는 성문·각루(角樓)·돈대(墩臺) 등과 같은 시설이 없는 것을 볼 때 일종의 보조시설에 불과한 것으로서 당나라 군대의 동진을 저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곧 천리장성은 고구려 변경선 밖의 방어선에 축조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변경성곽들을 서로 연결시켜놓은 형태로서 천리장성으로 연결되어 있는 랴오허 강[遼河] 동쪽의 기존 성곽들은 적의 침입을 막는 주요 방어거점으로서의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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