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avy.ac.kr/common/file/chungmugong1_01.pdf

2. 조선 수군의 전통과 연원

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성을 지닌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해양강국이었다. 조선 왕조에서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편성된 고려 말의 수군을 계승하여 해전을 전문으로 하는 독립된 군으로 발전시켰다. 

▶ 200 여 년의 전통을 지닌 독립된 수군이 존재했었다.

1990 년대 중반 필자가 처음 이순신 제독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가졌던 의문 가운데 하나는 조선 수군의 존재였다.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성능을 지닌 함선과 첨단 무기체계가 필수적인데 과연 임진왜란 당시 우리의 수군은 어떤 함선과 무기체계를 지니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해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조선 수군의 실체에 대해서는 일부 전문 연구자들만이 알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었다. 임진왜란의 해전 승리를 설명하는데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순신 이외에서 해전 승리의 요소를 찾는 것 자체가 그 분의 위대성을 폄하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해전 승리의 중요한 요인인 함정과 무기체계라는 변수를 제외한 채 한참동안이나 임진왜란의 해전 승리가 설명되고 해석되었던 것이다. 
 
이제 다음의 물음을 한 번 돌이켜 보자. 이순신은 홀로 싸웠나? 아니다. 조선 수군을 지휘하여 싸웠다. 조선 수군은 온전히 이순신이 홀로 건설하였나? 아니다. 조선 수군은 고려 말부터 독립된 군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수군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반도(半島)라는 지정학적인 특성을 가진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해양강국이었다. 광개토대왕,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가 그렇고, 백제가 북경 옆 발해만 연안을 다스렸다는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이 그러하며, 신라의 장보고 대사의 활약이나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해상토호세력이었다는 사실 또한 이를 반증해 준다. 고려 수군이 상비군화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왜구의 출현이었다. 고려 고종 

10 년(1223 년)부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0여년간 왜구가 침입한 횟수는 무려 393회에 이른다. 40년 동안 거의 매달 왜구와의 전쟁이 있었던 셈이다. 공민왕 말기에 이르러 고려 조정은 왜구들을 육지에 상륙시키지 않고 바다 위에서 격퇴하는 해전주의(海戰主義) 전략을 도입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수군의 편제도 점차 정비되어 도절제사(都節制使), 절제사(節制使), 수군도만호(水軍都萬戶), 수군만호(水軍萬戶) 등을 임명하여 군선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바다에 익숙한 해안 지역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수군 사졸을 확보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 말엽의 수군 조직과 편제는 조선왕조에 계승되어 점차 완비되었다. 수군의 정원도 책정되어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50,402 명이 전국 8 도에 분산 편성되었으며, 성종 대에 편찬된 《경국대전》〈병전(兵典)〉에는 48,800 명이 정원으로 책정되었다. 이는 당시 중앙군 전체< 병력 11 만 명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원이며, 조선시대 전기의 인구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500 만? 700 만으로 추정해 볼 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군기의 해이 여부를 떠나 임진왜란이 발발할 시점에 조선에는 해전을 목적으로 정비된 200 여 년의 전통을 지닌 독립된 수군이 존재했었고 그 병력 규모는 약 5만여명에 달했으며, 각 도에는 당상관인 정 3 품(正三品)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최고 지휘관으로 삼고 그 휘하에 종 3 품인 첨절제사 (僉節制使), 종 4 품인 만호(萬戶)라는 직책의 수군 지휘관을 편성 운영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침략하는 물목인 영남, 호남의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능력 있는 무인(武人)을 계급에 관계없이 천거하게 하여 등용하였다. 일본의 침략 징후에 따른 위기감이 조정 안팎에 널리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우리 귀에 익숙한 장수들이 천거되어 수사급(水使級) 지휘관 이른바 함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등이 바로 그들이다. 

종6품인 정읍 현감으로 근무하고 있던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 정3품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순신의 7계급 특진에 대해 조정 대신들과 대간(臺諫)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국왕인 선조는 이를 과감히 단행하였다. 실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에 부임한 이순신은 전쟁 준비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7 계급 특진되었는지 그리고 국왕이 자신을 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조선 조정에서는 민족의 영웅 이순신을 호남의 물목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하는 매우 훌륭하고도 적절한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임진왜란 무기, 군사  http://tadream.tistory.com/11518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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