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avy.ac.kr/common/file/chungmugong1_01.pdf

3. 조선시대에도 해군력 증강사업이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 수군은 최신예 함선과 첨단 무기체계를 보유하고 있었다. 나아가 혁신된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혁신된 마인드를 지닌 수군 장수 이순신이 있었다. 
 
▶ 임진왜란 시 조선 수군 주력함인 판옥선


임진왜란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의 주요 무기체계는 천자ㆍ지자ㆍ현자ㆍ황자총통 등의 
이른바 화약 무기였다. 해전에서 함포가 사용되기 전 동ㆍ서양에서의 보편적 해전 전술은 원거리에서는 인명 살상용 화살이나 적의 함선을 불사르기 위한 불화살을 쏘면서 접근하다가, 근접하면 충돌하여 함선을 격파시키거나 또는 배에 올라가 백병전을 벌여 적을 제압하는 이른바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이 주종을 이루었다. 
 
임진왜란 시 조선 수군이 사용했던 천자ㆍ지자ㆍ현자ㆍ황자총통은 고려의 것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고려 말 최무선 장군에 의해 개발된 화약과 화포는 왜구 섬멸전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우왕 6 년(1380 년) 8 월 나세(羅世), 심덕부(沈德符), 최무선(崔茂宣) 등이 전선 100 여 척을 이끌고 가서 진포구(鎭浦口: 현재의 금강 어구)에 정박해 있던 왜선 500 척을 화포로 불태운 진포 해전, 우왕 9 년(1383 년) 5 월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 장군이 함선 47 척을 이끌고 왜선 120 척을 추격하여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섬멸한 관음포 해전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해전사상 최초의 함포를 사용한 해전이다. 

화약무기가 실전에서 최초로 사용된 것이 육전(陸戰)이 아니라 해전(海戰) 이었다는 사실은 
음미해 볼만한 일이다.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다지는 태종 일대(一代)에 이르러 화약무기는 새로운 무기체계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된다. 화약무기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제조하는 화약감조청(火藥監造廳)이 세워지고, 여기서 만들어진 화약 무기는 서북변경 지대에 광범위하게 배치되었으니, 바야흐로 육전(陸戰)에서도 화약무기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세종 대에 이르면 화약무기는 또 한 번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화포 공격을 전담하는 화포군(火砲軍)이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약 및 화기의 성능이 개량되어 기존의 화포에 비해 파괴력 및 사정거리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명종 대에 이르러서는 왜구와 수많은 해전을 치르면서 총통과 발사체인 대장군전(大將軍箭)의 효용성이 입증되었다. 이에 따라 명종 10 년(1555 년)부터 명종 20 년(1565 년) 사이에 천자ㆍ지자ㆍ현자ㆍ황자총통 등과 같은 대형화포가 대대적으로 주조되었는데, 이 때 만들어진 화포류는 임진왜란 해전에서 주력 무기로 사용되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임진년(1592 년) 2 월 22 일에 녹도(鹿島) 만호진(萬戶陣)을 순시하면서 총통 쏘는 것을 점검하였으며, 3 월 27 일에는 좌수영에서 만든 거북선에서 총통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4 월 12 일에는 몸소 배를 끌고 바다 가운데로 나아가 거북선에서 지자, 현자총통의 시험 사격을 실시하였다. 적어도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완벽한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 때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 건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논의가 있었다. 특히 중종 때에 있었던 삼포왜란(三浦倭亂)은 이런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중종 16 년(1521 년) 병사(兵事)에 능통했던 참찬관 서후(徐厚)가 대선(大船) 건조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당시 왜구의 주요 해전 전술이 배를 계류하고 기어 올라와 검을 주무기로 싸우는 등선육박전술 (登船肉薄戰術)인데,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적이 칼을 빼어들고 기어오를 수 없을 정도의 큰 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종 39 년(1544 년)에는 판중추부사 송흠(宋欽)이 중국인과 왜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널빤지로 사방을 가린 대선(大船)을 건조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적들이 기어오를 수 없도록 사방을 널빤지로 가린 대선을 건조하여 운용한다면 군졸들이 안전하게 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힘을 다해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니 앞서 서후가 제기했던 것을 더욱 구체화 한 것이었다. 
 
중종을 뒤이어 왕위에 오른 명종은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있던 1555 년(명종 10 년)에 드디어 신예 함선인 판옥선(板屋船)을 만들어 한강에서 사열식을 가졌다. 임진왜란 발발 37년 전의 일이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으로 선정된 판옥선은 이후 10여년 동안 대대적으로 건조되었다. 1566 년(명종 21 년)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경국대전》에 명시된 맹선(猛船)의 숫자를 기준으로 판옥선을 만들어 운영하도록 하였다. 바야흐로 조선 수군의 판옥선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경국대전》에 나와 있는 대ㆍ중ㆍ소맹선의 척수는 병력이 상시 배치된 군선 (軍船) 
488 척이며 전시에 대비해 평소에는 병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 무군선 (無軍船) 251 척을 포함하면 총 729 척이다. 판옥선은 선체 위에 하체의 너비보다 넓은 상장(上粧)을 설치하여 그 사이로 노를 내밀어 저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판옥선의 함선으로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전투원과 비전투원인 격군을 각각 1, 2 층의 갑판에 분리시켜 두어 각자의 기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둘째로 판옥선은 함선 자체가 클 뿐만 아니라 전투원들이 2 층 갑판 위에 배치되어 있어서 적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공격할 수 있었다. 셋째로 적 특히 왜구가 접근하여 공격하고자 하여도 마치 성벽과 같이 설치된 2 층의 높은 상장으로 말미암아 배에 뛰어오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서후나 송흠 등이 건의한, 모든 문제가 해결된 함선이 바로 임진왜란의 주력함선인 판옥선이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 수군의 총통 이른바 함포 중심의 무기체계는 해전에서의 새로운 전술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이와 같은 무기체계의 변화에 따른 해전 양상의 변화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기존의 보편적 해전 전술인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고수하는 일본 수군을 맞이하여 함포 중심의 혁신된 무기체계로 무장한 조선 수군이 전투력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본 함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그리고 일본 함선이 총통의 유효 사정거리에 도달했을 때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그들이 조선의 함선에 접근하기 이전에 격파해야 했다. 이순신이 벌인 대부분의 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조선의 함선에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모두 격파, 분멸되었다. 이순신은 혁신된 무기체계인 함포전의 대가였다. 이것이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의 함선 피해는 거의 전무했던 반면 일본의 함선 피해는 격파되거나 분멸되어 대부분 침몰되었던 이유이다. 

그러나 일정 거리에서의 포격전에 만족할 이순신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돌격선인 거북선 건조에 착수하였다. 일본 수군을 보다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신예 함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해전에서의 거북선의 역할은 적의 지휘선이나 주력함을 목표로 삼아 지자, 현자총통을 쏘면서 돌격하여 격파함으로써 개전 초기에 적의 지휘부를 무력화 시키는 데 있었다. 거북선의 덮개는 돌격하는 과정에서 적선과 충돌하여 서로 접하게 될 때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특기로 하는 왜병이 칼을 들고 뛰어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막강한 포격 능력을 지닌 판옥선과 돌격 능력을 지닌 거북선이 결합하여 창출해 낸 조선 수군의 막강한 전투력! 이것이 전라좌수사 이순신 지휘 하의 조선 수군의 실체였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돛을 달고, 총통을 설치하여 시험사격을 마치고 전투세력으로 합류시킨 날은 임진년(1592 년) 4 월 12 일, 정확히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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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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