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avy.ac.kr/common/file/chungmugong1_01.pdf
 
7. 이순신병법 (4) 지리(地利) 이용의 원리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라

<<맹자>>에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의역하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전장에서의 시간적 조건은 공간적 조건만 못하고, 공간적 조건은 인화단결만 못하다는 것이니 지형의 이점을 안고 싸우는 것이 비록 인화단결보다는 못하다 하더라도 전쟁 승패에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명량해전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은 지형의 이점을 잘 활용한 데 있다. 

이순신이 지형의 이점을 활용한 사례 가운데 제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1: 30의 열세 상황을 반전시켜 승리로 이끈 명량해전이다.

정유년(1597년) 7월 통제사 원균 지휘하의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고 통제사 원균조차도 일본군에 살해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8월 3일 진주의 굴동에서 통제사 임명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8월 17일 장흥에 도착하여 회령포에서 전선 12척을 수습하고, 이진을 거쳐 8월 24일 어란포에 도착하였다. 8월 27일 어란포에서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 패배이후 처음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는다. 조선 수군의 잔여 세력이 매우 미약하다는 것을 간파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고 서해안을 따라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수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이순신은 8월 29일 진도의 벽파진으로 진을 옮긴 다음 전라우수영으로 다시 진을 옮기는 9월 15일까지 해전 준비에 임하는 한편 300여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을 무찌를 전략과 전술을 구상하였다.

9월 14일 육지로 정찰을 나간 임준영이 돌아와 “일본 함선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벌써 어란포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명량해전 하루 전이 9월 15일 진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 진을 옮긴 이순신은 장수들을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하였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려고 꾀를 내고 싸우면 죽는다’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亂中日記》, 丁酉年 9月 15日)

이순신은 열세인 조선수군으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펼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명량의 좁은 물목을 등지고 싸울 경우 수효가 적은 조선수군조차도 전투력을 동시에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이 명량의 물목을 해전 장소로 택한 것은 우세한 일본 수군 함대를 좁은 물목에 가두어 놓고 열세한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명량해협 입구에 포진시켜 기다리고 있다가 해협을 빠져 나오는 선두함선을 집중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량의 지형적 여건을 이용하여 수적 절대 열세를 만회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순신의 계산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 수군은 전체 300여 척의 함선 가운데, 협수로에서 기동이 원활하지 않은 대선인 아다케〔安宅船〕를 제외시키고, 판옥선보다도 작은 세키부네〔關船〕133척을 주력 함선으로 하여 명량해전에 투입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 함선 133척은 조수를 타고 명량해협을 빠르게 통과하여 조선 수군 함선 13척을 공격하는 것으로 명량해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실제 전투 국면에서는 133척 가운데 31척이 조선 수군 함선 13척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양상으로 해전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볼 때 당초 이순신이 계획하였던 것처럼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병법의 원리가 정확히 구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란포에 집결되어 있었던 일본 함선의 척수를 기준으로 보면 최초 13척:300척이라는 절대 열세 상황에서 명량의 좁은 물목은 13척:133척으로 열세 상황을 완화해 주었으며, 실제 해전 국면에서는 다시 13척:31척의 상황으로 열세 상황이 크게 축소되었다. 결국 이순신은 명량의 좁은 물목을 이용하여 1:30의 열세 상황을, 1:3으로까지 완화시키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임진년(1592년) 이후 해전 상황이 증명하듯이 1: 1의 경우 화력 면에서나 함선 성능 면에서 일본 함선은 조선의 주력함인 판옥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비록 어려운 해전이었지만 조선 수군의 판옥선 13척은 에워싸고 있던 일본 함선 31척을 모조리 격파하였다. 명량해전은 조선의 판옥선 1척이 일본의 세키부네 3척 이상을 대적할 수 있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제외한 모든 해전에서 좁은 협수로를 무대로 해전을 벌이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의 명장 이순신도 1:30 이상의 절대열세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명량의 지형적 이점을 등에 업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라. 그런 까닭에 어제 진(陣)을 한산도로 옮겼습니다.

‘지리(地利) 이용 원리’를 적용한 두 번째로 주목할 만 한 사례는 한산도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한 호남 길목 차단 전략이다.

임진년(1592년) 4차례의 출동에서 총 16회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다음해인 계사년(1593년) 7월 진(陣)을 한산도로 옮겼다. 일본군이 남해, 서해의 바닷길을 따라 호남을 침범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왜 부산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한산도를 지키는 일에 몰두하였을까? 그 이유는 임진년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과 조우할 경우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육지에서 조선 수군과 대치하는 일종의 ‘요새함대’ 전략을 구사하고 있어서 전과를 확대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웅천이나 안골포, 김해나 양산 등지에 성을 쌓고 웅거하고 있는 일본군을 제쳐두고 부산포를 공격할 경우 자칫 앞뒤의 적에게 포위되는 피동(被動)의 형국에 노출 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호남으로 통하는 바닷길을 막아 일본군의 전쟁 수행 의도나 전략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유가 이순신이 현덕승(玄德升)이란 사람에게 보낸 편지글에 보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약에 호남이 없다면 이는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어제 진(陣)을 한산도로 옮겨 바닷길을 막을 계책을 모색하고 있습니다.”(『李忠武公全書』 卷十五, 書, 答玄持平德升)

한산도는 바닷길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는 호남의 관문이다. 부산에서 바닷길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거제도 안쪽 바다의 물목인 견내량이나 바깥 바다인 옥포만 쪽을 경유해야 하는데 한산도는 두 방향으로 오는 적을 가로막을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이다. 따라서 한산도를 지키는 것은 나라의 울타리에 해당하는 호남을 지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의 경제적 기반인 호남의 곡창을 지키는 일이었다. 이순신은 부산포를 공격하여 일본군의 본토와의 교통로를 차단하는 것도 중요한 전략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호남 길목 차단 전략임을 확신하였다. 이순신은 정유년(1597년) 통제사에서 파직될 때까지 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칠천량해전 패배 이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조정에서 수군의 세력이 매우 미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육전(陸戰)을 명하자 장계를 올려 수군의 역할을 환기시키고 전의를 불태우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임진년(1592년)부터 정유년(1597년)까지 한산도를 지켰던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

“임진년(1592년)부터 5, 6년간 도적들이 곧바로 전라도와 충청도로 돌격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臣)에게는 전선 12척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해 볼만 합니다. 이제 만약 수군을 모두 없애신다면 이는 도적들이 다행이라고 여기는 바이며, 이로 말미암아 호남의 바닷길을 따라 한강에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신(臣)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李忠武公全書』 卷九, 附錄一, 行錄)

계사년(1593년) 이후 본격적으로 구사되었던 한산도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한 호남 길목 차단 전략은 임금인 선조와 조정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이 때문에 선조의 불신감과 미움의 감정이 증폭되어 급기야 통제사에서 파직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순신이 파직되고 새로 통제사가 된 원균 또한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원균 지휘하의 조선 수군은 부산포로 출동하게 되고, 이 한 번의 출동으로 이순신이 6년여 동안 건설해 놓았던 최대, 최강의 조선 함대는 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다.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정유년(1597년) 이전까지 보전되었던 호남이 초토화되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적의 총칼 앞에 무참히 살육되었다. 정유재란의 결과는 이순신이 한산도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여 구사해 왔던 ‘호남 길목 차단 전략’이 얼마나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이었는지를 반증해 주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호남 길목 차단 전략’의 정당성을 검증하기 위해 치렀던 대가치고는 너무나 큰 희생이었다. 

 
임진왜란 무기, 군사  http://tadream.tistory.com/11518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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