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avy.ac.kr/common/file/chungmugong1_01.pdf

6. 이순신병법 (3) 주동권(主動權) 확보의 원리 
승리하기에 유리한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라

주동권(主動權)은 전장의 상황을 아군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권한이다. 주동권 확보의 요체는 승리하기에 유리한 장소와 시간을 어느쪽이 선택했느냐에 있다. 어려웠던 해전으로 평가되고 있는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싸울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해전에서의 주동권을 확보하였다.
임원빈 

▶ 명량해전에서조차 이순신은 싸울 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주동권을 확보하였다.

《손자병법》에 “적을(아군에게 유리한 장소로) 끌고 오지, 적에게(유리한 장소로) 이끌려가지 않는다(致人而不致於人)”는 구절이 있다. 한 마디로 적을 끌어내어 내가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싸우도록 하지 거꾸로 적에게 이끌려가서 적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싸우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선수군의 통합함대는 임진ㆍ정유왜란 기간 중 오직 한번 칠천량해전에서만 주동권을 빼앗겼는데, 그 결과는 조선 수군의 궤멸이라는 치명적 패배였다. 조정의 강제적인 출동명령은 수군 지휘관으로 하여금 주동권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을 앗아갔으며 결과적으로 조선수군 통합함대는 전 출동기간 중 피동(被動)의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칠천량 해역은 조선수군이 싸우고자 한 장소가 아니었다. 정유년(1597년) 7월 14일 아침 부산포로 출동한 조선 수군은 폭풍을 만나 공격다운 공격도 못해보고 저녁 무렵 가덕도로 후퇴하여 상륙하였는데 여기서 매복해 있던 일본군에게 400여명이 살해당했다. 7월 15일 조선 수군은 다시 함대를 수습하여 영등포를 거쳐 칠천량 앞 바다로 후퇴하여 정박하였다. 결과적으로 그곳은 일본의 지상군과 수군에 의해 포위된 일종의 함정과 같았다. 7월 16일 오전 4시경 겹겹이 포위된 상태에서 야간 기습을 받은 조선수군은 해전다운 해전을 해보지도 못한 채 결국 궤멸되었다. 주동권 확보에 실패하였기 때문이었다. 

임진년(1592년) 제1차, 제2차 출동에서의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배치상황을 정확히 알고 해전에 임했던 반면에 일본 수군은 그렇게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해전을 위한 준비도 미흡했다. 당시 일본 수군은 지상전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만에 빠진 채 해안 곳곳에서 노략질에 여념이 없었던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조선수군과 해전을 벌여야 했다. 일본 수군은 철저히 피동(被動)의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잘 조직되고 통합된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항상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전에서의 주동권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제3차 출동 중에 벌어진 한산해전에서도 이순신은 해전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주동권을 장악하였다. 한산해전에서 이순신은 유인술을 구사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편하고 나아가 전과(戰果)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해역이 좁은 견내량 보다 넓은 한산도 앞바다가 유리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견내량은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이 서로 부딪힐 염려가 있고 또 싸우기에도 곤란할 뿐만 아니라 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狀啓(1)》, 見乃梁破倭兵狀) 

한산도 해전을 앞 둔 이순신은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따라 평소 해전에서 불리할 경우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주하는 일본 수군의 행태를 보아 온 이순신은 육지로 도주할 수 없는 한산도 앞 넓은 바다를 해전 장소로 정하고 견내량에 있는 일본 수군 함대를 유인하였던 것이다. 한산도 앞 바다에는 조선 수군의 주력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인하던 5, 6척의 함선을 포함해 총 58척에 달하는 조선 수군 통합함대는 사전의 작전계획에 따라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일제히 총통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일본 함선 73척 가운데 59척을 격파하였다.

불가사의한 해전으로 평가되는 명량해전에서도 이순신은 싸울 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주동권을 확보하였다. 회령포에서 12척을 수습한 이순신은 300여 척의 일본 수군의 추격을 피하며 이진, 어란포, 벽파정으로 후퇴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과연 어디서 싸워야 승산이 있을까? 명량해전이 있기 하루 전 이순신은 진도의 벽파정에서 해남의 우수영(右水營)으로 진(陣)을 옮겼다. 그 이유가 《난중일기》에 보인다.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진을 우수영 앞 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鳴梁)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陣)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려고 꾀를 내고 싸우면 죽는다’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서치 않겠다고 엄격히 약속하였다.”(《亂中日記》 丁酉年 9월 15일)

명량의 물목을 해전 장소로 택한 가장 큰 이유는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병법의 원리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관운장(關雲長)이나 장비(張飛)같은 힘센 장수가 외나무 다리를 지키고 있을 경우 수백 명이라도 당해낼 수 있다는 원리이다. 적군이 아무리 많더라도 외나무 다리를 타고 오는 자는 한 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300여척의 일본 수군 함대를 명량의 좁은 물목에 가두어 놓고 조선 수군은 13척 모두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물목 바깥의 넓은 해역에 위치하여 싸운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순신은 명량의 좁은 물목을 해전의 장소로 선택함으로써 13대 300이라는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결과적으로 명량의 좁은 물목은 일본 수군에게는 가장 불리한 역으로 조선 수군에게는 가장 유리한 해전 장소였던 것이다.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도 싸울 장소를 먼저 선택한 쪽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었다. 소서행장 군의 철군퇴로를 봉쇄하고 있던 이순신은 사천ㆍ남해ㆍ부산 등지에 있던 일본 수군이 소서행장 군을 구하기 위해 전면 출동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바로 봉쇄를 풀고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다. 소서행장 군을 계속해서 봉쇄할 경우 앞뒤의 적에게 협공을 당하게 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도 이순신은 해전 장소로 노량의 물목을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전장의 주동권을 확보한 셈이다.

주동권은 고유한 것이 아니어서 쌍방 모두가 쟁취할 수 있다. 불리한 것을 유리하게 변화시키고, 피동을 주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지휘관의 몫이다. 이순신은 명량해전 같은 열세한 해전에서조차 조선 수군에게 유리한 해전 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해전 승리의 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무기, 군사  http://tadream.tistory.com/11518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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