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1&artid=20120530095145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발해멸망과 백두산 화산폭발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편집국장 lkh@kyunghyang.com 입력 : 2012-05-30 09:51:45ㅣ수정 : 2012-05-30 16:01:16
“발해의 ‘민심이 멀어진’(離心) 틈을 타 싸우지 않고 이겼다.(離心乘 흔而動故不戰而克)”(<요사> ‘야율우지전’)
925년 12월,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발해정복을 위해 출병한다. 발해의 부여성을 포위한 뒤 단 3일만에(926년 1월3일) 성을 함락시킨다. 거란의 선봉은 발해의 수도 상경의 홀한성을 향해 질주한다. 도중에 발해의 노상이 이끄는 3만대군을 격파하고 단숨에 홀한성을 포위한다.(9일) 발해의 마지막 왕은 대인선(재위 906~926)이었다. 대인선은 단 3일만인 12일 항복을 청한다.
<요사>가 전하는 항복의 순간은 치욕적이다. 항복의사를 전한 지 이틀 뒤인 14일 대인선은 ‘흰옷을 입고 양을 끌고 또 신하 300여 명과 함께(素服탁索牽羊 率僚屬三百人)’ 항복한다. 이로써 발해(698~926년)는 15대 229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백두산 천지. 10세기 어느 날, 역사시대 가장 큰 폭발의 위용을 과시했다. 겨울철 폭발이었다. 엄청난 화산쇄설류가 녹은 눈과 함께 쏟아져 내려 주변의 생태계를 절멸시켰다. 화산재는 1500킬로미터 떨어진 일본 홋카이도와 아오모리까지 퍼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너무도 허망한 멸망
그런데 말이다. 좀 이상하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승승장구했던 발해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멸망이다. 고구려의 광활한 고토를 거의 대부분 차지했던 발해제국이 보름도 되지 않아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좀 이상하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승승장구했던 발해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멸망이다. 고구려의 광활한 고토를 거의 대부분 차지했던 발해제국이 보름도 되지 않아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다.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역사학자들은 특히 멸망하기 직전인 925년 발해인들이 대규모로 고려로 내투(內投·투항)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태조 8년(925년) 9월, 발해장군 신덕 등 500명이 내투하다. 발해 예부경 대화균 등이 100호의 균노 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 1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하다. 12월에는 좌수위소장 모두간, 검교개국남 박어 등이 10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하다.”
심상치 않은 일이다. 발해의 장군과 왕·귀족이 멸망(926년) 하기 몇 달 전부터 대규모 ‘엑소더스’에 나선 것이다. 9월엔 500명에서 석달도 채 안된 12월엔 1000호로 급증하고 있다. 왜 일까. 발해멸망 후 거란이 세운 동란국(東丹國)의 재상을 지낸 야울우지는 분명 발해의 ‘이심(離心)’을 틈타 제대로 된 싸움없이 승리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발해는 옛 고구려 땅을 포함, 광활한 영토를 개척했다. 그러나 10세기 백두산 화산폭발로 대재앙을 맞았다. 화산재는 백두산 동쪽 지역을 휩쓸었다. 이 때 날아간 화산재는 일본열도까지 쌓였다. 숫자는 화산재 단층의 두께를 나타낸다.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소원주 저)의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
■ 대규모 엑소더스의 실체는
역사학자들은 이런 기록들을 토대로 발해의 멸망을 다각도도 분석했다. 지배세력인 고구려인과 피지배세력인 말갈인 사이의 모순, 귀족들의 사치생활, 그리고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 등….
역사학자들은 이런 기록들을 토대로 발해의 멸망을 다각도도 분석했다. 지배세력인 고구려인과 피지배세력인 말갈인 사이의 모순, 귀족들의 사치생활, 그리고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 등….
그러나 문제는 발해 사회내부에 어떤 특정한 권력투쟁이 실재했다는 기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이다.
<요사>의 기록에 따라 ‘발해가 멸망했다’는 926년 이후에도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계속 발생한다.
“926년 4월, 발해국 대인선이 대진림 등 116명을 사신으로 보내 조공했다.”(<책부원귀> 등)
발해가 분명히 926년 1월 멸망했다면서 그 후에도 버젓이 ‘발해사(渤海使)’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중국(후당)에 보낸 것이다. 그 후 935년까지 8차례나 발해가 사신을 파견했다. 이는 무슨 이야기인가.
역사시대 주요 화산폭발. 그래픽|이은진 기자
사실 거란은 발해정복 후 발해의 고토에 동란국(東丹國)을 세운다. 하지만 이 동란국은 2년 뒤 랴오양(遼陽)으로 천도한다. 그러니까 거란은 발해를 정복한 뒤 곧바로 통치를 포기한 것이다. <요사>는 “발해땅이 중국 동북부의 오지여서 통치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따라서 거란이 떠난 후 발해의 고토에는 여전히 발해의 이름을 사용한 나라가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또 하나 이 격동의 시기에 발해인들의 대규모 엑소더스도 상상을 초월할만큼 이어진다.
먼저 발해멸망 직후와, 동란국 천도와 함께 강제이주 당한 발해인은 9만4000여호(<요사>)에 이른다. 1호당 가족이 5명이라면 47만명, 즉 50만명에 가까운 숫자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거란이 발해인을 강제 이주시킨 뒤 많은 마을(현)을 폐쇄했다는 것이다. 이를 폐현(廢縣)이라 한다. <요사>를 보면 거란이 폐쇄시킨 마을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유역과 동해안의 읍락 및 연해주 지역이다.
백두산 동쪽 산록에서 확인된 탄화목. 폭발당시 엄청난 화쇄류와 함께 휩쓸려 순식간에 매몰된 흔적이다. |소원주 박사 제공
■ 발해세자 대광현이 망명한 까닭은
고려로 투항하는 행렬도 만만치 않았다. 927년(고려 태조 10년)과 928년, 929년, 934년, 938년, 979년에 걸쳐 많게는 수만명씩 고려행을 택했다. <고려사> 등 역사서 기록을 종합하면 50년간 고려행을 택한 ‘발해유민’은 10만여명으로 집계된다.
고려로 투항하는 행렬도 만만치 않았다. 927년(고려 태조 10년)과 928년, 929년, 934년, 938년, 979년에 걸쳐 많게는 수만명씩 고려행을 택했다. <고려사> 등 역사서 기록을 종합하면 50년간 고려행을 택한 ‘발해유민’은 10만여명으로 집계된다.
그러니까 발해멸망 뒤 거란에 의한 강제이주자와 고려로 들어온 유민을 합하면 60만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전성기 발해의 인구는 10여만호, 군사는 정예병 수만명”이라 했다. 그렇다면 발해라는 나라와 백성이 사라진, 사상 유례없는 민족의 대이동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땅을 정복한 거란인도, 그 터전에서 살아가던 발해인들도 모두 떠나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 가운데 934년에 있었던 발해세자 대광현의 고려망명은 유독 눈에 띈다.
나카노타이 유적에서 확인된 백두산 화산재의 퇴적면. |소원주 박사 제공
“발해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투했다.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리고…. 특별히 원보(元甫)라는 관직을 내렸으며, 발해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고려사>) 이미 8년 전 망한 나라의 세자라? 발해세자 대광현은 대체 무엇 때문에 고향땅을 떠나 고려로 내려온 것일까.
■ 백두산, 무시무시한 대폭발
이젠 과학의 영역으로 가보자.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사이언스 북스, 2010)의 저자 소원주 박사가 제시한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의 재구성이다.
“10세기 어느 무렵 겨울날이었다. 백두산이 화산폭발의 순간을 맞이한다.
두터운 지각을 꿰뚫고 천지 칼데라 위로 엄청난 분연주(화산가스와 화산재의 불기둥)가 상공 25㎞까지 치솟는다.
중국 지린성 허룽시에서 발견된 왕릉급 발해고분.
성층권까지 올라간 불기둥은 중력을 이기지 못한채 무너진다. 불기둥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거대한 화쇄류가 시뻘건 혀를 낼름거리며 광란의 춤을 춘다. 그 화쇄류의 온도는 700~800도에 이른다. 시속 150㎞의 맹렬한 속도로 계곡과 산등성이를 질주한다. 식물과 동물 생태계는 한꺼번에 절멸하고 만다. 화쇄류는 100㎞ 이상 먼 곳까지 도달한다. 화쇄류는 발해5경에 속한 중경과 동경, 남경을 집어 삼켰을 것이다. 화산폭발로 한겨울 백두산 정상에 쌓인 눈이 녹는다. 이 눈은 칼데라 벽을 넘쳐 흐른 뜨거운 천지의 물과 합쳐져 거대한 해일로 변한다.
산사면을 돌진한 물줄기는 시멘트와 같은 ‘화산이류(泥流)’가 되어 삼림을 집어 삼킨다. 갑작스런 범람에 홍수에 강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마을들이 도미노처럼 사라진다. 거대 화쇄류의 상공에 머물던 화산재의 열운은 겨울철 강한 편서풍에 밀려 동쪽으로 확산된다. 화산재 구름은 초속 120m의 속도로 동해로 확산된다. 화산재는 3~4시간 뒤 일본 홋카이도와 아오모리 지방까지 널리 퍼진다.”
■ 폼페이 화산폭발의 50배
과학자들은 10세기 백두산의 ‘화산폭발지수(VEI·Volcanic explosivity index)’가 7급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백두산 화산이 뿜어낸 화산쇄설물(테프라·Tephra)의 용적은 83~117㎦(최대 150~170㎦)로 추정된다. 이것은 역사시대, 즉 지난 2000년 전 지구상에서 일어난 화산폭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지린성 허룽 발해고분에서 나온 금제관식
소원주 박사는 “백두산 테프라의 평균용적을 100㎦로 계산하면 10세기 백두산은 단 한 번의 분출로 남한 전체를 1m 높이로 퇴적시킬 수 있는 화산물을 쏟아냈을 것”이라고 밝혔다. 기원후 61년 폼페이를 최대두께 6m로 순식간에 매몰시킨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규모는 어떤가.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
베수비오 화산이 품어낸 화산재의 용량은 2㎦였다. 백두산 화산의 규모는 M 7.4, 100㎦였으니 베수비오 화산 50개가 터진 것과 같은 규모이다.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규모(체적 5㎦)도 백두산의 1/20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화산재는 새계를 일주했다. 지난 2010년 봄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 화산에서 분화된 화산분출물의 양은 0.1㎦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세계경제는 휘청거렸다.
■ 심상찮은 화산폭발의 징조들
자, 이제 수수께끼의 퍼즐을 맞춰보자.
1980년대 일본 도립대의 화산학자 마치다 히로시(町田洋) 교수는 흥미로운 가설 하나를 제기했다. 10세기 백두산 대폭발과 발해멸망의 연관성이었다. 역사학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926년을 전후해 백두산 분화에 대한 문헌기록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어떻게 믿겠냐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백두산에서 날라온 화산재의 퇴적층과 함께 화산폭발에 이은 화쇄류로 묻혀버린 탄화목에 대한 연대를 측정했다. 그 결과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의 연대는 934년 전후와 937년 전후, 그리고 946년 전후로 좁혀졌다.
소원주 박사는 “최근 탄화목의 현미경 분석결과 930년까지 연대가 나온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어찌됐든 연대측정결과로는 발해의 별망(926년)과 백두산 폭발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궁금증들이 남아있다.
몇가지 착안점은 있다. 백두산 화산재가 쌓인 일본 아오모리 현 오기와라 호의 퇴적물을 조사한 결과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됐다. 923~925년 사이의 퇴적층에서 매우 한랭한 지역에서 사는 규조류가 확인된 것이다. 이는 그 3년 동안 발해가 급격한 기후강하로 인한 매우 심각한 냉해를 겪었다는 증거이다. 거란과의 한판 승부를 앞둔 중차대한 시기가 아닌가. 또 멸망 전인 925년 가을부터 발해장군과 왕·귀족이 잇달아 고려로 내투하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 창졸간에 사라진 발해문명
또 하나 가설을 세워보자. 역시 소원주 박사의 가설이다.
백두산 탄화목 나이테의 중심연대는 933~934년 사이이다. 그렇다면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의 유민들 이끌고 고려로 내투했다는 934년은 어떤가. 926년, 즉 발해멸망연도는 <요사>에 나온 기록이다. 하지만 <요사>는 발해멸망 이후 400년이나 지난 1344년 원나라 시대에 편찬한 기록이다. 누락되거나 잘못된 기록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체르냐치노 유적 인근에서 확인되는 발해의 절터 흔적. 화산폭발의 흔적인 현무암을 재료로 절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인들은 백두산 화산활동과 함께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926년 이후, 백두산 주변에는 아직도 발해의 세력들이 발해국를 자처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다 대폭발이 일어나 마지막 남은 발해세자 대광현 세력까지 고려로 귀부한 것은 아닐까.그럴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대측정결과 백두산 대폭발과 발해멸망은 직접 연관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백두산 대폭발은 역사시대를 통틀어 인류가 경험한 것 중 최대규모의 화산폭발이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화산폭발을 앞두고 심상치않은 전조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혹 대폭발을 앞두고 수증기·마그마폭발과 같은 소규모 폭발이 일정기간 일어나지 않았을까. 마그마가 직접 분출되지는 않았겠지만 마그마가 천지의 물과 만나 수증기가 폭발하는?
이렇게 백두산이 대폭발을 앞두고 시차를 두고 몇 차례 소규모로 요동치자 이를 두려워 한 사람들이 대규모 엑소서드에 나선 것은 아닐까. 그것이 <고려사> 등에 나오는 내투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요사>가 말하는 민심의 이반, 즉 이심(離心)은 아니었을까.
거란이 발해를 멸한 뒤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일대와 연해주·동해안 읍락을 폐현(廢縣)시켰다”는 <요사>의 기록은 시사점이 많다. 이 지역들은 대홍수의 흔적이 발견된 곳들이다. 백두산 대폭발로 화산류(화산분출물+물)의 해일이 일어난 범람의 흔적인 것이다. 화산폭발로 몰살당한 비극적인 마을의 흔적인 것이다.
어떻든 이 10세기 백두산 대폭발로 발해의 흔적, 즉 문화와 역사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드넓은 발해의 고토는 사막이 됐고, 그곳에 여진사람들이 다시 금나라를 세울 때까지(1115년) 200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200년은 화산 사막이 풍화해서 토양이 되고 표토에 식물이 뿌리를 내려 번성하는 최소한의 기간이다.
■ 백두산, 재폭발 초읽기?
최근 다시 백두산 폭발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예컨대 다니구치 히로마쓰(谷口宏充) 도호쿠(東北)대학 명예교수(화산학)는 20년 이내에 백두산 화산폭발이 일어날 확률이 99%에 이른다고 예측했다. 지난해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플레이트 운동 영향 때문이라고 부연설명했다.
확률은 좀 다르지만 국내외 학자들도 백두산의 재폭발에 관심을 쏟고 있다. 윤성효 교수는 2002년부터 백두산에서 화산폭발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이른바 전조현상들이 빈번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화산성 지진활동이 빈발하고 지진규모도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표면의 팽창이 10㎝ 이상 감지되고, 화산가스에서 펠륨의 농도가 증가하고 있다. 또 화산가스 방출로 삼림이 말라죽고, 산사태와 암석균열이 일어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교수는 천지에 20억t의 물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물이 1000도 이상의 마그마와 만날 때 폭발적인 수증기·마그마 분화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0세기 백두산 분화와 비슷한 폭발이 일어난다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북한과 중국이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다. 인명피해는 물론 도로와 댐, 전기, 광산 등이 마비될 것이다. 또 생태계 변란과 토양침식, 식수오염, 냉해 등이 악순환이 초래될 것이다.
남한은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수방관 할 수 없다. 남한도 피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화산재 때문에 항공기가 결항돼 25억 달러 이상의 피해가 예상된다. 아니 돈이 문제는 아니다. 순망치한이라는 고사가 있지 않은가. 백두산 폭발의 여파는 또 한 번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위협할 것이다. 1000년 전 발해 백성들이 속절없이 당했듯…. 그래서 앞다퉈 남으로 남으로 엑소더스 대열에 나섰듯….
◇ 참고자료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 소원주, 사이언스 북스, 2010
<백두산 화산폭발 가능성 및 대응방안>, 윤성효, ‘백두산 화산폭발 가능성에 대한 과학적 검토 및 대응방안 토론회,’ 국회환경포럼, 2011
<백두산에 묻힌 발해를 찾아서>, 진재운, 산지니, 2008
<발해유민사 연구>, 이효형, 혜안, 2007
<발해정치사연구>, 송기호, 일조각, 1995
발해 멸망 관련글 https://tadream.tistory.com/1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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