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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중 "
3.1 멸망 원인"만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백두산 분화설은 일본인이 제기했고 역시 일본인에 의해 폐기되었습니다. 

발해 멸망 원인
3.1 멸망 원인

3.1.1 백두산 분화설

이 설은 일본에서 화산학자들이 일본의 지층을 조사하다가 백두산의 화산재를 발견하면서 이에 대해 연구하면서 제기된 학설이다. 한때 학계에서는 몰라도 고대사에 관심 있는 일반인 수준에서는 꽤나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가설이다. 발해의 멸망 시기와 백두산의 대폭발 시기가 맞물린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힘을 얻기 시작했다. 실제로 발해의 5경이 모두 백두산에 인접해 있어 백두산 폭발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과 당시의 백두산 대폭발은 비공식적으로 역사시대 이래 최대의 화산폭발로 추정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14] 실제로 백두산 서부에서 대규모의 화산쇄설류가 이동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의 땅을 통치하지 않고 폐현시킨 것도 파괴의 정도가 심각하여 땅을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아서 이 학설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해 사실상 기각되었다. 가장 큰 반론은 동아시아 3국 어디의 사서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거란의 역사서인 <요서>는 정복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이기 때문에 은폐했을 확률이 높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정도 규모의 화산폭발이 발해 이민을 받아 준 고려의 역사서인 고려사에 전혀 기록이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 전에 일어났더라도 실제로는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연구에 의하면 백두산 대폭발은 겨울에 발생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겨울에는 북동풍이 불기 때문에 화산재 대부분이 동해와 일본으로 날아갔고 상경용천부 또한 백두산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를 입기에는 거리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최근 백두산의 화산재와 기록이 존재하는 일본 고대 화산의 화산재와 시간대 비교를 통한 연구에 의하면 발해 멸망이 926년 1월에 발생했는데 백두산 분화는 969년(±20년)에 일어났다고 추정되어 이 학설은 더욱 힘을 잃었다. 이로 인해 화산호(천지)가 형성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어쨌거나 발해 멸망 후 백두산 근방의 발해 잔여 세력들이 부흥운동을 열심히 펼쳤다는 점에서도 발해 지배층의 장악력이 결정적으로 와해된 것이 아님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몇 차례의 부흥운동이 모두 실패하면서 그 뒤로 동만주에서 새 나라가 일어나기까지는 200여 년의 시간이 걸린 것도 화산 폭발과 관련 있지 않나 하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도 강제 이주에 의한 것이든 자연 재해을 피한 것이든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다.

3.1.2 지배층의 내분설

발해 왕들의 기록이 안습하기 때문에 추정에 그칠 따름이지만 왕가를 포함한 귀족층의 내분도 멸망 원인으로 충분히 생각해볼 만하다. 발해 이전에 거의 나라가 망한다기보다는 세계 멸망을 맞이한 듯한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나라 공격 한참 전부터 고위층을 비롯한 망명 행렬이 이어지고 있음이 나타나는데, 이를 요동 전역이 장기간 유지된 후유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3.1.3 거란 급습설

이 역시 가장 유력한 설, 제1 방어선으로서 발해의 전력이 집중된 요동 전선을 우회하고 발해 중심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부여부를 급습, 함락시킨 다음 발해의 정규군이 전력을 정비하기 전에 상경용천부로 진격하는 속전속결 방식으로 그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 개전부터 대인선의 항복까지 소요된 기간을 감안해 보면 제일 그럴 듯한 이론이다.

고대의 동아시아의 전쟁은 '국경에서 수도까지 직선 전진' 형태로 자주 벌어졌기 때문에 방어 측의 병력 집결이 늦으면 그대로 끝나는 일이 왕왕 있었다. 단적으로 고구려나 백제 멸망 때의 나당 연합군도 수도인 사비, 평양으로 어택땅 하는 경향을 보인다. 거란은 이 전술을 고려와의 전쟁 때도 써먹는다. 단 이러한 전략은 중앙 정부에게 이른 시간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대신 대다수 귀족층이나 지방 세력이 그대로 남아 점령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복국 운동 또한 자주 벌어지게 되는 문제점이 있는데, 실제로 발해의 유민들은 멸망 후 200년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 동안 이른바 부흥운동을 펼쳐 나갔다.

3.1.4 말갈과의 대립설

발해가 고구려 유민+말갈+기타 민족들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나온 설.발해 말기 이들이 들고 일어나 안그래도 혼란한 발해 내부의 혼란을 가중시켜 최종적으로 발해 멸망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설이다. 말갈이 끝끝내 발해에 융합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설. 다만 이 말갈을 국가내의 하부층으로 인식해서 내부 분열로 보느냐, 아니면 사실상 소화불량에 걸려서 자력으로 이탈한 흑수말갈로 이해해서 배후의 위협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국가 구성 자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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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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