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8.htm
"발해유민의 재건운동 : 후발해와 대발해 (渤海遺民의 再建運動 : 後渤海와 大渤海)"글에서 "Ⅳ. 晩期 再建運動(만기 재건운동) - 3. 高永昌의 大渤海(고영창의 대발해)" 부분을 가져오고 한글로 좀 바꿨습니다.

고영창(高永昌)의 대발해(大渤海)

고욕의 반요운동은 타족중에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였던 것 같다. 고욕의 반요운동이 종식된 후 불과 1년만에 동경의 고영창이 일어나 국호를 大元(대발해황제)이라 하고, 융기라 건원하였다. 고영창은 발해세족으로 발해가 망하자 요양에 천사되었다가 거란에 벼슬하여 공봉관이 되었었다. 천경 5년에는 발해무용마군 2,000인을 모아 백초곡에 둔을 치고 완안군(여진)을 방어하고 있었다. 원래 사건의 발단은 동경유수 소보선의 학정에 있었다. 또 한편에는 발해인의 소질이 한려하여 범법자는 용서받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이런 정황하에 1116년(천경/天慶 6년) 정월 초하룻날 밤 고영창이 동경(東京)의 악소년 10여인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술김에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유수부의 담을 넘어 들어갔다. 아문에 들어가 "막 군변이 일어났으니 계비를 하십시오,"라고 하자 숙소에 있던 유수 소보선이 나타나자 그 자리에서 자살하였다.

동경호부사 대공정이 변란이 일어났음을 듣고 유수사를 권행하여 부유수 고청신과 함께 제영의 해한병 1,000여인을 모아서 난을 진압하는 한편 수모자 수십인을 수색하여 살륙하니 창졸간에 인심이 흉흉하여져 진압할 수 없어졌다.

영창은 곧 발해군마를 거느리고 동경성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고영창이 기병한지 3일이 되던 날 대공정이 문루에 올라 영창이 돌아올 것을 설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때의 요금의 전황으로 보아 만약인 경우 영창이 금으로 투항한다 하여도 신명은 보전할 수 있었던 상황이므로 요의 태도가 어떻든 그리 걱정할 형편은 아니었다. 기병 5일이 되던 날 밤 동경성내에서 횃불이 오르는 것을 신호로 성문은 열리고 영창의 기병은 쉽게 입성할 수 있었고 대공정과 고청신을 쉽게 몰아낼 수 있었다. 대공정은 거전하였으나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마하 잔병 100여명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도주하였다.

이렇게 하여 간단히 동경성을 탈취할 수 있었고 곧 칭제건원하였다. 고영창의 군세가 알려지자 불과 10일 사이에 요동 50여주가 귀부하여 왔다. 그러나 고영창이 군사를 보내어 순략하는 중 살략을 많이 하였으므로 각주군에 살고 있던 해인호가 가족을 거느리고 요수를 건너 피해 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 때문에 조금씩 인심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위세가 날로 더해가자 그 다음날인 윤정월에는 거란귀덕주수장 야율여도가 광주를 들고 귀부해 왔다.

사태가 점점 더 엄중하게 발전되어 가자 요정에서는 재상 장림(張琳)과 소한가노(蕭韓家奴)에게 명하여 요의 실업자중 강장한 자를 뽑아서 충군케 하였다. 그리하여 20,000여명의 군사를 얻었다. 그해 5월 초순 현주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고영창이 요하삼우이수구에 설책하고 거전하였다. 장림은 영병수천으로 의병을 삼고 정기를 간도로 도하시켜 심주로 들어가게 하였다. 나중에야 영창은 이것을 알고 군사를 보내어 10일 사이에 30여회를 싸웠으나 결국 고영창이 패하여 동경성으로 물러났다. 임(琳)은 군마를 몰아 동경성외 5이지점인 태자하에 성채를 쌓고 사람을 시켜 영창을 초무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장림이 각부에 5일치 양식을 준비하고 파성지계를 결행하려 하였다. 그로부터 2일후 먼저 안덕주의를 도하시키고 잇달아 대군이 일제히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대군이 반쯤 건넜을 때 철기 500으로 갑자기 나타나 출기불의에 하로를 막으니 임군이 퇴하여 다시 구채로 물러났다. 3일이 되던 날 임군은 도강할 수도 없고 양식은 떨어져가고 하여 전전긍긍하다가 7일이 되는날 밤 몰래 태자하의 성채를 나와 심주로 돌아갔다. 늦게 안 영창이 기병으로 후미를 추격하여 많이 죽이고 사로 잡았다. 임은 겨우 잔병을 수습하여 심주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대요전에는 선전하였으나 대금전에는 불리하였다. 먼저 요와 대상상태에 있는 동안 달불야를 금에 보내어 "원병력이취요"라고 제의하였다. 金은 호사보, 호돌고 등을 보내어 영창에게.

同力取遼固可, 惟應去帝號如能歸款, 當以王爵處之.

라고 하였다. 영창이 또 달불야를 호사보, 호돌고와 같이 가서 교섭케 하였으나 금주는 표사가 불손하고 또 발해인 부로를 청환하였다고 대약사노를 달불야와 같이 보내 고영창을 초유케 하였다. 이때 심주의 장림군이 다시 공격을 하였으나 궤주하기 바빴다. 그리하여 임군은 요주에 퇴보하였고, 영창은 금군이 심주에 입성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가노 탁자에게 금인 1개와 은패 50개를 주어 금군진영에 들어가 명호를 제거하고 칭번할 것을 청하였다. 때마침 발해인 고정이 항복해 와서 하는 말이, "영창비진항특적이완사"라고 하므로 알로가 드디어 진병공토하니 영창은 금사 호사보를 죽이고 항거하였다. 금병이 동경성에 이르자 영창이 수산하에서 거전하였으나 패하고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장송도로 도분하였다. 이때 人心은 세태를 쫓게 마련이어서 동경인 은승노선가 등이 영창의 처자를 잡고 성문을 열어 금에 항복하였다. 미구에 달불야가 변심하여 영창과 탁자를 붙잡아 금군에 보냈다. 그리하여 영창은 금군전에 살해되고 말았다.

이 고영창의 칭제건원은 발해인들이 요금의 전쟁을 기회로 다시 부흥해 보려던 마지막 운동으로 그 성격은 대연림의 흥요국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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