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10131808361&code=900306&med=khan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35) 초원으로 뻗은 발해의 초피로(貂皮路)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10-13 18:08:36ㅣ수정 : 2009-10-13 18:08:36

서역제국과 문물 소통했던 해동성국의 위대한 교역로


스체클라누하 발해 성터

발해와 연해주, 연해주와 발해, 장엄한 역사의 만남이고 냉엄한 현실의 경합(競合)이다. 연해주가 발해의 치하에 들어옴으로써 그 땅에 첫 국가가 태어났으며, 우리 역사에서 영역이 가장 넓은 해동성국(海東盛國)이 우뚝 섰으니 그 만남은 장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연해주 땅에 일떠선 발해의 불 보듯 빤한 정체성을 놓고 오늘날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우리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으니 냉엄하지 않을 수 없다. 


‘담비의 길’(초피로)이 표시된 발해의 교통로 약도(‘발해를 찾아서’, 전쟁기념관, 1998, 53쪽 참고).
 
이 ‘만남’과 ‘경합’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한 현장 답사는 그래서 애초부터 녹록지 않다. 첫 난관은 발해에 대한 우리의 무지이다.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가장 컸던 나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적게 알고 있는 나라가 바로 발해다. 발해가 동시대의 통일신라에 비해 수명은 30년쯤 짧지만, 그 크기는 4~5배에 달하는데도 발해에 관한 한 우리의 지식은 통일신라의 그것에 비해 40~50분의 1도 채 안되니 말이다. 일찍이 실학자 박제가(朴齊家)는 “우리나라 선비들이 신라 9주 안에서 태어나 그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틀어막아버리니…, 어찌 발해의 역사를 알 수 있겠는가” 하고 개탄한 바 있다. 발해에 대한 이러한 무지와 더불어 편단과 무시는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발해사의 수난을 자초하고야 말았다.<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주의 편견에 젖어 발해를 아예 무시해버렸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우리의 또 하나의 민족국가인 북방의 발해까지 아우르는 완전 통일로 이어지지 못함으로써 남북국가 분립시대를 연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일통삼한(一統三韓)’의 내재적 한계성이며, 우리 겨레가 두고두고 반추해야 할 뼈저린 역사적 교훈이다. 그것이 아니었던들, 발해는 우리 역사의 주류에서 밀려나지 않았을 것이며, 발해의 기나긴 수난에 허무한 빌미도 제공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동안 일부 올곧은 사학자들에 의해 비뚤어진 역사의 흐름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역풍이 일곤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관변사학자들이 주장한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올가미에 걸려 발해사는 고구려사와 더불어 만주사의 일부로 변조되었다. 이 시점에서도 발해사를 ‘요동사’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는 등의 수난 여파는 종시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고려인들이 살았던 고르바트카 발해 성터 안의 마을

게다가 작금 주변국들의 움직임도 심상하지 않다. 중국은 이른바 ‘동북공정’을 내세워 발해 유적지에 철의 장막을 쳐놓고 발해가 당나라 변방의 소수민족인 말갈(靺鞨)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강변한다. 러시아는 당나라와는 무관하게 말갈족이 세운 극동의 첫 독립국가라고 하면서 은근히 영유욕(領有慾)을 내비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학계는 독립국가이기는 하나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족이라는 이중구조설을 퍼뜨린다. 강역을 놓고도 우리는 연해주는 물론 아무르 강 중류까지로 주장하나, 러시아 측은 연해주의 한카 호(興凱湖) 북쪽을 조금 넘는 선으로 본다. 이렇게 우리의 정통국 발해는 오늘날까지도 그 수난의 역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니 이 치욕의 역사를 더 이상 연장시킬 수는 없다. 이젠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귀감을 얻어 발해사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오롯하게 밝혀냄으로서 왜곡과 변조를 막아야 한다.
 

고르바트카 발해 성터.

매우 벅찬 과제이고 사명이다. 비전공자로서 도전장을 내민다는 것은 언필칭 무리이겠지만, 문제의식쯤은 가져야 한다는 판단에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수난사의 현장인 발해유적지 몇 군데와 출토품을 전시한 박물관을 찾았다. 유적지 현장을 찾기에 앞서 우선 예비 지식을 얻기 위해 극동대학 박물관과 러시아 아카데미 극동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 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에는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증언하는 생생한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한 유물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현장 답사로 택한 첫 곳은 팔치산스크에 있는 니콜라예브카 성터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지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잔뜩 찌푸린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린다. 오전 8시에 출발해 한참 달리니 왼편으로 울창한 수림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숲속에는 여러 가지 독충이 서식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독한 것은 ‘클레시’란 진드기다. 노란색, 흰색 같은 보호색으로 칠한 이 독충은 크기가 이()만큼 밖에 안되지만 돌로 쳐야 깨질 정도로 단단하며, 일단 살에 붙으면 힘으로는 뗄 수가 없어 전문병원에 가야 한다. 독성이 강해 정신이상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 독충은 1920년대 일본군이 이곳을 강점했을 때 살포한 것이라고 한다. 악명높은 일제의 살인 만행은 여기서도 저질러졌다. 


발해의 토기 항아리와 숫막새기와(극동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 박물관 소장).

9시가 조금 넘어 니콜라예브카로 가는 길목에 있는 스체클라누하 성터에 도착했다. 표고 200m쯤 되는 둥근 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성터는 조그마하지만 아담하다. 높이 3m, 너비 2m가량의 흙벽으로 둘러싸인 유지는 둘레가 약 500m로 보인다. 성벽은 잡초로 묻혀 있고, 바닥은 감자밭이다. 여기서 차로 한 시간 달려 드디어 목적지 니콜라예브카 성터에 도착했다. 성은 남· 북·동쪽 세 방향이 나지막한 산으로 에워싸인 평지성이다. 개활 지대에 자리한 서문으로 들어가니 무릎까지 자란 잡초가 아침 내내 내린 비로 물방울을 머금은 채 일렁이고 있다. 흠뻑 젖은 바짓가랑이를 끌며 성벽을 타고 옛 성터의 전모를 두루 살펴봤다. 남아 있는 토성의 높이는 5m, 너비는 2~3m나 되며 둘레는 3㎞가 족히 된다. 약 300m 간격으로 고구려성이나 발해성만이 가지고 있는 치가 튀어나오고 바깥에는 지금도 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해자(垓字)가 파져 있다. 해자 너머에는 수백 호의 농가가 널려 있다. 성터는 네모꼴 형태인데 동북 편에 기찻길이 나 있어 성터가 두 조각으로 나눠진 것처럼 보인다. 몇 군데에 밭뙈기가 띄엄띄엄 널려있을 뿐, 양떼와 소떼가 거니는 황무지다. 여기서는 움집터와 각종 점토 유물, 동물과 물고기뼈, 조개껍데기, 쇠붙이 등 철기시대 유물과 함께 질그릇과 절구통 등 발해시대 유물도 출토되었다. 이것은 이 두 시대 문화층의 공존을 입증한다. 성터는 77년에 처음 발견되었으며, 8~10세기에 축성한 것으로 예측한다. 이 성의 기능에 관해서는 유물로 미루어 이 지역의 행정중심지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노보고르데예브카 발해성 남성 전경.

성터 북쪽에는 일리스타야 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을 따라 차로 20여분 거리에 니콜라예브카 성과 쌍벽을 이루는 고르바트카 발해 성터가 있다. 불규칙한 5각형 모양새의 이 성터의 성벽 길이는 1200여m에 달하는데, 지금도 성 안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9~10세기에 축성된 이 성터에서도 토기를 비롯한 발해 유물이 적잖게 나왔다. 원래 이 마을에는 한말에 이주해 온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아마 1937년 중앙아시아로 실려 가던 날이었을 것이다. 땅바닥을 살짝 파기만 해도 고려인들의 유물이 나온다고 한다. 이를 테면 발해인을 이은 고려인 문화층인 셈이다. 이렇게 우리네 조상들은 이 땅에서 켜켜이 문화층을 이루면서 대를 이어 살아왔던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동문 밖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24개의 돌 유물이다. 대체로 세 줄로 놓여 있는 이 돌 유물은 발해 고유의 것이어서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것은 모두 13곳인데, 그 가운데 10곳은 옛 발해 땅이던 오늘의 옌볜 지방과 나머지 3개는 북한의 함경북도에 있다. 이곳 연해주 땅에서 발견된 이러한 돌 유물은 발해의 정체성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 유물의 용도에 관해서는 묘당이나 관아, 노제를 지낸 임시제단, 왕실의 기념 건물, 관변창고, 높은 기단의 창고, 종교 숭배물, 역참(驛站), 주택 등 일반 건물에 쓰인 자재라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 아직 정설은 없다. 아무튼 고르바트카 성터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발해의 정체성을 증언하고 있어 주목된다. 일리스타야 강줄기를 따라 한카 호를 거쳐 우수리 강에 이르기까지의 옌볜에는 여러 기의 발해 성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 성터는 우수리 강에서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발해의 국제 5도(道)의 하나인 ‘일본도(日本道)’를 지켜준 보루였을 것이다.블라디보스토크 체류의 마지막 날에는 이곳에서 북방 280㎞나 떨어져 있는 노브고르데예프카 성터를 찾았다. 목적은 발해의 북방 한계를 현장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발해의 초원로에 관한 유물적 단서를 포착하기 위함이다. 그 단서가 바로 이 고성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소그드 은화이다. 떠나기에 앞서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의 니키틴 박사의 소개를 받아 극동대학 박물관장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박사를 방문했다. 원래 이 연구소에 근무하던 샤프쿠노프 박사가 보관하고 있던 이 은화를 그가 서거하면서 극동대학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40대초의 관장은 그런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실물을 확인하자면 며칠이 걸리기 때문에 당장은 보여줄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한다. 실망이 컸지만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박물관을 떠나 곧바로 은화의 발견 현장인 노브고르데예프카로 향했다.

시내를 벗어나자 무연한 초원과 밀밭이 눈 모자라게 펼쳐진다. 잘 포장된 2차 도로를 차는 쏜살같이 달린다. 놀라운 것은 가지각색의 깔끔한 디자인을 한 길 표시물이다. ‘도로표시물전시회’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성싶어 수십 가지의 표시물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았다. 3시간반쯤 달려 성터 어귀에 도착해서 잠깐 쉬는 참에 유모차를 끌고 가는 한 아주머니에게 성터에 관해 물었다. 그는 손으로 앞산을 가리키며 이런 전설을 신나게 전한다. 먼 옛날 발해인들이 저 산 밑 어딘가에 금덩어리를 파묻어 놓았다고 해서 지금껏 사람들이 찾아봤으나 찾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어귀에서 한참 달려 평지에 묘처럼 우뚝 솟은 산 하나를 끼고 왼쪽으로 도니, 드디어 아르센예브카 강을 사이에 둔 두 성터, 즉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이 나타난다. 깊고 물살이 센 강은 두 성의 자연 해자 역할을 했다. 남성은 뾰족 산이고 북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춘 꽤 큰 규모의 성터다. 내성에 올라가 보니 허물어진 성벽 잔해가 이곳저곳에 널려 있다. 요로에 자리한 이 성터는 60년대부터 20여년간 발굴작업을 진행했는데, 온돌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발해 유물이 나왔다. 우리가 주목한 소그드 은화는 이 성터 바깥의 한 취락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샤프쿠노프 박사의 생전 증언에 의하면 이 은화는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드(소그드)에서 8세기쯤에 주조된 것으로서 교역 수단으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 초피(貂皮·담비의 가죽)가 당시 발해의 특산물로서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은화를 주고 구입해 갔을 것이다. 이러한 추단과 더불어 중간지점 격인 치타에서 등자( 子) 같은 고구려 유물과 동·서 문물이 동시에 발견된 점 등을 감안해 샤프쿠노프 박사는 사마르칸드~치타~발해 상경~연해주로 이어지는 이른바 제2 동아시아교역로, 즉 ‘초피로(貂皮路·담비의 길)’의 가설을 제시했다. 니키틴 박사도 발해 멸망 후 800호 4000명의 발해인이 몽골제국의 초기 수도 카라코룸 지역으로 이주한 사실을 예로 들면서 발해와 몽골 간의 교류와 그 통로인 초원로를 지적했다. 그렇다면 그 길은 발해 상경에서 서쪽으로 부여를 지나 대흥안령을 넘어 동몽골 초원로로 이어지는 발해 국제 5도의 하나인 거란도(契丹道)였을 것이다. 그 길은 바로 샤프쿠노프 박사가 명명한 ‘초피로’다. 이 길을 따라 발해는 초원로 상의 서역 제국과 활발한 교역을 진행했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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