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ZtXy8O
[역사현장 탐사] 洛陽에 묻힌 고구려·백제 遺民들
뤄양시(洛陽市) 동쪽 회맹진 뇌하촌 일대가 고구려·백제 유민(遺民)들의 집단 묘역(墓域)인 듯
연개소문의 아들·손자·고손자, 부여융, 흑치상지 부자 등의 묘지석(墓誌石) 발견
申瀅植 상명大 초빙교수
백제 의자왕의 묘를 찾아서
<연개소문 자손 무덤.>
난해 여름 필자는 趙富英(조부영·백제문화개발연구원 원장)·尹亨燮(윤형섭·前 교육부 장관)·金起燮(김기섭·역사박물관장)·徐程錫(서정석·공주大 교수)·朴大在(박대재·국사편찬위원회)씨 등과 함께 洛陽市 회맹진 뇌하촌 일대를 찾았다. 10년 전 충남大 박물관 조사팀이 의자왕의 묘지로 생각했던 청선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옛날 역대 帝王들이 묻혔던 명당 북망산 일대는 중국 홍위병의 亂과 개혁·개방 이후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어 옛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東西로 뻗어나간 고속도로를 남쪽에 두고 북망산(본래 이름은 邙山)은 무참히 찢기고 있었다. 농지로 바뀐 들판에는 무성한 잡초가 우거졌고, 여기저기 세워진 전자·식품공장은 변화된 중국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옛 무덤들이나, 석양을 받으며 기계 같은 몸짓으로 무술수련을 하는 소림사의 어린 스님들이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이 千年古都(천년고도) 洛陽임을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우리는 백제 의자왕의 묘소를 찾지 못한 채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05년 10월 「중국 洛陽(낙양·뤄양)에서 淵蓋蘇文(연개소문)과 그의 直系 후손들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지난 여름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한 「東北史地(동북사지)」에 『연개소문과 그 직계 후손들의 무덤이 洛陽에서 발견됐다』는 내용의 논문이 실렸다는 것이다.
이들의 무덤이 발견됐다고 알려진 洛陽은 「洛陽의 紙價(지가)를 올린다」거나, 「낙양성 십리허에…」로 시작되는 옛 노래, 사람이 죽었을 때 「북망산 간다」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우리에게는 상당히 귀에 익은 이름이다.
洛陽은 黃河(황하) 중류의 북위 35도 선상의 古都로 우리나라의 광주·부산, 일본의 교토(京都)·오사카(大阪)와 같은 위도上에 있다.
洛陽은 洛水(낙수: 黃河의 支流)를 남쪽의 垓字(해자)로 하고, 북쪽의 邙山(망산)을 방어벽으로 한 천혜의 요지다. 西安(서안·시안) 다음으로 여러 왕조의 수도였던 중국문명의 요람지였다.
洛陽은 BC 21세기경 夏왕조가 도읍을 정한 이후 商·西周·東周·後漢·曹魏·西晉·北魏·隋·唐·後粱·後唐·後晉까지 13개 왕조 1300여 년간 正都(정도) 혹은 副都(부도)로 중국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살아서는 蘇州·杭州, 죽어서는 北邙』
연개소문.
洛陽은 中原의 首府로서 방어에 유리하고, 빼어난 풍치, 교통의 요충지로서 산세가 좋기 때문에 역대 제왕의 묘장지가 되었다. 여기서 「살아서는 蘇州(소주)·杭州(항주)요, 죽어서는 北邙(북망)」이라는 속담이 나왔다.
흔히 사람이 죽는 것을 「북망산 간다」고 하는데, 北邙山은 洛陽 북쪽에 있는 邙山을 가리킨다.
唐나라의 수도 혹은 副都였던 洛陽에서는 고구려나 백제 遺民(유민)들의 무덤이나 墓誌(묘지)도 다수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이곳에 묻혀 있었음이 墓誌銘(묘지명)을 통해 확인된 인물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 隆(융), 고구려 연개소문의 장남인 泉男生(천남생: 중국 史書에서는 唐高祖 李淵의 이름자를 피해 「泉」으로 표기), 남생의 아들 獻誠(헌성), 헌성의 손자 泉毖(천비), 남생의 동생 男産(남산), 黑齒常之(흑치상지)- 黑齒俊(흑치준) 父子 등을 비롯해 보장왕의 손자 高震(고진), 고구려 귀족 高慈(고자) 등이다.
隆(615~682)은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父王과 함께 唐으로 끌려갔다. 이때 唐으로 끌려간 백제인들은 고위층 인사 88명 등 1만2000명이었다. 이후 그는 唐의 벼슬을 받고 귀국해 백제부흥운동軍을 이끌던 동생 豊(풍)과 대결했다.
663년 倭(왜)의 지원을 받는 부흥軍이 패퇴한 후, 항복한 흑치상지와 함께 入唐했다. 665년에 唐의 웅진도독·백제국왕으로 다시 입국해 文武王과 會盟(회맹)을 가졌다. 신라가 백제 古土에 所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해 백제 古土의 지배권이 신라에게 돌아가자 唐으로 돌아가 명목상의 백제도독으로 生을 마감했다.
연개소문 후손들의 墓誌石
부여융 묘지석.
현재 하남성 박물원에 보존된 「부여융 墓誌」는 「천남생 墓誌」와 나란히 양지바른 복도에 남아 있다. 가로·세로 58cm의 검은색 돌에 새긴 669字(26行×27字)의 내용은 그의 家系(가계)와 관직, 성품·생애·업적, 그리고 그의 일생을 칭송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墓誌는 그를 「河伯의 자손」이라고 칭하면서, 「어질고 후덕함이 풍속을 이루어 중국 역사에서도 빛을 발했고, 충성과 효성으로 이름을 날려 밝게 빛이 났다. 신중함으로 몸을 닦았고, 선한 것을 택해서 행했으며, 의로운 것이 있으면 능히 이를 본받았다」고 찬양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장남 泉男生(634~679)의 墓誌도 확인됐다. 그는 665년(보장왕 24)에 연개소문 死後 大莫離支(대막리지)가 되었다가 동생들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나자 唐나라에 붙어 고구려 정벌에 협력했다.
679년(의봉 4)에 만들어진 泉男生의 묘지석은 북망산에서 출토되었다. 묘지석은 90cm(가로·세로)로 2162字(46行×47字)의 내용은 관작·생애·가문의 성격·그의 官曆(관력)·투항동기(고구려 내분)·고구려의 멸망 과정 및 장례 등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묘지석은 그가 唐軍의 고구려 침략에 협력한 부분에 대해 「바람처럼 달리며 번개같이 내쳐 평양성을 공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인 男産, 泉男生의 아들 천헌성, 천헌성의 손자인 천비의 묘지명도 발견되었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천비의 묘지석은 그의 아버지 泉隱(천은)이 지은 것이다. 625字(25行×25字)의 정서체로 쓰인 이 묘지석에는 자식을 잃은 아비의 비통함이 잘 나타나 있다.
<하늘의 푸르고 푸르름이여 그 색깔 바르구나./인간의 무한함과 능력의 무궁함을 누가 알리요./움직이는 생명체여 태어나면 늙는 법이고,/병들면 죽는다는 것은 운명의 장난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요./이제 끝이 났구나. 육체는 허공으로 돌아가니/타고난 운명 누가 알리요>
흑치상지 父子의 墓誌石
흑치상지의 묘지석은 1929년 邙山에서 아들 흑치준의 것과 함께 발견됐다. 현재 남경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 묘지는 가로 71cm, 세로 72cm의 크기로 1604字(41行×41字)의 楷書(해서·구양순체)로 되어 있다.
백제의 遺將(유장) 흑치상지는 任存城(임존성: 현재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을 중심으로 백제부흥軍을 이끌다가 唐軍에 투항했다. 入唐한 후 突闕(돌궐) 정벌에 큰 功을 세웠으나, 趙懷節(조회절)의 모함으로 처형되었다.
흑치상지의 묘지석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고상하고 기질과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으니 가벼이 여기는 것은 욕심과 욕망이었고, 중하게 여기는 것은 명예와 배움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 묘지석에는 「(흑치상지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국에 봉해졌다」는 記述이 있어 눈길을 끈다.
흑치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해안 지역(백제 서부,「唐書」)이라는 주장에서부터 필리핀 일대, 통킹灣(베트남, 북동부해안) 연안으로부터 종국의 廣西 서남방 지역(해남도 포함)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蘇鎭轍(소진철) 원광大 교수는 중국 廣西壯族自治區(광서장족자치구)의 百濟鄕(백제향)을 흑치국이라고 보면서, 이를 백제의 侯國(후국) 또는 附庸國(부용국)으로 해석한다. 학계에서는 흑치국의 존재를 거점지역에 왕족을 파견해 통치하게 하는 擔魯制(담로제)와 연결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흑치상지의 아들 흑치준의 묘지명에는 그가 살고 있던 곳(洛陽縣 徒善坊)이 명기되어 있으며, 「반드시 지정된 장소에 매장하는 것이 禮(예)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唐으로 들어간 고구려나 백제의 왕족·귀족들이 특정한 묘역에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會盟津 雷河村 일대가 고구려·백제 遺民 묘역으로 추정
지금까지 발견된 묘지명에서 밝혀진 고구려·백제人들의 매장처를 정리하면 표와 같다.
표에서 알 수 있듯이 唐으로 끌려간 고구려·백제 귀족들은 洛陽의 일정한 장소에 거주했고, 또 죽으면 지정된 장소에 묻혔던 것이다. 오래 전에 충남大(박물관)의 현지조사를 토대로 볼 때 洛陽市 동쪽지역인 會盟津(회맹진) 雷河村(뇌하촌) 일대가 고구려·백제人 묘역일 가능성이 크다.
대개의 묘지명에 濱海之東(빈해지동), 海東(해동) 등의 표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洛陽市의 동쪽인 회맹진과 언사市 일대가 이들 고구려·백제人에게는 적절한 지역이 될 것이다. 의자왕이 묻힌 곳도 이 일대라고 추정된다.
申瀅植 상명大 초빙교수
1939년 충북 충주 출생. 서울大 사범대 역사학과 졸업. 단국大 문학박사. 성신女大 부교수, 이화女大 교수, 국사편찬위원, 한국고대사학회장, 백산학회장 역임. 저서 「신라사」, 「백제사」, 「고구려사」, 「신라통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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