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NyvB6f


전략적 요충지… 내부 배신으로 16성 각개 함락
<105> 신성 함락
2014. 05. 07  15:35 입력

667년 정월, 남생 제보로 정보 다량 보유
9월14일 唐 공격에 부구 등이 반란 일으켜


신성으로 알려진 요령성 무순(無順)의 고이산성(高爾山城). 중앙에 요나라 때 세워진 탑이 보인다. 필자제공


이적, 신성의 중요성 강조

신성은 요서에서 요동으로 가는 세 갈래 길 가운데 북쪽의 동쪽 입구에 위치해 있다. 고구려는 과거부터 이곳을 거점으로 광활한 초원지대와 요서로 군대를 발진시켰다. 북으로는 부여성에 이르고 동북으로는 옛 부여, 지금의 길림시 지역으로 통한다. 남쪽으로는 요동성으로 연결되고, 동으로는 소자하 유역을 거쳐 국내성으로 나가는 교통의 길목에 위치한다.

이적은 신성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부하들에게 거듭 강조했다. ‘책부원구’ 장수부는 이렇게 전한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경계를 지키는 성 가운데 최고의 요충지이다. 이 성을 먼저 도모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성은 함락시킬 수 없다.” 645년 4월 5일 그는 신성을 공략한 바 있다. 열흘 동안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덩치가 큰 신성은 요지부동이었다. 전력을 모두 투입한다 해도 이른 시일 안에 함락될 성이 아니었다. 
 
신성 함락 실패의 대가

이적의 모든 신경은 당태종이 요택을 도하하는 타이밍에 가 있었다. 645년 5월 3일 당태종은 요택(요양시 서쪽)에 도착, 5일 소택지 동쪽을 건너고 며칠 후 마지막 고구려쪽 요하 본류를 도하할 예정이었다. 황제의 군대가 강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는 위험한 시점이 도래할 터였다. 이적은 먼저 요동성을 포위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요동성에 있는 고구려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당태종의 도하를 저지할 것이고, 황제는 갈대가 망망대해를 이룬 소택지에서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시간이 촉박한 그는 신성을 포기했다. 

4월 26일 점령한 개모성을 근거지로 삼아 일부 당군을 주둔시켜 신성을 견제하게 한 뒤 요동성으로 향했고 일단 그곳을 포위했다. 하지만, 개모성은 제대로 역할을 못했고 신성은 두고두고 작전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됐다. 5월 8일 신성의 고구려 기병 2만가량이 요동성 부근에 나타났다. ‘신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고려(高麗)가 신성(新城)·국내성(國內城)의 기(騎) 4만을 파견하여 요동(遼東)을 구원했다.” 고구려 4만 기병의 1차적인 목적은 요하를 도하하기 직전에 있는 당태종의 본대와 이적 선발대의 결합을 막는 데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이적은 황제의 안전한 도하를 위해 건안성을 공략하고 있던 장검의 기병사단을 차출해 고구려 기병을 겨우 격퇴했다. 이 때문에 요하 입구의 대성(大城) 건안성이 살아남았다. 6월 23일 주필산에서 승리한 직후 곧장 오골성을 뽑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직공하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신성·건안성의 보유 병력이 당군의 발목을 잡았다. “황제가 이를 따르려고 하는데 홀로 장손무기가 말했다. 천자가 친히 정벌을 나왔으니 제장이 온 경우와 달라서 위험을 타고서 요행을 바랄 수 없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에 있는 오랑캐 무리(고구려군)가 10만인데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모두가 우리의 뒤를 밟아올 것이다.” 안시성 공략이 결정됐고, 그곳에서 막혀 전체의 작전이 틀어졌다. 신성을 건너뛰면서 이후 작전수행에 전략·전술적 하중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결국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신성 공방전 

667년 2월 이적은 신성에 대한 공략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이었다. 요동도행군대총관인 그의 휘하에는 남생을 구하기 위해 고구려에 선발대로 와 있던 부대총관 방동선(龐同善)과 계필하력이 있었다. 돌궐계 기병들을 다수 보유한 계필하력은 신성과 그 주변으로 접근하는 고구려 기병을 봉쇄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초반부터 치열한 기병전이 벌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성 주변 평지에 대한 제륙권을 확보해야 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토목공사를 시작할 수 있고, 보병들이 공성기를 설치하고 성벽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하지만, 초전에 당군은 밀렸던 것 같다. 이적은 신성 서남쪽 산으로 후퇴해 나무를 베어 목책을 둘렀다. 성책을 배후 기지로 삼아 신성 앞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됐다. 고구려군이 밀려와 그들의 목책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책부원구’ 장수부는 이 전투에 대해 아주 짤막하게 전할 뿐이다. “신성 서남에 위치한 산에 의지하여 목책을 쌓아 두르고(築柵), 또 싸우고(且戰), 또 지켰다(且守).”

667년 6월에 가서야 이적은 어느 정도 전투의 주도권을 잡은 것 같다. 7월 3일 당나라 사신이 신라조정에 도착해 당고종의 칙령을 전했다. 신라는 병력을 동원해 평양성으로 진군하라는 명이었다. 당나라 장군 유인원과 함께 문무왕의 4번째 동생 인태(仁泰)가 안변지역의 연정토(淵淨土) 휘하에 속했던 비열홀 사단 병력을 이끌고 평양으로 직공하고, 신라군을 징발해 황해도를 거쳐 북진하고, 문무왕의 또 다른 동생인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임명해 요동전선에 종군할 것을 명했다. 8월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들이 왕경을 출발했다. 

내부 배신으로 함락된 신성

9월 14일 마침내 신성이 함락됐다. 내부의 배신자가 나와 성주를 체포하고 성문을 열었던 것이다. 당군의 공격을 받고 언제 성이 함락될지 모르자 신성의 부구(扶仇) 등이 내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신성 주변의 자성(子城) 16개도 각개 격파됐다. ‘책부원구’ 장수부는 이렇게 전한다. “성중(城中) 사람 부구(扶仇) 등이 그 성주(其城主)를 묶고 성문을 열어(開門) 항복을 청하니(請降) 이적이(勣) 군대를 이끌고(引兵) 나아가(進) 16성을 깨트렸다(破).” 이적은 신성에 잔류 병력을 배치하고 자신은 요동성 방면으로 진격했다. 평양의 남건(男建)이 신성 탈환을 위한 반격에 나섰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당의 장군 방동선과 고간(高侃)이 고구려 중앙군과 말갈군의 공격을 받았다. 한편, 남건은 형 남생의 휘하에 있던 소자하 유역의 목저성·창암성·남소성 등을 공격해 재차 중앙정부에 귀속시켰다. 그러자 신성의 당군과 연결이 차단된 국내성 지역의 남생군은 고립됐다. 이 작전이 유효하게 전개되면 고구려는 국내성 지역을 회복하고 신성을 탈환해 침공군을 북쪽에서 압박하고 보급선을 위협하면서 지구전을 펼칠 수 있어 전쟁의 전망은 밝아진다. 

상황이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자 이적은 현 서울지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라군에 병력을 빨리 북진시키라고 독촉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우선 (임진강에 위치한) 고구려의 칠중성을 쳐서 (당의) 대군이 (평양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막 성을 공격하려 할 때 (10월 2일) 영공(李勣)의 사신 강심(江深)이 와서 (서신을 전했다) 대총관(이적)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군사는 (칠중)성을 공격할 필요 없이 빨리 평양으로 와 군량을 공급하고 모이라.” 당은 신라로 하여금 평양을 공격하게 해 남건 휘하 고구려 중앙군 병력을 남쪽으로 분산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 초 이적은 압록강 부근에 도착했지만 막혀 도하를 못했고, 다음달에 고구려의 반격을 받고 북쪽으로 물러났다. 고구려 중앙군의 공격을 받고 위기에 처한 신성 등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11월 11일 장새(獐塞:遂安郡)에 이르러 영공(이적)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왕의 군사 또한 돌아왔다.”

(사진 없음)
667년 정월 이적이 이끄는 대군은 요하를 건너 신성에 다가섰다. 요령성 무순(無順)의 고이산성(高爾山城)으로 알려져 있는 신성은 천산산맥의 줄기가 요동평야와 맞닿는 곳에 우뚝 서 있다. 

남생의 제보로 신성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낸 상태였다. 그 안을 들어가 보면 여러 야산이 3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방어망이 중첩돼 있다. 평원지대에 우뚝 솟은 장군봉은 멀리서 접근해 오는 적도 관측이 가능하다. 성의 창고는 주변 평원에서 생산된 곡물들로 넘쳤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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