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생 666년 휘하 세력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
<103> 당의 내전 개입
2014. 04. 23   15:33 입력 | 2014. 04. 23   18:01 수정
  
당나라, 80세 이적을 총사령관에 임명 등 고구려 내전 권력 공백 이용 멸망계획 수립



당나라 시대 벽화에 묘사된 호위무사. 필자제공

한번 시작된 내전의 불길은 삽시간에 고구려 국토 전체를 휩쓸었고,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당시 고구려의 정치 시스템은 그것을 수습할 수 없는 반신불수였다. 귀족회의나 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허울뿐이었다. 국왕과 200명의 고위귀족들을 한꺼번에 죽이고 들어선 연개소문 정권은 고구려의 기존 시스템을 파괴한 그 자리 위에 들어섰다. 집권한 연개소문이 기존 권력기구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피를 받은 아들들에게 권력을 나눠 줬고, 세습화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연개소문의 죽음은 권력의 공백을 발생시켰고, 유일 권력장치 내부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중지시킬 어떠한 실질적 존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구려 귀족들은 내전을 고구려가 멸망해야 멈추는 쳇바퀴로 봤던 것 같다. 중국에서 발견된 ‘고자(高慈) 묘지명’은 아버지 고문이 가솔들을 이끌고 당에 항복해 온 이유를 이렇게 전한다. “고구려가 필연적으로 망하는 것이 예견돼 마침내 형제들을 이끌고 (당에) 투항했다.”

신라의 개입 독촉

666년 4월 신라의 사절이 당 조정에 도착했다. 헌성보다 1개월 앞선 시점이었다. 김유신의 아들 나마(麻) 삼광(三光)과 천존의 아들 한림(漢林)은 당 조정에 숙위를 청하였다. 그들은 당에 눌러앉아 향후 나당연합군의 군사작전을 조율할 전권대사와 같은 임무를 띠고 왔던 것 같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신라 문무왕의 서한 내용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여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했다.” 

내전 상태에 들어간 고구려를 남북에서 동시에 공격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중국 측에서 먼저 강요하고 수동적으로 따라가던 신라였다. 그러던 그들이 이러한 제안을 했다는 것은 확신이 있다는 증거다. 665년에 시작된 고구려 내전을 신라도 알고 있었다. 이름 없는 고구려인들이 난리를 피해 신라에 투항해 왔고 그들을 통해 고구려 소식이 전해졌다. 

665년 겨울 신라에서는 수많은 백성이 군수품을 등에 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소백산맥을 넘고 태백산맥을 지나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있었다. 남쪽 경상도 지역에서 이제 올라온 백성들은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먼 거리에 있는 곳까지 등짐을 지고 가야 하는지 영문도 몰랐다. ‘삼국사기’ 문무왕 5년(665) 겨울 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겨울에 일선주와 거열주 두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군대에 쓸 물건을 하서주(河西州)에 운반하게 했다.” 경상도 서부 지역의 인력들이 강릉 지역으로 군수품을 옮기는 작업에 들어갔다. 오랫동안 전쟁에 동원돼 타성이 붙은 백성들은 국가가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랐다. 여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해안 북쪽 고구려, 죽은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 지배 지역 원산지방에서 뭔가 움직임이 포착된 듯하다. 666년 12월 원산지역 12개 성을 지배하던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가 그곳의 땅과 백성을 신라에 넘기고 투항한 사건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삼국사기’ 문무왕 6년 조는 이렇게 전한다. “연정토가 12성 763호(戶) 3543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연정토와 그 부하 24명에게 의복과 식량·집을 줘 왕경과 주(州)·부(府)에 안주시키고, 그 8성(城)은 온전하므로 군사를 보내 지키게 했다.” 강릉에 군수품을 집중시킨 신라는 해안을 따라 북상해 원산 지역에 있는 8개 성을 접수했다. 이곳은 668년 7월 신라 비열홀성 사단이 평양으로 직공하는 중요한 배후기지가 된다. 

남생 구원작전

666년 6월 당 조정은 현토성에 웅거하고 있는 남생을 일단 구출하기로 결정했다. 서역의 상황이 좋지 않지만 그의 목숨을 붙여 놓아야 했다. 그가 사라지면 내전이 종식될 것이고, 두 번 올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동국통감’ 666년 6월 조는 이렇게 전한다. “(남생이)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 내응(內應)해 주기를 구하니, 제(帝)가 헌성에게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을 배수(拜授)하고, 승여(乘輿)·승마(乘馬)·서금(瑞錦)·보도(寶刀)를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황제는 남생의 아들에게 당나라 장군직과 원군파병의 증표인 승여와 보금 등을 줘 현토성으로 돌려보냈다. 

‘신당서’는 황제의 장군 임명을 이렇게 전한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안무대사로 임명하고, 좌금오위장군 방동선(龐同善)과 영주도독 고간(高侃)을 행군총관으로 삼고, 좌무위장군 설인귀(薛仁貴)와 좌감문장군 이근행(李謹行)을 후속부대로 (고구려로) 떠나보냈다.” 

666년 6월 황제의 임명을 받은 계필하력은 방동선과 함께 장안에서 북상해 오르도스 부근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던 계필부 부락병을 이끌고 곧장 동진해 영주(조양)에 도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고구려 전선 총사령부인 그곳은 중국인 군대가 주둔해 있었고 휘하에 거란(契丹)·말갈(靺鞨)·해(奚)로 편제된 기병단이 있었다. 8월께 계필하력은 자신의 돌궐계 기병과 영주도독 고간이 이끄는 병력과 함께 남생이 웅거하고 있는 현토성으로 향했다. ‘동국통감’은 당시 남생은 휘하에 거란·말갈을 거느리고 동생들에게 대항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아들을 통해 받은 당나라 군대 깃발을 휘날리며 두 종족의 기병을 이끌고 동생들과 싸우고 있었다. 

9월 방동선의 부대가 현토성 부근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동생들의 군대와 싸움이 벌어졌고, 방동선이 방어선을 돌파해 남생이 있는 곳으로 진군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666년) 9월 방동선이 고구려병을 대파하였는데 천남생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방동선과 합하였다. 조서를 내려 남생을 특진 요동대도독으로 삼고, 평양도(平壤道)안무대사로 삼으며 현토군공으로 책봉하였다.” 

남생이 병력을 당군과 합치면서 고구려와 당나라에 각각 속해 있던 거란과 말갈 등의 종족들이 거의 최초로 하나가 됐다. ‘삼국사기’ 연개소문전은 “남생이 거란과 말갈을 이끌고 당나라에 붙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사건은 고구려 멸망은 물론이고, 그 이후의 일어날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줬다. 하나가 된 종족들은 후속으로 도착하는 이근행 휘하 병력으로 나당전쟁기에 활용될 터였다. 30년 후 발해를 건국할 대조영의 초기 집단도 남생과 함께 이때 당에 흡수된 것으로 여겨진다.

토번의 서역 잠식 본격화

666년 12월 당 조정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한 사상 초유의 전쟁을 결정했다. 80세인 이적이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21년 전 고구려에 패배해 돌아온 그는 한을 품고 살았다. 계필하력 등의 고구려 주둔 부대는 당의 대군을 현지에서 기다렸다. 하북(河北) 지방 여러 주에서 거둘 세금은 고구려 전쟁물자로 전용됐고, 운량사(運糧使) 두의적·독고경운·곽대봉 등이 그것을 고구려로 운반하는 책임을 맡게 됐다. 상상치도 못할 규모의 군대가 고구려로 향하려 했다. 당이 고구려와 전면전쟁에 돌입할 것이라는 소문이 전 세계에 퍼졌다.

마침 우려하던 문제가 터졌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667년) 2월 생강(生羌)족이 사는 12개 주(州)가 토번에 격파되자 3월 18일에 (당 조정은) 이를 모두 철폐했다.” 당나라의 기미부주에 속해 있던 티벳계 강족의 땅을 가르동첸의 아들들이 점령했다. 고구려에 군대를 보내고 있던 당은 여기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667년 2월 직전부터 토번은 서역 지역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했다. 그들은 요동에 당의 주력이 집중되는 것을 파악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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