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6.htm
고려에서 독립운동기까지의 발해사인식
1. 발해사 인식의 전제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각 시대의 발해관은 발해국을 자국사로 인식하고 있었는가의 여부와 발해의 종족적 계통을 고구려로 인식하고 있었는가의 여부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문제는 서로 동일한 문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발해를 자국사로 인식하면서도 발해의 종족적 계통에 있어서는 고구려와 다른 ‘말갈’로 보려는 기록들이 병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발해의 종족계통을 보여주는 중국측의 기록들이 각각 그 내용상의 혼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신을 언급하면서 발해의 멸망시기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구당서》(후진, 945)는 발해를 ‘고구려 별종’으로 그리고, 이보다 115년 늦게 나온 《신당서》(송, 1060)는 발해는 고구려와 다른 종족계통인 듯이 ‘속말말갈인으로 고구려에 부속된 자’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이 결국 후세인들로 하여금 발해를 고구려인들이 세운 국가로 보기도 하고 마치 고구려인과 계통을 달리하는 말갈인들이 세운 국가로 보기도 한 원인이 되었으며, 한국사에서 발해의 자국사 논쟁이 벌어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대조영의 본래 모습은 ‘고구려의 속말(송화강) 지역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발해사 인식을 살핌에 있어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사실은 발해에 대한 인식이 시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발해에 대한 인식이 꼭 ‘말갈’의 문제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의 반증이다. 다시 말해, 한국사에서 삼한(마한) 및 통일신라에 대한 정통의식의 농도와 시대마다의 북방관 이를테면 고토 회복 의식의 농도에 따라 발해사에 대한 자국사로서의 인식 정도가 다르게 나타났던 면도 있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전자의 경우는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 인정하면서도 신라사의 한 인접국 정도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원인들로 인하여 각 시대마다의 발해사 인식은 항상 신라사 특히, 신라의 삼국통일관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또한 후자의 경우는 발해를 고구려와 종족적 계통을 달리하는 말갈의 후손 왕조로 생각하면서도 한국사의 체계에 넣기도 하였다.
발해인들은 그들이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라는 사실을 여러 군데에 남기고 있다. 특히, 일본과의 외교 문서(727)에서 그들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였고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였으며, 제 3대 문왕(737-792) 대흠무는 그를 스스로 ‘고구려 국왕’이라고 하는 등 발해의 고구려 계승을 확실히 하였다. 신라인들도 발해의 고구려계승은 인정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최치원의 예로 볼 때에 그는 발해를 고구려의 사마귀만한 부락에서 나왔다고 하거나,)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의 태백산을 의거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라고) 하여 발해의 고구려계승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함에도, 신라인들은 발해를 ‘말갈발해’나 ‘발해말갈’ 혹은 ‘말갈’ 등으로 부르면서 ‘발해’라는 공식 국호는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발해말갈’이란 당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이민족을 통칭해서 깔보아 기록했던 《구당서》의 것을 빌린 것이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발해를 과거 고구려시대 변방 주민들이 세운 나라였다고 낮추어 불렀던 호칭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말갈발해’로 기록됨으로 해서 마치 고구려와 전혀 다른 종족인 말갈족의 발해라는 인식을 후세에 남기게 하였다. 이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여기고 있던 중국중심적인 시각과 신라인들의 왕조중심적 시각이 어우러져 나타났던 잘못된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신라인이 느꼈던 발해국에 대한 유대의식은 남북국(신라와 발해)이 삼국항쟁과 같은 치열한 교섭의 역사를 갖고 있지 않았고 대립의 현상 고착이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삼국시대보다도 더 낮은 유대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발해가 건국과 명망의 위기에서 신라에 우선적으로 도움을 청하였던 사실이나 신라가 이것을 수락한 점을 통해 볼 때, 남북국은 서로가 어느 정도의 역사적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남북국은 신라가 발해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고 침략국 거란을 도와줌으로 해서 서로의 관계가 종결되고 말았다. 남북국이 200여년간 현상 고착적 대립관계를 지속해 왔던 사실과 발해가 이민족에게 멸망하였던 사실, 그리고 실질적인 면에서 신라를 계승하였던 고려 건국 등은 이후의 고려, 조선인들의 발해사 인식에 커다란 한계가 되었다.
2. 고려시대의 발해사 인식
한국사에서 발해에 대한 자국사 논쟁이 시작될 수 있는 시기는 고려부터이다. 발해가 이민족에 의해 멸망하고 민족사 상에 신라중심적이기기는 하였지만, 단일 왕조가 형성되었고, 그 이전의 삼국이나 남북국 어느 쪽도 민족사의 체계화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 왕조였던 고려가 건국되고 난 이후에는 고구려·백제·신라사를 묶어 《삼국사기》를 쓸 정도로 민족사에 대한 체계적 인식이 이루어졌다. 민족사 최초의 통일 왕조로서는 통일신라(668-698)였다. 그 때에 이러한 역사서가 나올 법도 하였으나. 30년의 짧은 기간과 발해 건국으로 인한 남북국의 양국시대가 접어들면서 이러한 민족사의 체계적인 작업은 뒤로 미루어졌던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고려시대 《삼국사기》가 한국사에서 최초로 우리 역사를 체계화시킨 대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사가 제외되었다. 그 이유가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는 《삼국사기》였기에 가야사나 발해사가 빠질 수밖에 없었다거나 자료가 없었다는 이해도 가능하나, 그 보다는 당시 고려 지성이 갖고 있던 역사 인식의 한계가 더 큰 이유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러함에도, 고려인들은 대체로 발해를 자국사로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실례 중의 하나가 고려 태조가 발해를 ?친척의 나라?로 인정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거란을 무도한 나라로 지목하고 후진의 고조에게 함께 거란을 치자고 하는 등 적대시 하였던 것은 '친척의 나라'인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고려 태조는 발해 멸망 이전에는 거란과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하고 난 이후부터는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등을 만부교 다리 아래에서 굶어 죽이기까지 할 정도로 매우 적대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는 과거 거란이 고려와 경쟁관계에 있던 후백제와 교섭을 하였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으나, '친척의 나라'에서 보는 바와 같은 발해와의 역사적 관계도 또한 작용하였다는 것은 자명하다.)
고려 전기인들이 발해를 자국사의 일부로 인식하였던 사실은 묘청의 일파로 지목되어 벼슬에서 사퇴하였던 윤언이의 해명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즉, 그는 자신이 건원(독자적 연호사용)하자는 청을 올린 것이(금나라를 격노하게 하여 사단을 만들고 그 틈을 타서 반역을 꾀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왕을 존중하는 정성에서 였다며 우리 역사의 예를 들어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고려의 태조와 광종이 건원한 바 있었고 또한 과거의 문건을 보건대 신라와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음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연호 사용의 예를 신라와 아울러 발해를 들었던 점은 발해사를 자국사의 일부로 보았던 증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서희나 윤관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인들의 발해사는 신라사의 부수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다는 것이 한 특징이다. 따라서, 그들이 고려 초와 같이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왕조 계승을 고구려→발해→고려로 생각하는 면도 희박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한계는 고려가 신라의 후삼국을 통일한 왕조였다는 사실과 발해와 신라가 200여년간 대립적이었다는 사실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고려는 40년 가까이 혼란상을 빚어오던 신라의 후삼국을 통일한 왕조였다(936). 말하자면, 여기서의 후삼국이란 고구려·백제·신라의 전삼국에 대한 후삼국이 아니라, 남북국중의 하나였던 신라의 후삼국이다. 따라서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막연히, 삼국→남북국(신라와 발해)→후삼국→고려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후삼국이 형성되어 통일되는 기간에도 북국의 발해가 926년까지 엄연히 존재하였고, 왕실이 망한 후에도 발해주민들의 역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는 신라라는 국호를 계속하여 쓰지 않고, 고구려를 의식한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는가 하면, 수도 역시도 경주를 벗어나 옛 고구려 땅이었던 개성을 택하였다. 역사적 명분에 있어서는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었으나, 현실적인 면에서는 신라를 계승하고 있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고려 전기인들은 발해를 자국사로 인정하면서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라는 인식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신라시대의 고구려적 발해관에도 오히려 못미쳤지 않았는가 한다.
고려인의 발해사에 대한 자국사로서의 인식이 강하였던 시기는 고려 초와 대몽항쟁 이후였다. 고려 초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갖고 왕조의 건설에 이어 북진책을 추구하였고, 몽고침략 이후는 몽고와의 항쟁으로 인해 민족사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서경천도와 칭제건원 및 북벌론의 북진파들이 제거되는 고려 중기(1135년 경)는 이러한 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하였지 않았는가 하며, 이러한 시기에 쓰여진 《삼국사기》(1145)가 갖는 한계 또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연유하지 않는가 한다.
대몽항쟁 이후의 사서들인 《삼국유사》(1281경)와 《제왕운기》(1287)의 발해관은 자국사로서의 인식이 강하였다. 《삼국유사》가 중국 《통전》(실은 《신당서》)대로 발해를 ‘속말말갈’로 서술하고 있었는가 하면, 《제왕운기》는 발해의 대조영을 ‘고구려 장수’로 표현하여 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발해관이 발해를 ‘속말말갈’로 보면서도 대조영을 고구려인이라 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기는 하나, 이것이 말갈과 고구려인의 관계를 전혀 이질적으로 보았다고 하는 근거가 되기는 어렵지 않은가 한다).
3. 조선시대의 발해사 인식
조선 전기에는 많은 역사서가 나왔지만 이 때의 발해사 인식을 잘 반영하는 사서로써는 《삼국사절요》(1482?)와 《동국통감》(1485)이 있다. 이것들의 발해사 기록은 중국의 《唐書》를 상당히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발해사에 대한 기록의 양이 고려의 《삼국사기》보다 훨씬 많아졌다는 것은 발해사의 자국사화라는 입장에서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조선이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단지, 발해의 서술 분량이 많아졌을 뿐 발해사의 자국사화라는 구체적 인식은 소극적이었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고려 태조가 거란의 낙타들을 만부교 아래에서 굶어 죽였던 이유로써 발해 멸망 역사를 든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국사 상에 발해사를 자국사로 본격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 시기는 실학의 시대로 불리는 조선 후기가 되면서였다. 그러나 실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발해사의 한국사화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성호 이익(1681-1763)과 순암 안정복(1712-1791)의 경우는 조선 초기의 발해사에 대한 생각을 답습하여, 발해사를 민족사의 영역으로서는 다룰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안정복이 《동사강목》의 범례에서 기록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러한 본보기이다.
발해가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부당하다. 발해는 본래 고구려 옛 땅에서 자리잡았고 우리나라 땅의 경계와 서로 접하였으므로 의리로 보면 잇빨과 입술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동국)통감》에서 갖춰 (우리나라 역사로) 썼는데 이제 이를 쫓는다.
위에서 볼 수 있는 안정복의 생각은 발해를 고구려의 후손으로 인정하면서도,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다룰 수 없다고 하면서, 《동국통감》에서 이웃 나라의 역사로 기록하였으니 그도 이를 따른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이익과 안정복의 생각은 한국사의 발전을 단군조선→기자조선→삼한(마한)→삼국→(통일)신라로 보는 삼한(마한)정통론에 연유한 것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삼국의 무정통을 생각하면서도 남북국시대의 신라 정통만을 생각하였던 이들은, 자연 발해가 한국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발해의 한국사화는 이종휘, 유득공, 한치윤, 홍석주, 정약용, 김정호 등에 의해 적극화되었다. 실학시대의 발해사에 대한 공헌은 거의가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종휘(1731-1786)는 《동사(東史)》에서 단군·기자·삼한·후조선본기와 따로 <세가>편을 서술하면서 ‘발해세가’를 기자·부여·가야세가와 더불어 입전시키고 있다. 발해에 대한 설명으로도 ‘발해의 진국(震國) 고왕(高王)은 성이 대씨요 이름은 조영인데 그 선조는 고구려 속말인이다’라고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실학시대 발해를 한국사의 체계에 넣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잘 알려진대로 유득공(1749- ? )이다. 길지만, 그의 유명한 《발해고》 서문을 이만열의 글에서 옮겨본다.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고려가 떨치지 못함을 알게 한다. 옛날에 고씨는 북쪽에 살며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는 서남쪽에 살며 백제라 하였고, 박·석·김씨는 동남쪽에 살며 신라라 하였는데. 이를 삼국이라 한다. 그 삼국의 역사가 있는 것은 마땅한데 고려가 이를 편찬한 것은 옳은 일이다. 부여씨와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했고, 대씨가 그 북쪽을 차지했는데 이를 발해라 한다. 이를 남북국이라 할 수 있으니 남북국사가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남북국사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 대저 대씨는 어떤 사람인가, 고구려 사람이다. 그 소유한 땅은 어떠한 땅인가, 고구려의 땅인다. 그 동·서·북쪽을 넓혀 광대하게 만들었다. 김씨와 대씨가 망하자 왕씨가 아울러서 소유하고는 고려라 하였다, 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은 온전히 가지게 되었으나 북쪽의 대씨의 땅은 온전히 가지지 못하였다. 대씨의 땅은 혹은 여진에 편입되고 혹은 거란에 편입되었다. 이 때를 맞아 고려를 위하여 세워야 할 계책은 마땅히 급히 발해사를 편찬하는 것이었다. 사필을 들고 여진을 책망하기를, 왜 우리 발해의 땅을 되돌려주지 않는가, 발해의 땅은 곧 고구려의 영토라 하고 1장군을 파견하여 그곳을 수복토록 하여 토문(土門) 이북의 땅을 소유할 수가 있었다. 사필을 들고 거란을 책망하기를, 왜 우리 발해의 땅을 되돌려주지 않는가, 발해의 땅은 곧 고구려의 영토라 하고 1장군을 파견하여 그곳을 수복토록하여 압록 서쪽의 땅을 소유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토문 이북 압록 서쪽의 땅이 누구의 땅인지를 모르게 했다. 여진을 책망하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을 책망하려 해도 할 말이 없다. 고려가 드디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의 땅을 얻지 못한 까닭이니 가히 탄식할 일이다.
유득공은 위에서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요, 한국사는 삼국시대에 이어 신라와 발해가 병립하였던 남북국시대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남북국시대론’자들의 이론적 모형이 이미 유득공에 의해 모두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여진이나 거란을 보는 시각에 있어 논자에 따라 다름이 있을 뿐이다. 다름아니라, 고려시대의 북방 여진이란 발해유민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과 거란 역시 상당수의 발해유민들이 포함된 거란이었다는 해석이다.) 왕실을 중심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발해가 멸망한 후, 그 피지배 유민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왕실의 멸망이 곧 역사의 단절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실 귀족사의 붕괴가 곧 발해 주민들의 역사까지 붕괴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발해 피지배 유민의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거란’ 사람이 되었으며, 거란화되지 않은 유민들은 그 때부터 ‘여진’ 사람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 모두가 발해에서 ‘여진’인(또는 번인蕃人)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자면, 《금사(金史)》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일가(女眞渤海本同一家)’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발해를 한국사로 취급하여 ‘남북국시대’를 주장하였던 유득공마저도 여진의 주거와 생존의 이유를 부정하고 있었다. 단지 고려만이 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한 왕조로서 북방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 역시, 왕조중심적 시각에서 송화강 주민의 속말인과 왕실중심의 고구려인을 다르게 보고 있었다.
한치윤(1765-1814) 또한 발해사의 한국사화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해동역사(海東繹史)》 <세기(世紀)>에서 발해사를 단군·기자·위만조선과 삼한·예·맥·부여·옥저와 고구려·백제·신라 및 고려와 같은 위치에서 서술하였다. 비록 외국의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지만, 그의 발해사관은 한국사화에 투철하였다. 발해를 한국사로 인식하였던 그의 생각은 <세기> 뿐만 아니라 <지(志)>의 각 부분에서도 삼국과 고려에 못지 않게 발해를 중시하였다. 이를 테면, 빈공(賓貢), 복장(服章)을 비롯하여 조공, 지리 등의 각 <지>에 이르기까지 발해사가 한민족사에 나타나는 다른 나라와 꼭 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홍석주(1774-1842)도 《동사(東史)》 세가 중의 <발해세가>에서 발해사를 한국사(동사)의 체계에서 이해하고 있다. 한국사가 중국의 동국사라는 인식에서는 아직 극복되지 못하였으나, 발해를 한국사의 한 독립국으로 인식하였던 것은 하나의 큰 진전이었다.
유명한 정약용(1762-1836)도 발해의 한국사적 견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한치윤과 홍석주의 《해동역사》와 <발해세가>를 참고하였던 《강역고(疆域考)》에 <발해고>와 <발해속고>를 남겼는데, ‘발해의 입국은 본래 고구려의 땅에 근거하였는데, 우리나라 서북의 변두리는 모두 그 영토에 편입되었다’고 시작되는 전자가 지리적인 것이었다면, 후자는 역사부분을 다루었다.
한편, 김정호( ? -1864)도 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신라와 발해의 공존시기를 남북국시대로 이해하고 있어 주목된다.
생각컨대, 삼한의 여러 나라는 삼국으로 통합되었는데 신라·가야·백제가 그것으로, 뒷날 가야가 망하고 고구려가 남쪽으로 옮겨와 또한 삼국이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된 후 50년에 발해가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을 계승하여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을 이루어 200년을 지냈고, 고려 태조가 다시 통일하였다. 그러나 도련포(都連浦)·청새관(淸塞關)·압록강 밖의 땅은 여진과 거란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김정호는 남북국의 통일을 고려가 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고려가 발해사를 통일하였다고 하면서 일부는 거란과 여진이 되었다고도 하나, 고려의 한국사적 정통성도 인정하고 있다.
실학시대 발해사가 한국사에 적극적으로 기록되게 된 이유는 당시의 전반적인 시대사조와 연관을 갖는다. 즉,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적 가치체계가 붕괴되어 나감에 따라 성리학에 입각한 전통적인 역사 인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나던 분위기에서 발해사가 적극적으로 한국사의 체계에서 서술되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실학의 특징으로 지적되고 있는 한국사의 독자성 확보와 중국사와 대등한 입장에서의 한국사 전개라는 정통론의 새로운 적용 등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아울러 그들이 발해의 한국사화에 적극적이었던 원인은 한국사의 민족적 공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자각으로 인하여 발생된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었던 면도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다.)
4. 한말의 발해사 인식
개항 이후 한말의 발해사 인식에 대한 생각은 당시 애국계몽운동의 한 중요한 수단으로 역사교육의 장에서 이용되던 교과서에 잘 나타나 있다. 한말의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신라 중심의 역사 서술로 일관하고 있었다. 18 종류의 것에서 4종의 교과서가 발해를 언급조차 안하고 있었다는 것도 이러한 결과의 반증이다. 따라서 당시의 발해사는 신라사의 참고 정도로 기록된 것들을 비롯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면서도 발해를 독립된 항목에 놓고 ‘고구려 유종’의 국가로 인식한 것 등 통일된 인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전근대적인 편년체의 서술방법을 채택하고 있던 《조선역대사략》(1895) 및 《동국역대사략》(1899)은 신라사의 특정시기에 발해를 덧부쳐 쓰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것은 발해사에 대한 기록이 없는 처지에서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발해를 신라의 인접국가로 인식한 조선 전기의 관찬사서인 《동국통감》의 파악방법을 계승한 셈이다. 따라서 발해를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의 별종’이다고 하여 《신당서》와 《구당서》를 조합한 표현을 쓰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편년체의 서술체제로 구성되어 있는 《보통교과동국역사》(1899), 《대동역사략》(1906), 《신정동국역사》(1906), 《대한역?》(1908) 등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편, 김택영이 편찬하고 한말 역사교과서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역사집략》(1905)은 발해를 우리 민족사의 일부로 서술하였다. 이것은 비록 대조영의 출자를 속말말갈계로 보는 한계를 갖고 있으나, 편년체의 역사 서술에서 발해를 민족사의 일부로 편입시킨 점은 진전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김택영의 발해사에 대한 이와 같은 서술은 민족사적 당위성을 느낀 결과라기 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발해사론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
또한, 신사체의 역사서술로서 발해와 병립하였던 신라를 통일신라로 인정하면서도 발해를 독립된 항목으로 설정한 현채가 편찬한 《중등교과동국사략》(1906)이 있다. 이것은 일본의 하야시[林泰輔]가 쓴 《조선사》(1892)를 번역하여 그 서술체제도 그대로 따라 단순하게 ‘신라의 통일’과 ‘발해’편을 설정하고 있는 것으로써, 발해와 고구려의 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등 그가 발해를 한국사 상에서 인식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유근이 편한 《초등본국역사》(1908)는 발해를 ‘고구려의 유종’으로 파악하여 발해를 정식으로 한국사에 편입하였다. 그렇지만, 그도 발해사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미약하였기에 《신찬초등역사》(1910)에서는 대조영을 ‘본래 말갈인으로서 고구려에 신부한 자’로 이해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렇듯, 한말의 역사서가 발해의 한국사화에 긍정적인 면을 갖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의 발해관을 계승한 것이었기에 발해의 종족계통에 대해서는 대개가 ‘속말말갈로서의 고구려별종’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5. 독립운동기의 발해사 인식
식민사학의 기본적인 방향은 한국사의 정체성과 타율성을 강조하여 한국 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즉, 정체성의 논리는 1910년대의 한국사회를 8-12세기의 일본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여 800년 내지 1200년간이나 뒤떨어진 한국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한 일본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타났고, 타율성의 논리는 한국사의 지리적 숙명론을 제기하여 일본의 ‘온정적’ 지배를 정당화하여 그들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논리는 급기야 이른바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이라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으로 비약하여 침략에 대한 역사적 타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그들의 보다 큰 야욕인 대륙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한국사의 연고 지역인 만주를 한국사에서 제외시키는 작업에도 정열적이었다. 이른바 ‘만선사관(滿鮮史觀)’으로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식민사학의 논리는 당연히 한국사 상의 발해사 서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부터의 발해사 서술은 한국사와는 별개인 만주사로서 서술되기 시작했다. 좋은 본보기로는 한말의 《조선사》에서 이미 발해를 기록했던 하야시가 그의 개정판인 《조선통사》(1912)에서 발해를 제외시키고 ‘신라의 통일 및 쇠망’만을 기록한 점이다.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선사의 길잡이(朝鮮史のしるべ)》(1936)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쓰여졌다는 사실도 주목하여 볼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일제의 조선 통치 25주년을 기념하여 25장으로 편찬한 것으로서, 발해사는 25개의 장 어느 곳에도 들어가지 못하였고, 다만 제6장 ‘신라일통시대’에서 신라가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는 과정에서 잠시 언급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국사의 체계는 발해사를 제외시킨 채 하야시에 의해 선창·표제화된 ‘통일신라’가 삼국에 이어 단일 정통 왕조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하야시가 한국사 체계에 대한 서술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역사적 환경에 따라 바뀌는 역사 인식의 문제가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심각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중요한 본보기가 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로부터 나왔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 식민사학이 고구려사마저도 한국사에서 떼어내 만주사로 편입시키려 하였던 사실은 짚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제의 강제 점령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던 시기의 발해사 인식은 일제의 식민사학에 저항하는 민족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반식민사학쪽에서 적극적이었다. 즉, 한국사의 모순을 한국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오는 민족 정신에서 찾으려는 민족사학과 한국사의 중세부재론을 극복하고 한국사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구의 유물사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회경제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발해사의 만주사화에 대한 반기가 일어났다.
(역사비평 199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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