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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시작은 고독과 백번 사고하는 것”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③
홍준철 기자  |  mariocap@ilyoseoul.co.kr [1016호] 승인 2013.10.21  10:46:02

고독하고 고뇌하지 않는 자 리더 자격 없어
부하들의 집단적 지혜를 따르라


<난중일기>의 기록에는 이순신이 홀로 밤새 고뇌하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홀로(獨)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날 저녁, 마음이 아주 어지러웠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회를 스스로 가눌 수 없었다. 걱정에 더욱 번민하니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1594년 7월 12일)

차가운 달빛이 대낮 같아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거렸다. 온갖 근심이 가슴을 쳤다. (1595년 10월 20일)
 
이날 밤 달빛은 대낮과 같고 물빛은 비단결 같아서 자려 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랫사람들은 밤새도록 술에 취하며 노래했다. (1596년 2월 15일)

고독하고 고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도 다양하다. 이순신도 평범한 우리처럼 가족 때문에 고뇌했고, 직장인으로 고민했다. 그러나 고뇌의 깊이는 우리와는 많이 달랐다. 그의 고뇌는 죽음의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전쟁터에 있는 장수의 고뇌였다. 또 전쟁으로 죽는 백성과 군사들에 대한 아픔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자신이 돌볼 수 없는 늙으신 어머니 때문에 울었고 침략자에 분노하면서 울었다.

끊임없는 고뇌가 만든 이순신의 조총
 
이순신은 고독과 번뇌, 울음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백성과 군사의 생명을 지키고, 승리할 준비를 해나갔다.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넋 놓고 있지 않았다. 불패 전략을 찾고, 온갖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만든 창조를 위한 시간으로 활용했다.

이순신이 불면의 밤을 보내며 고민했던 여러 이유들이 일기와 그가 남긴 보고서 <임진장초>에 잘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바로 일본군의 위협적인 무기였던 조총을 이순신이 스스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정철총통(조총)은 전쟁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작하는 묘법을 잘 알지 못한다. 이제야 온갖 방법을 생각해 만들었으니(百爾思得, 백이사득) 왜군의 조총과 비교해도 뛰어나다. (1593년 9월 15일 일기 이후에 쓰인 메모)

이순신은 최신 무기였던 일본군 조총의 위력을 경험하고, 일본군의 조총 원리를 파악해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그는 “온갖 방법을 생각했다”고 했다. 그가 생각한 온갖 방법에 대해 이순신이 조정에 보고한 장계에는 이렇게 나타나 있다.

신이 여러 번 큰 싸움을 하면서 왜적의 조총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 조총을 항상 눈앞에 놓고 그 원리를 실험했습니다. 그 결과 왜적의 조총은 총신이 길어 그 총구멍이 깊숙합니다. 깊숙하기 때문에 총알이 나가는 힘이 맹렬합니다. 그래서 총알에 맞기만 하면 어떤 것이든 반드시 부서집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승자총통이나 쌍혈총통 등은 총신이 짧고 총구멍이 얕아 그 힘이 조총만 못하고, 소리도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은 언제나 조총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신의 군관인 훈련 주부 정사준이 그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가 대장장이인 낙안 수군 이필종, 순천의 개인집 노비 안성, 김해의 절 노비 동지, 거제의 절 노비 언복 등과 함께 쇠를 두들겨 조총을 만들어냈습니다. 총신도 훌륭하고, 총알이 나가는 힘도 조총과 같습니다. (<화포를 올려 보내는 일을 아뢰는 계본>, 1593년 8월)

이순신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순신은 노획한 왜적의 조총을 자신이 직접 항상 눈앞에 두고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총통과 비교하고, 실제로 실험해 차이점과 만들 방법 등을 연구했다. 홀로 고심하며 연구해 터득한 원리를 활용해 이순신은 결국 부하인 정사준을 시켜 조총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노력보다 실제 제작을 지휘한 정사준과 제작에 참여한 대장장이와 노비들까지 모두 자세히 기록해 그들의 공로라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이순신이 조총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조총을 만들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보여준다. 게다가 이순신이 노비의 이름까지 기록해 임금에게 보고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아랫사람을 얼마나 존중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보여준다. 그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자신이 만든 조총의 견본은 물론 설계도까지 만들어 보냈다. 지식을, 지혜를 독점하지 않고 승리를 위해 다른 부대에서 조총을 만들 수 있도록 지혜를 나누었다.

내내 관찰(觀)하다가 저녁 무렵에 내려와서 해자 구덩이를 순시했다. (1592년 2월 4일)

대포 쏘는 것을 관찰(觀)하다가 촛불을 한참 동안 밝히고서야 자리를 파했다. (1592년 2월 22일)
 
동산산성에 올라가 형세를 관찰(觀)했더니 매우 험해 적이 엿볼 수 없다. (1597년 7월 19일)

이순신이 조총을 만든 과정은 고독을 벗 삼아 고뇌했던 고독한 이순신, 철저하게 관찰하고 연구했던 창의적인 기술자 이순신, 부하들의 집단적인 지혜를 활용하는 리더 이순신의 모습이 다 드러난다.

눈으로 보지 말고 가슴으로 보라
 
이순신의 일기에는 조총을 만들 때 고민하며 관찰했던 것처럼,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인 관찰하는 이순신의 모습도 나온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그는 사물과 사람을 그냥 훑어보지 않았다. 늘 자세히 관찰했다. 일기에 나타난 관찰하는 이순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글자는 ‘관(觀, 자세히 살펴보다), 찰(察, 빠짐없이 생각하며 살피다), 심(審, 불투명한 것을 자세히 살피다)’이 있다. 그중에서도 이순신은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이나, 고민하며 생각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펴본다는 관(觀)’을 많이 사용했다.

이순신이 조총을 만들 때 ‘온갖 방법을 생각해 만들었다’는 표현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집요한 관찰과 그 과정에서의 고독한 불면의 밤이 이뤄낸 결과이다. 이순신처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생각해 보고, 발상과 행동을 바꾸고,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이순신처럼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이순신처럼 백이사득(百爾思得) 하라! 해답을 찾을 것이다.

※ 이 칼럼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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