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80104.22016203749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7> 창녕 진흥왕순수비
신라가 함안 아라국 총공략 위한 집결지 창녕에 세웠던 비
사냥 통한 국경시찰 때 세웠던 게 일반적
진흥왕순수비에는 군사행렬 모습 엿보여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8-01-03 20:44:57/ 본지 16면

서기 561년에 세워진 창녕의 진흥왕순수비. 함안 아라국 공략의 의지로 해석되는 비석이다.

가야냐 신라냐

창녕 분들 사이에는 창녕이 가야냐 신라냐 하는 논쟁이 있는 모양이고, 오히려 처음부터 신라였기를 원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2003년에 발간된 '창녕군지'도 가야사 없이 처음부터 신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야 편(?)인 제가 창녕 분들을 만나 당연하다는 듯이 가야를 멸망시켰던 신라에 대한 원한(?)을 얘기하면,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믿음의 바닥에는 '강한 자의 승리한 역사'에 편승하려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는 파사왕 29년 그러니까 서기 108년에 창녕의 비지국(比只國)이 신라에 병합되었다 하고, '진흥왕순수비'는 561년에도 신라의 땅이었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고대왕국이 시작될 무렵에 이미 신라에 병합되었고, 멸망할 때까지도 신라 땅이었다니까, 가야시대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른 시기의 '삼국사기'에는 믿을 수 없는 기술도 많고, 유물에서 보면 신라 이전에 가야계의 '메이드 인 창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살펴보았던 것처럼, 창녕은 '빛벌(뜰)=비사벌'의 가야국이었고, 5세기 중반부터 신라화의 길을 걸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신라가 '비지국=빛나라'를 멸했다는 기술은 오히려 창녕이 처음부터 신라는 아니었다는 반증이 됩니다.

진흥왕순수비

창녕이 신라 땅이었다는 생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 중에 하나가 '진흥왕순수비'였을 겁니다. 1914년 화왕산 기슭에 소풍갔던 창녕초등학교의 학생이 발견했던 이 비는 동경제대의 토리이류우조(鳥居龍藏)에 의해 신라비로 확인되었고, 1924년 창녕읍내의 지금 자리로 옮겨지면서 창녕의 신라사를 웅변해 주게 되었습니다. 높이 162cm 너비 174cm 두께 30∼51cm의 자연석 화강암을 평평하게 골라 새겼는데, 오른 쪽 맨 위 첫머리의 '신사년(辛巳年) 2월 1일에 세운다'는 구절은 진흥왕 22년, 즉 561년에 세워졌음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보통 순수비라 부릅니다만,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와는 다르게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은 보이지 않습니다. 순수관경이란 사냥하면서 자신의 국경을 살핀다는 뜻으로 고대 국왕의 중요한 통치행위입니다만, 이미 창녕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성의 북한산, 함경도의 황초령과 마운령은 이제 막 확보한 지역이었지만, 창녕에는 이미 6년 전인 555년에 행정구역의 하주(下州)가 설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진흥왕이 창녕에 비를 세웠던 것은 영토의 확인보다 적극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가야 공략의 군사 퍼레이드

가야 공략의 마지막 사업으로 북쪽 고령의 대가야, 남쪽 함안의 아라국 공략을 위한 군사퍼레이드의 모습이 이 비에서 읽혀지는 겁니다. 비문에는 경주에서부터 왕을 따라온 중신들의 이름과 함께, 사방군주(四方軍主)의 이름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강 유역 총사령관인 한성군주를 비롯해, 비사벌(창녕)군주, 비리성(안변)군주, 감문(상주)군주와 같이 당시 신라 사방의 전선을 책임지는 총사령관들이 창녕에 소집되었습니다. 이러한 신라군 총사령관들의 집합은 대규모 군사퍼레이드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같은 해 561년에 함안의 아라국이, 몇 달 뒤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신라에 각각 병합되는 것을 보면, 이 군사퍼레이드의 창이 마지막 가야 공략의 총공세에 맞추어져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녕에서 남과 북으로 가야 총공격에 나서는 신라군의 모습이 그려집니까?

참, 경주에서부터 따라왔던 중신들 중에는 이미 532년에 투항했던 김해 금관국왕의 아들이며,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金武力)의 이름도 보입니다. 10년 전의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서 6등 아찬(阿 )이었던 그는 3등 잡찬(迊飡)으로 승진해 있습니다. 한강 유역 등에서 세웠던 전공과 경험으로 이 대열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가야계의 김무력이 가야 총공격의 무대에서 신라의 진흥왕에게 조언하고 활약했을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인제대 인문사회대학 학장·역사고고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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