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62754.html
미군이 원하면 한국정부 반대해도 ‘한반도 일촉즉발’ 치달아
등록 : 2014.11.03 20:28수정 : 2014.11.04 14:04
훈련 중인 한국군(왼쪽. 김정효 기자)와 북한 군인들(오른쪽/연합뉴스)
전작권 재연기 흔들리는 군사주권 ① 무엇을 잃었나
1976년 미군장교 북에 살해되자, 데프콘3 발령 전투태세 돌입, 미 국익 따라 한국군 동원
1994년 미 영변핵 폭격 계획도. 한국 대통령의 반대가 아닌 미군 피해예측 보고서가 막아
연평도 포격땐 한국이 응징 시도, ‘미군 협의’ 논란에 무산되기도
한민구 국방장관은 10월27일 국회에서 “전작권(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재연기는 군사주권의 문제가 아니라 최대한 효율적인 체제로 전쟁을 억제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는 군사주권의 핵심인 전작권을 사실상 포기해놓고 책임을 모면하려는 억지 주장이거나 주권을 내주고도 포기한 것인지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전작권이 국가주권의 핵심이라는 인식은 한·미 양국의 전문가, 관료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국장을 지낸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2009년 논문에서 “작전통제권이라는 ‘엄청난 국가주권’을 침해한 이유는 한-미 연합전투력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항해 한국이 호전적 성격의 일방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지적했다. 평시작전권을 환수해 온 군인 출신 노태우 전 대통령도 “우리가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갖지 못한 것은 주권국가로서는 창피한 일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전작권 환수 재연기론자들은 ‘데프콘3’이 발령돼 전작권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넘어가더라도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과 공동으로 군통수권을 행사하는 만큼 주권 포기 사태는 벌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실제 현행 한-미 연합 지휘체계는 연합사령관이 한-미 통수기구 및 양국 국방장관 간 안보협의회의(SCM), 합참의장 간 군사위원회(MC)의 전략지시와 작전지침을 받아 전작권을 행사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이는 현실에선 결코 작동하지 않는 문서상의 체계에 불과하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2005년 한-미 안보협의회의와 군사위원회에서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개념계획을 만든다’는 합의를 했는데도, 연합사령부는 이를 위반하고 ‘급변사태 대비 작전계획 5029’ 작성을 추진했다. 청와대가 ‘작전계획 작성을 중지하라’고 연합사에 통보했다. 하지만 당시 리언 러포트 연합사령관은 ‘이러면 동맹 깨자는 것’이라고 노골적인 협박성 발언을 하면서 미 정부 지침대로 작전계획 작성을 강행하려고 했다.” 당시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서 근무했던 김종대 군사평론가의 증언이다. 그는 “러포트는 당시 청와대가 주한미군에 불만을 전달하기라도 하면 ‘이런 수모는 처음’이라거나 ‘동맹 깰 거냐’는 등의 발언을 흘리면서 한국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했다”며 “태평양사령부 예하부대장에 불과한 그의 행태는 연합사령관이라기보다 대한민국 총독에 가까웠다”고 덧붙였다.
작계 5029 작성은 결국 청와대의 강력한 개입으로 무산됐다. 하지만 만약 이런 식의 의견 차이가 전쟁 개시를 앞둔 비상 시기에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평시에도 한국 쪽 의견이 관철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전작권 행사와 관련해 한국 정부의 지침이 통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다. 류희인 전 청와대 국가안보회의(NSC) 사무차장(예비역 소장)은 “최악의 경우 한-미 사이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쓰느냐 마느냐에 대한 지침이 갈릴 때, 연합사령관이 어느 쪽 지시를 따를지의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미군은 남한을 대상으로 한 북한의 도발에 대해 응징에 나서자는 한국 정부의 요구를 철저히 억눌렀다. 전면전 비화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의 국익과 자존심이 걸린 상황에선 한국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면전을 각오한 대규모 무력시위를 벌이는 이중성을 보여왔다.
1968년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 코밑까지 침투했던 1·21 사태 때 박정희 대통령은 단호한 대북 응징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거부했다. 1983년 버마 아웅산에서 북한의 폭발 테러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전두환 대통령도 보복 응징을 천명했으나 미국의 만류로 흐지부지됐다.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때는 이명박 정부의 ‘도발 원점 타격’ 방침에 따라 한국 공군의 F-15K 전투기가 출격했다가 미군과의 ‘협의’ 논란 속에 맥없이 되돌아온 일도 있다. 모두 미군이 작전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주국방’은 수사가 아니라 절규였다고 본다”며 “자주국방을 피맺히게 외쳤던 아버지의 딸이 ‘의존국방’의 시대를 열어놓은 셈”이라고 했다.
반면, 미국은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게 살해됐던 1976년 8·18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 때는 곧바로 ‘데프콘3’을 발령하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결국 김일성 북한 주석이 유감을 표명하고 사태가 마무리됐다. 미국이 한국 정부의 입장보다는 자국의 국익에 상황 판단의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4년에는 미국이 북한 영변 핵시설을 폭격하는 계획의 실행 일보직전까지 갔다. 북한의 반격으로 전면전이 예상되자 한국 정부는 ‘북폭 반대’를 주장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이 전쟁을 벌여도 나는 단 한명의 한국군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해 전쟁을 막았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하지만 당시 백악관에는 문제의 기간에 김 대통령이 임박한 전쟁에 대해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한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클린턴의 회고록도 북폭 중단과 관련한 김영삼 대통령의 구실에 대해서는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한국 대통령의 반대보다는 ‘미군 10만명 등 100만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예측한 보고서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성과에 영향을 받아 북폭 계획을 철회했다는 게 정설이다. 만약 북폭과 동시에 ‘데프콘3’ 이상의 준비태세가 발령됐다면 한국군의 전작권은 본국 정부의 지시에 충실한 연합사령관에게 넘어갔을 것이고, “60만 대군 중 단 한명도 동원하지 않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장담도 엄포에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 전작권을 내준 국가의 ‘비애’다.
전작권 포기로 한국이 잃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정부는 국지도발과 전면전 때 초기 단계에서 북한 핵·미사일에 대한 한국군의 필수 대응능력 구비를 전작권 환수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른바 ‘킬 체인’이 완성돼야 전작권 환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17조원이 투여된다. 그러나 권영근 국방개혁연구소장(예비역 대령)은 “킬 체인의 핵심은 육·해·공 합동 지휘통제 체계와 공군력 중심의 합동전력 확보인데, 이를 미군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군 자체로 갖추려면 먼저 우리 스스로 전작권을 갖고 그에 따라 이를 기획·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며 “지금 정부 주장은 자전거를 타보는 노력도 하지 않고 어느 순간 저절로 조건이 되면 자전거를 그냥 타겠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전작권 환수 없이 킬 체인 확보를 선결 과제로 제시하는 것은 전작권을 되찾지 않으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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