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rean.people.com.cn/84967/9402784.html

로송에 묻힌 천년 고성(古城)
세월의 흐름속에서 사라지고 농가사이 성벽터만 남아
2009년 06월 03일 08:36

 

사람들은 하룡(河龍)이라고 하면 곧바로 세 그루의 노송을 눈앞에 떠올린다. 하룡은 연변 부르하통강과 해란강의 합수목 마을로, 연길에서 동쪽으로 약 15㎞ 정도 상거한 동네이다. 

하룡의 동쪽 산자락에는 노송 세 그루가 있는데, 나무마다 천년의 연륜이 새겨져 있어 “삼태송(三胎松)”이라고 불린다.  삼태송은 청나라 말기(1904년) 조선 함경북도 명천의 밀양박씨 박중근 형제와 길주의 양천허씨 허웅범 삼형제가 정착하면서 최초로 발견한 것으로 전한다. 천년 역사를 가진 노송은 이때부터 마을의 당수나무로 성스럽게 모셔지고 있다. 지금 삼태송은 현지에서 특이한 명물로 되어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천만 아쉽게도 사람들은 이 천년의 노송을 보러 가면서 도중에 해란강의 기슭에 있는 천년의 고성은 그냥 무심히 스쳐 지난다. 어쩌면 그들을 무덤덤하다고 탓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 천년의 고성은 무정한 세월 속에 진작 이전의 형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기재에 따르면 고성은 하룡촌에 위치하고 있다. 속말에 “낙타는 굶어 죽어도 배 터져 죽은 쥐보다 크다”고 했다. 솔직히 고성이 황폐화되어도 그 흔적을 어련히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산기슭에 오밀조밀 들어선 이 동네를 보자 금방 한숨부터 새여 나왔다. 농가 사이에 바자굽도 아닌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보아하니 명색이 고성이라고 할 곳을 카메라에 한 장도 담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다행히도 현지인 김해(46세)씨가 일루의 희망을 던져주었다. “…아직 성벽 터가 한군데 남아 있긴 한데요.” 김해씨는 우리를 마을 북쪽의 큰길에서 수십미터 떨어진 한 농부의 저택으로 안내했다.  이 농가의 구새 목 부근에는 너비 10미터의 나지막한 둔덕이 무릎을 치고 있었다. 뒷부분에 있는 흙 둔덕은 키를 넘고 있었는데, 둔덕에 세워놓은 덕대를 타고 포도넝쿨이 줄줄이 드리워 있었다. 
  
“이건 마을에 남아있는 유일한 성벽 터입니다.” 
  
이 성벽은 마침 집과 밭을 경계로 자리하고 있었다. 집주인은 성벽이 담 맞잡이로 되자 내친 김에 그대로 남겨둔 것 같았다. 김해씨가 삽으로 몇 번 칼질하자 둔덕에는 금세 두세 뼘 크기의 계선들이 나타났다. 네모  반듯한 흙벽돌의 흔적임이 뚜렷했다. 성벽은 바로 이런 흙벽돌로 겉면을 쌓고 안에 돌과 흙을 꽉 채웠다고 한다. 
  
하룡 고성은 부르하통강과 해란강 합수목의 강기슭 평지에 위치한다. 크기가 약 5만평방미터인 고성은 약간 불균형적인 네모 모양이라고 전한다. 전반 고성은 해란강의 기슭을 따라 약간 동북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마름형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성 남쪽에는 산꼭대기가 뾰족하다고 해서 소뿔봉이라고 불리는 화첨자(花尖子)산이 우뚝 솟아 있으며, 북쪽에는 수십미터 폭의 해란강이 소리 내며 흐르고 있다. 고성의 서북쪽 1.5㎞ 되는 곳에는 부르하통강을 사이 두고 유명한 성자산 산성이 있다. 성자산 산성은 고구려시기에 축조되고 그후 발해, 동하국 시기에 계속 사용된 옛 성이다. 
  
하룡 고성은 불과 30여년전까지 사면에 모두 토성이 있는 등 온전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토성 위를 둔덕길로 삼아 걸어 다녔다. 토성 아래에 무성한 오미자나무는 고성에 한 점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때 고성 안에는 옛 우물터만 여섯 개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성에 새로 집을 짓다 보면 땅밑에서 차곡차곡 쌓인 돌들이 나지기도 했단다. 옛날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이 천년의 고성에는 또 아이러니한 비화가 숨어있었다. 1960년대 말, 중국에서는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해 “방공 굴을 깊이 파고 식량을 많이 비축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때 토성의 밑에는 촌민들이 방공용으로 판 지하갱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20세기에 이르러서도 계속 고성을 사용한 셈이다. 
  
“겨울이면 성벽 위에서 눈썰매를 타고 미끄럼질을 즐겼어요.” 김해씨는 어릴 때 성벽 부근에서 늘 숨바꼭질을 했다고 기억한다. 그의 말을 빈다면 너비 10미터, 높이 2미터 남짓한 성벽, 그리고 성벽에 둘린 고성은 어린 그들에게 디즈니랜드와 같은 놀이터였다. 그러나 고풍스런 이 천년의“놀이터”는 결국 종지부를 찍었다. 
  
현지에서는 고성의 동쪽에 집들을 지으면서 토성을 허물었고, 남쪽과 서쪽에 논밭을 개간하면서 토성을 허물었다고 한다. 또 북쪽에 대로를 닦으면서 토성을 허물어버렸다. 남쪽 성벽 가운데 있던 성문 자리와 옹성 역시 허물어지는 토성과 더불어 흔적조차 없이 말끔히 훼손되었다. 그 때는 바로 지난 세기 70년대 중반이었다고 한다. 그런 살풍경 속에서도 고성 일부 구간의 토성은 그 후의 80년대까지 잔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천년의 상아탑이 일시에 와그르르 내려앉은 순간이었다. 거물처럼 산기슭에서 꿈틀거리던 약 1천미터의 고성 성벽은 그렇게 단 몇 년 사이에 평지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지금 농가들 사이에 있는 동쪽 성벽 터가 그나마 옛날의 모습을 얼추 더듬게 할 뿐이다. 
  
“그때는 마을에서 오히려 토성을 거추장스럽게 여겼어요.” 그 시기를 지나온 김해씨도 몹시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성벽 터 위에 지은 뒷간과 돼지우리가 흉물스럽게 안겨와 저도 몰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고성은 진작 쓰레기 취급을 받는 버려진 “고물”로 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고성에는 출토된 유물이 아주 적다고 한다. 일찍 동쪽 성벽 부근의 돌무지에서 돌도끼가 발견되었으며, 고성 동남쪽의 산등성이와 서쪽의 산기슭에서는 또 원시사회 시대의 고분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고성이 원시사회 시대의 유적지 위에 세워졌다는 방증인 셈이다.  사실 고성 부근의 유적지는 이밖에도 적지 않다. 현지인들은 소뿔봉이라고 불리는 남쪽 산등성이에 사찰 유적지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산등성이에서는 기와조각, 도기 등 일부 유물이 발견되었을 뿐이며 사찰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또 석촉 등 유물로 미루어 소뿔봉 산등성이를 고대 전장이라고도 전한다. 구경 어느 설이 유력한지는 발굴된 유물이 적어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고성에서 서쪽으로 2,3㎞ 정도 떨어진 산등성이에서는 천여년전의 보루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위치상 연길분지에서 고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이 보루는 고성을 지킨 요새인걸로 보인다. 
  
“모두 옛날 얘기입니다. 언제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몰라요.” 김해씨는 지레 손사래를 젓는다. 
  
그건 그렇다 치고 육안으로 피뜩 보아도 고성과 성자산 산성은 평원성과 산성이 형제처럼 가지런히 서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고성과 성자산 산성을 일체화된 “쌍둥이” 성으로 주장한다. 옛날 주민들이 전쟁이 없을 때에는 평원성인 고성에서 생활하고, 전쟁 발발 시에는 험요한 요새인 성자산 산성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이다. 짜깁기식의 억지 주장은 아닌 듯 했다. 사학계에서도 하룡 고성 역시 부근 성자산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다는 게 통설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룡 고성 토성에서는 고구려 시기의 특유한 그물무늬 모양의 기와조각이 발견되는 등 성자산 산성과 거의 비슷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고성 역시 부근의 성자산 산성처럼 고구려 유적지 위에 축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도라고 하겠다. 
  
어찌하든 하룡 고성은 여러 조대에 걸쳐 계속 보수, 사용되었다는 게 지배적인 설이다. 적어도 발해, 요나라, 금나라 말의 동하국 시기에 계속 이 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 일부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명나라 시기 여진족의 일부도 이 부근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때 문화재이고 그렇게 값지다는 걸 알았더라면 굳이 토성을 허물었겠어요?” 김해씨의 말에는 아쉬움이 물씬 젖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고성 북쪽으로 1㎞쯤 떨어져 있는 삼태송을 찾았다. 삼태송 부근에 삼삼오오 모여선 관객들은 공연히 흥분해서 오구작작 떠들고 있었다. 천년의 풍상세월을 헤쳐 온 이 노송이 무척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이 노송 근처까지 14선 버스가 반시간 간격으로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다. 시내와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인데도 택시가 심심찮게 보였다. 잠간 세어보니 노송 근처에는 토닭곰, 토끼구이 등을 경영하는 음식점만 해도 무려 20여개 되었다. 천년 노송의 치솟는 인기를 실감케 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노송이 파수꾼처럼 천년을 지켜온 부근의 고성은 슬픈 옛말로 외롭게 남아 있었다. 

중국국제방송국 기자 김호림


하룡고성 관련글
하룡고성 (河龍古城) - 양시은  http://tadream.tistory.com/12744 
하룡고성 [河龍古城] - 김진광  http://tadream.tistory.com/14294 
하룡 고성 - 바람처럼  http://tadream.tistory.com/14295 
로송에 묻힌 천년 고성(古城) - 인민넷  http://tadream.tistory.com/14296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