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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하늘이다! 백성부터 살려라!”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⑩
홍준철 기자  |  mariocap@ilyoseoul.co.kr [1023호] 승인 2013.12.09  11:06:15

전투는 군인이, 전쟁은 백성이 한다
백성을 믿게 만드는 힘 리더의 힘


이순신은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백성이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백성이 없이 나라도, 군사도 있을 수 없다. 백성이 군사가 되고, 군사는 또 백성 그 자체였기에 이순신은 자신의 군사보다 백성의 안전과 백성의 삶을 먼저 고민했다. 그랬기에 이순신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군사와 관리, 백성을 괴롭히는 백성, 적에게 항복하거나, 적을 이롭게 한 백성들에 대해서는 한 치의 용서 없이 단호하게 처벌했다.

△ 토병(土兵) 박몽세가 석수로서 선생원의 쇠사슬 박을 돌을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 까지 피해를 끼쳤기에 장(杖) 80대를 쳤다. (1592년 1월 16일)
 
△ 해남의 향리 송언봉과 신용 등이 적진으로 들어가 왜놈을 꾀어내어 그 지방의 사족들을 많이 죽였다고 했다. 통분함을 참지 못했다. 곧바로 순천 부사 우치적, 금갑도 만호 이정표, 제포 만호 주의수, 당포 만호 안이명, 조라포 만호 정공청 및 군관 임계형, 정상명, 봉좌, 태귀생, 박수환 등을 해남으로 보냈다. (1597년 10월 13일)
 
△ 해남에 갔던 순천 부사, 우후 이정충, 금갑도 만호, 제포 만호 등이 해남에서 돌아왔는데 왜적 13명과 적진에 투항해 들어갔던 송언봉 등의 머리를 베어 왔다. (1597년 10월 16일)

그는 전쟁의 참화를 입은 지역을 지나다가는 백성들의 참담한 삶을 보고는 그들에 부과된 노역을 면제시켰다. 또한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할 때 우리나라 여자들에게 떡과 음식물을 이고 오게 한 담당 군관과 색리는 물론 그것을 명한 경상 수사까지 처벌하기도 했다. 명나라 군사들로부터 우리나라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적 죽이는 것보다 백성 살리는 게 먼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군사들에게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을 찾아내 생환시키는 것도 일본군의 목을 베는 것과 같다며, “왜선을 불사를 때에는 각별히 찾아서 구해내고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했고 약속하게 했다. 그래서 이순신의 부하들은 1차 옥포 승첩에서는 우리나라 소녀 2명, 2차 당포·당항포 해전에서는 6명의 백성을 구출했다. 육지에 올라 웅거하는 적들을 화공전술로 공격하려다 일본군이 분풀이로 산속에 숨어 피난해 있는 우리 백성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공격을 중지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수군이 일본군에 크게 승리하자 피난민들은 울부짖을 정도로 기뻐했다. 조선 수군의 배를 타고 이순신의 진영으로 피난하고자 하는 피난민에게 다 태울 형편이 못되고, 우선적인 임무인 일본군 토벌을 위해 당장은 진영으로 데려갈 수 없다며 “돌아올 때 데려갈 예정이니 각각 잘 숨어서 적에게 들키지 말고 조심해 붙잡히지 말라”고 설득하고 당부했다.

그들의 안전을 안타깝게 걱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남겨두어야 했기에 2차 당포·당항포 해전에서는 식량이 떨어진 피난민을 살리기 위해 적에게 노획한 쌀과 포목 등의 물건을 고루 나누어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담당 지역 관리에게 “피난민을 끝까지 찾아 구호”하라고 지시했다.

눈물 씻어주는 배려로 백성 마음을 얻어라!

이순신의 그런 관심과 배려는 이순신의 수군이 움직일 때마다 수백 수천 명의 백성들이 항상 따라다니게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순신은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백성들이 안전한 곳에서 정착하고, 먹고 살 수 있도록 고민했고, 해결책도 만들어냈다. 조정에 요청해 순천의 돌산도와 흥양의 도양장, 해남의 황원곶, 강진의 화이도 등의 정부 목장에 백성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 주었다.

또한 조정에서 임명해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는 목장 감독관이 목동들을 학대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줄 것을 청원했다. 이순신의 백성보호 정책과 따뜻한 마음은 생존을 위해 일본군에게 투항했던 백성들의 다시 마음을 움직여 조선 수군 진영으로 귀향케 하는 효과도 만들어냈다.

△ 안골포 사람으로 왜적에게 붙었던 230여 명이 왔는데 배의 수는 22척이라고 우수가 와서 보고 했다. (1595년 9월 26일)

이순신은 죽음을 면하고 백의종군을 하던 길에서조차 백성들을 먼저 배려했다. 전쟁터로 이동 중이던 이순신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정혜사 승려 덕수는 이순신을 위해 미투리 한 켤레를 바쳤다. 그러나 이순신은 거절했다. 백성의 땀과 눈물이 밴 물건을 덥석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수는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준 이순신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미투리 한 켤레라도 바치고 싶어 이순신을 두세 번 이나 다시 찾아가 바쳤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덕수의 정성을 알고는 공짜가 아니라 미투리 값을 주어 보냈다.

의승장 처영도 찾아와 부채와 미투리를 바치자 이순신은 다른 물건으로 갚아주었다. 의승장이었기 때문에 승려 덕수처럼 몇차례나 거절하지는 않고, 물건을 받자마자 답례로 성의를 표시했다. 그는 또 자신을 수행하는 노비들에게는 백성들이 지어주는 밥을 공짜로 얻어먹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다.

그런데도 노비들이 백성들에게 얻어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노비들을 단호히 혼내고, 밥을 준 백성에게 쌀로 돌려주었다. 이순신은 백성이 만든 미투리 한 켤레, 쌀 한 톨까지도 귀하여 여겼다.

그런 이순신이었기에 이순신이 체포되어 한양으로 끌려 갈 때 백성들은 울부짖으며 “대감 어디로 가시오. 이제 우리들은 다 죽었습니다”라고 했다. 원균의 패전 소식이 전해진 뒤에는  이순신을 보기 위해 달려 나와,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며 군사와 백성, 관리들이 모두 울부짖었다. 노인들은 길게 줄을 서 다투어 술병을 바치며, 이순신이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조선 수군은 엄청난 패전으로 완전히 몰락했다. 그러나 백성과 군사들은 이순신을 믿었기에 가족들을 뒤로한 채 이순신을 따라나섰다. 패전 상황을 점검하려고 처음 길을 떠났을 때는 9명에 불과했던 수행원들이 순천에서는 60명, 보성에서는 120명으로 불어났다. 이순신 휘하에서 근무를 했다가 흩어졌던 군관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인물들이 이순신을 돕기 위해 찾아왔다.

이순신은 백성이 나라라는 믿음을 실천했고, 백성들은 쌀과 목숨으로 이순신과 같은 길을 걸어갔다. 이순신은 자신을 믿고 의지했던 백성과 함께, 자신이 솔선수범하면서 전쟁을 했고 언제나 승리했다. 백성이 믿게 만드는 힘은 리더의 하루 하루, 리더의 한 마디, 리더의 실천에 달려있다.

※ 이 칼럼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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