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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판하는 상대와도 소통하라!"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⑧
홍준철 기자  |  mariocap@ilyoseoul.co.kr [1021호] 승인 2013.11.25  10:25:21

편지는 시공을 초월하는 소통 도구
반대자를 설득시키는 진심을 담은 편지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인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이다. 그래서인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기울여 손으로 직접 쓴 편지는 구경하기 힘들다. 보내는 사람이 없으니, 받는 사람도 없다. 편지의 목적은 오늘날이 스마트폰을 이용한 문자나, 카카오톡, 혹은 이메일, 트위터, 페이스북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와의 소통이 목적이다. 다만 오늘날은 그 속도가 실시간이고, 수신대상도 마음먹기에 따라 무한대로 넓힐 수도 있는 위력적인 수단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하고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와 달리 이순신 시대에는 편지가 대면 접촉을 제외한 유일한 직접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소통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글을 종이에 적고 사람이 직접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걸렸고 불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편지만큼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훌륭한 도구도 없었다.

한 번에 14통의 편지를 쓴 이순신

소통을 중요시했던 이순신이었기에 《난중일기》에도 편지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순신은 가족은 물론 지인, 조정의 고위관료 등과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백의종군 중에는 한번에 14통을 쓰기도 했다.

▲이른 아침에 노비 경과 노비 인을 한산도 진영으로 보냈다. 전라 우수사(이억기), 충청 수사(최호), 경상 수사(배설), 가리포 첨사(이응표), 녹도 만호(송여종), 여도 만호(김인영), 사도 첨사(황세득), 배 동지(흥립), 김 조방장(완), 거제 현령(안위), 영등포 만호(조계종), 남해 현감(박대남), 하동 현감(신진), 순천 부사(우치적) 등에게 편지를 보냈다.  (1597년 6월 12일)
 
▲류상(류성룡), 참판 윤자신, 지사 윤우신, 도승지 심희수, 지사 이일, 안습지, 윤기헌에게 편지를 썼다.
 
(1593년 9월 4일)
 
▲단옷날 진상 물품을 봉하는 것을 감독하고, 곽언수에게 주어 보냈다. 영의정, 영부사 정탁, 판서 김명원, 윤자신, 조사척, 신식, 남이공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1596년 4월 15일)

이순신이 편지를 쓴 기록을 살펴보면, 대부분 한 번에 최소 3통 이상의 편지를 썼다. 사람이 직접 배달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그는 배달해 줄 사람이 있을 때는 가급적 그 배달해 줄 사람의 도착지에 사는 자신과 관련된 여러 사람에게 한꺼번에 편지를 썼다.

편지, 지혜를 나누는 수단

▲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군관들이 활을 쏘았다. 저녁에 서울에 갔던 진무가 돌아왔다. 좌의정 유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이 책을 보니 수전(水戰), 육전(陸戰)과 화공법 등에 관한 전술을 일일이 설명했는데, 참으로 만고에 뛰어난 이론이다.  (1592년 3월 5일)
 
▲영의정의 편지도 가지고 왔다. 이에서 밤낮으로 염려하며 애쓰는 일을 들으니 감개함과 그리움이 어찌 다하랴.       (1594년 2월 12일)

이순신의 편지와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된 사람은 영의정 류성룡이다. 이순신이 류성룡을 명시해서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대략 15회 정도가 나온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정읍현감에 추천했고,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이순신의 지기지우(知己之友)이다. 이순신과 류성룡의 편지 소통은 친구관계 그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은 전쟁 중에 수시로 편지를 교환하면서 서로의 상황을 전하고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이순신이 진중에서 실시한 둔전(屯田)이나 소금 제조 정책은 류성룡과의 소통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이순신은 류성룡이 보내온 병법책인 《증손전수방략》을 읽고 찬탄하기도 했고, 류성룡의 편지를 받고 감동하기도 했다. 류성룡의 지혜와 격려가 담긴 편지는 이순신이 승리를 할 수 있고, 이순신이 최전선에서 경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지혜의 보고가 되었다. 또한 그와 반대로 류성룡도 이순신을 통해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현장에 필요한 문제들을 인식해 조정의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현장 정보의 원천이 되었다.

평상시의 소통이 위기를 극복 해법

▲곽언수가 도승지 심희수와 윤자신과 좌의정 윤두수의 답장을 갖고 왔고, 윤기헌도 안부를 보내왔다.
 (1593년 7월 6일)
 
▲영의정과 병판 심충겸, 판서 윤근수 앞으로 편지를 썼다. (1594년 7월 24일)
 
▲강돌천이 찬성 정탁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1594년 2월 4일) 
 
▲영의정, 우의정(정탁)의 편지와 자임(이축) 영공의 답장이 왔다. (1595년 4월 12일)

그러나 이순신은 자신의 벗이고 후원자였던 류성룡만 편지로 교류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정의 고관들, 특히 서인(西人)으로 이순신을 모함했다고 알려진 좌의정 윤두수, 판서 윤근수 형제와도 편지로 소통했다. 이순신이 삭탈관직을 당하고 한양에 압송되어 사형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순신을 변호하는 <신구차(伸救箚)>를 선조에게 올려 이순신의 목숨을 구한 우의정 정탁과도 그 이전부터 편지로 교류했다.

편지 만이 아니라 정(情)까지 담아라

이순신에게 편지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였다. 이순신이 편지를 교환한 사람들 중에는 후원자는 물론 적대자도 있었다는 것은 그가 편지를 한 목적을 말해준다. 그는 진중 경영을 위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관철하기 위해 적대자에게 조차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소통했다. 또한 편지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마음을 담은 정표(情表)라며 선물도 함께 보내 상대가 진심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영의정 유성룡에게 편지를 보내며 유자를 함께 보낸다든지, 내륙에 있는 고위 관료들에게 바다의 전복을 보낸다든지, 선물용으로 많이 쓰였던 부채를 보내기도 했다. 이순신의 선물은 상대를 이용해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오늘날의 뇌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말처럼 정표(情表)였다. 전쟁중에 백성을 살리고 승리를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랫사람들이 보내 온 선물은 자신이 소유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나눠주었다.

▲1597년 5월 17일. 고성 현령이 군관을 보내 문안하고, 또 약술(秋露酒)과 소고기 음식 한 꼬치와 꿀통을 보냈다고 한다. 상중(喪中)이라 받아 두는 것이 미안하지만, 간절한 심정으로 보낸 것을 의리상 되돌려 보내낼 수 없으므로 군관들에게 주었다.

정성과 진심이 담긴 글이라면 장문의 이메일이든, 단문의 문자 메시지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이순신이 오늘날 태어났다면, 가장 첨단의 의사소통 도구인 트위터는 물론 문자의 달인이 되었을 것이다. 크고 작은 소통을 위한 가장 간편하고 신속한 도구인 문자메시지와 메일을 잠재우지 마라.

※ 이 칼럼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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