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snfqZM
패수
연(燕)·한(漢)과 조선의 국경으로 나타나고 있는 강의 이름
고대 조선어의 강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생각되는데, 『사기』와 『한서』등에 나타난 패수(浿水)는 연(燕)·한(漢)과 조선의 국경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위치는 요동의 혼하(渾河)로 추정된다.
전문정보
각 시대의 여러 사서에 패수가 등장하고 있는데, 패수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고대 조선어의 강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고 할 수 있다.(리지린, 1963) 또한 고대인의 거주지 이동에 따라, 옮겨 살기 이전 지역의 명칭을 새로운 정착지의 지명으로 계속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특정 시기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연관된 지명으로서의 패수는 특정한 하나의 강이 되어야 한다.(노태돈, 2000)
『삼국유사(三國遺事)』권2 기이1 위만조선조에 인용된 『한서』조선전과 『사기』조선전의 패수(浿水)는 한(漢)과 조선의 국경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위만(衛滿)의 망명과 한(漢) 무제(武帝)의 조선침공 및 한사군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은 진의 요동외요에서 후퇴하여 연의 요동고새를 수리하여 『사기』의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였다. 『위략』에 의하면 위만은 패수(浿水)를 넘어 진의 옛 땅인 상하장이 설치된 곳에 살았다고 하였으니, 이때의 패수(浿水)는 연과 조선이 국경을 이루었던 강이다. 한편, 『염철론(鹽鐵論)』에서는 연의 요동영토를 점령한 진이 패수(沛水)를 넘어 조선을 침략했다고 했으니, 패수(沛水)도 연과 조선의 경계가 되는 강이다.
패수(浿水)의 위치에 관해서는 대동강설(大同江說), 청천강설(淸川江說), 압록강설(鴨綠江說)이 있고, 요동방면설로는 난하설(灤河說), 대릉하설(大凌河說), 혼하설(渾河說) 등이 제시되고 있다.(오강원, 1998) 그러나 『사기』의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 패수(浿水)는 연(燕)의 장새(障塞)인 요동고새(遼東故塞)와 진고공지(秦故空地)인 요동외요(遼東故塞) 사이의 강이다. 연의 동방진출 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만번한(滿番汗)이 자연계선이라면, 패수(浿水)은 이와 병행하는 강이 된다. 만번한이 천산산맥(天山山脈) 주변의 지명에 비정되므로 고조선(古朝鮮)의 중심 이동과 관계없이 패수(浿水)는 요동지역의 강일 가능성이 높다.(조법종, 2006)
이에 『사기』조선전의 패수(浿水)와 『염철론』의 패수(沛水)를 같은 강으로 보면서, 패수(沛水)가 만번한에 인접한 요동지역의 강이고, 조선이 진의 요동외요를 공략한 뒤 한과 패수를 경계로 하였으므로, 만번한이나 진의 요동외요의 위치로 보아 이에 인접한 소요수(小遼水)와 태자하가 만나는 소요수 본류, 즉 오늘날의 혼하(渾河) 하류가 패수로 비정된다는 견해가 있다.(서영수, 1996)
이밖에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서도 요동군(遼東郡) 번한현(番汗縣)에 패수(沛水)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서』의 패수(沛水)는 요하(遼河) 하류역 남쪽에 위치한 작은 강이라는 점에서, 위만조선의 서쪽 경계였던 패수(浿水)로 보기는 어렵다.
좌장군이 조선의 패수 서쪽 군대(朝鮮浿水西軍)를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에 보이는 패수서군(浿水西軍)이나 패수 위쪽 군대(浿水上軍)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군사편제로 인식하면서 위만조선에 고도로 편제된 군사조직 체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란 견해가 있다. 그러나 패수서군(浿水西軍)을 문맥상“군(軍)”자를 “조선(朝鮮)”자 뒤에 배치하여 “좌장군이 조선군을 패수 서쪽에서 쳤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군은 한군(漢軍)의 선발부대를 첫 전투에서 격파한 후 패수 서쪽으로 진격하여 좌장군의 군대와 싸우게 된 것이다. 아울러 패수상군(浿水上軍)도 “패수 위의 군사”나 “패수 상류군”으로 해석한다. “상(上)”에는 “변측(邊側)”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패수상군(浿水上軍)의 “패수상(浿水上)”을 “패수가”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좌장군이 패수가에서 조선군을 격파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다.(이도학, 2002)
참고문헌
리지린, 1963, 『고조선 연구』, 사회과학출판사.
서영수, 1996, 「衛滿朝鮮의 形成過程과 國家的 性格」『古朝鮮과 扶餘의 諸問題』, 신서원.
오강원, 1998, 「古朝鮮의 浿水와 沛水」『江原史學』 13․14合.
노태돈, 2000, 「고조선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이도학, 2002, 「古朝鮮史의 몇 가지 問題에 관한 再檢討」『東國史學』 37.
조법종, 2006, 『고조선 고구려사 연구』, 신서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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