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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외요

진(秦)나라 때에 요동(遼東) 바깥에 세운 요새로, 천산산맥에서 압록강 일대에 이르는 땅으로 생각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1 위만조선조에 인용된 『한서』 조선전의 기사를 살펴보면, 연나라 전성기 때에 진번조선을 경략하여 복속시키고 장새(障塞)를 쌓았으며, 진(秦)이 연(燕)을 멸망시킨 후에는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고 하였다. 한(漢)이 건국되고 나서는 그곳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를 삼아 한의 제후국인 연에 복속시켰다고 하였다. 여기서 진개의 침공으로 조선이 서방의 많은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을 경계로 접경하였으므로, 장새를 축조한 곳은 만번한인 요동의 개평 방면으로 추정된다. 이후 진은 세력을 확장하여 요동 바깥에 그 전초기지인 요새를 설치하였고, 한(漢) 때에는 동쪽 영역이 요동고새(遼東故塞)인 연나라 때의 장새로 후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만은 조선으로 망명할 때, 동쪽으로 달아나 연나라 때의 장새를 나와 패수를 건넌 후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에 거주하였다. 이를 통해 살펴보면, 새(장새, 만번한)→패수→진나라의 옛 공지인 상하장(요동 바깥 요새)의 순서로 배치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한서(漢書)』 권93 영행전(佞幸傳)에서 안사고(顔師古)는 “새(塞)”가 동북의 요새임에 비해 “요(徼)”는 이적(夷狄)을 막기 위해 강가에 설치한 서남쪽의 요새를 의미하는 용어라고 하였다. 『염철론(鹽鐵論)』 권7 비호(備胡)편의 “조선(朝鮮)이 요(徼)를 유린하였다”는 사료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요동외요(遼東外徼)는 후대의 요동군치(遼東郡治)인 양평(襄平)이 아닌가 생각되며, 연 장성의 동단은 “요(徼)”의 동북에 있었던 “새(塞)”인 요동고새(遼東故塞)로서, 오늘날의 심양에서 무순 부근으로 생각된다.(서영수, 1988)

진이 요동에 진출한 것은 연의 수도 계(薊)를 공략한 4년 뒤인 기원전 222년의 일인데, 『염철론』 권8 벌공(伐攻)편의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 동쪽으로 패수(沛水)를 넘어 조선을 멸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진은 연과 고조선을 동시에 친 것이 아니라 제를 멸하여 천하를 완전히 통일한 뒤 이미 점령한 연의 요동에서 국경선인 패수를 넘어 고조선을 친 것이다. 따라서 진이 요동외요를 건설한 해는 기원전 221년 이후이며, 여기에서 진이 연보다 후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조선 지역으로 더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이 요동외요를 건설한 목적도 단순히 연의 고지를 소속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연의 요동과 진이 새로 획득한 고조선의 서부영토를 함께 관할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진의 요동진출이 고조선에 큰 위협이 된 것은 사실이니, 『위략』에 의하면 당시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복속할 것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중원의 통일제국 진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내 조회(朝會)에 응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고조선의 국력도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도 이러한 고조선에 대하여 더 이상의 침략을 포기하고, 고조선으로부터 새로 빼앗은 땅에 이중의 요새(상하장)를 쌓아 고조선의 반격에 대비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고조선은 이 과정에서 연과의 경계선이었던 만번한, 즉 패수(沛水)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고조선이 진에게 상실한 영역은 대체로 만번한이 위치한 천산일대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땅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진·한의 교체와 흉노의 등장에 따른 대륙정세를 이용하여 요동의 고토 일부를 수복하고 다시 대한(對漢) 강경외교책으로 전환한다.(서영수, 1996)

이후 위만이 전란의 위협을 피해 무리 천여인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는데, 그가 정착한 지역도 진(秦)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이었다.

최근 요서지역에서 발견된 연(燕)과 진(秦) 시대의 장성은 남북으로 약 40km의 사이를 두고 병행 설치되어 있음이 확인되고 있는데, 상하장은 혹 이러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는 연북장성은 부신(阜新) 북쪽에서 시작해 창무․법고를 지나 개원에 이른다고 보고, 이후 장새(障塞), 즉 요새나 초소 같은 것이 동남쪽으로 무순의 동쪽을 지나 본계의 동쪽을 거쳐 관전의 북쪽에 이르며, 최종적으로는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북부 용강에 이른다고 한다. 이 견해를 수용하여 『사기』에 보이는 요동고새와 『위략』에 나오는 진고공지(秦故空地) 상하장(上下障)의 장새가 이러한 것을 말한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요동 지역에 있는 한대 및 한대 이전의 장성 관련 흔적은 주로 천산산맥 서쪽 지역에서 나오고 있으므로, 장성의 실질적인 동쪽 경계선은 천산산맥 일대로 생각된다.(송호정, 2003)


참고문헌

서영수, 1988, 「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2, 일조각.
서영수, 1996, 「衛滿朝鮮의 形成過程과 國家的 性格」『古朝鮮과 扶餘의 諸問題』, 신서원.
송호정, 2003,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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