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30&fileName=kn_074_0030.pdf
*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이도학" 중 "Ⅱ.고조선의 성장과 교통로 - 1.고조선과 중원대륙과의 교섭로" 을 가져왔습니다.
주석
*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이도학" 중 "Ⅱ.고조선의 성장과 교통로 - 1.고조선과 중원대륙과의 교섭로" 을 가져왔습니다.
고조선과 중원대륙과의 교섭로
이도학 1997년
우리 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위치에 관해서는 크게 3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즉, 당초에는 요동 지역에 존재하였으나 평양 방면으로 이동해 왔다는 이동설, 요동 일대에서 성립되어 그곳에서 멸망했다는 요동 소재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이 평양 지역이었다는 학설로 나뉘어진다. 이러한 학설 가운데 첫번째 견해가 타당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10) 왜냐하면 요동 지역에 고조선이 도읍했던 흔적과 관련한 지명이 지리서에 남아 있다는 것과, B.C.4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燕나라 장수인 진개(秦開)의 동방경략(東方經略)으로 고조선은 서방 2천여 리 혹은 1천여 리의 땅을 잃고 그 영역이 크게 퇴축(退縮)되었다는 점이다.11) 게다가 사기 이전에 편찬된 각 문헌에서 고조선의 위치를 요동(遼東)이나 그 이서(以西) 지역으로 설정하게 하는 기사들이 보이고 있다. 요컨대 고조선 수도의 위치에 관한 기록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는 것은, 그 영역(領域)의 가변성(可變性)을 의미하는 증좌라고 하겠다. 본고에서는 고조선의 당초 성립지를 지금의 요동이나 요서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에는 찬동하지만, 그 중심지의 구체적인 위치에 관해서는 논의를 유보하고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언제부터 고조선과 중원대륙간의 교섭이 시작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요서 조양 육가자 서주(遼西 朝陽 六家子 西周) 전기의 고분에서 발굴된 청동제 거여구(車輿具)는 중원대륙에서 출토된 은(殷)․주(周)시대의 그것과 다르지 않는데, 운송(運送) 수단으로서 수레의 등장과 더불어 중원대륙과의 활발한 교통왕래를 시사해 준다. 역사책에 의하면 숙신과 고조선으로 추정되는 도이(島夷), 동이(東夷)․도하(屠何)․고죽(孤竹) 등이 중원대륙과 왕래가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숙신에 관해서는 좌전(左傳)과 국어(國語)에서는 주 무왕(周 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나자, 호시(楉矢)와 석노(石砮)를 조공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석노는 지금 동북류 송화강((東․北流松花江) 중․하류 및 목단강 유역에서 출토되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의 목단강 유역에 거주하였던 숙신이 B.C.1세기 이래로 중원대륙과 왕래가 있었다는 점과, 목단강 유역에서부터 주(周)의 수도인 호경(鎬京)에 이르는 장거리 교통망이 확보되었음을 알려준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요서 지방의 대소릉하(大․小凌河) 하류를 돌아 서쪽으로 가서 여올하곡(女兀河谷) 상류를 따라 육전하곡도(六股河谷道)에 진입한 후 바다에 근접하여 서남쪽으로 가서 유관(渝關)과 노룡(盧龍) 등지의 고죽(孤竹)과 영지 고성(令支 故城)을 지나 연(燕)과 진(晋)의 영역에 진입한다. 그런 연후에 동쪽으로 돌아서 산동의 제 고지(齊 故地)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역사책에 수록된 요서의 바다에 근접한 육로(陸路)로서, 선진(先秦)시대에 “도이(島夷)가 황하((黃)河)에 이르고”,제 환공(齊 桓公)이 북쪽으로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고죽(孤竹)을 베고 도하(屠何)를 격파”한 이래로 진(秦)과 한대(漢代) 이후까지의 주요한 교통로였다.12)
고조선은 이같은 숙신의 조공도를 중원대륙과의 교통로로서 십분 활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은 B.C.7세기 경 무렵에는 지금의 산동반도 일원에 자리잡고 있던 제(齊)와 교역한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다음의 기사가 그것이다.
발․조선(發․朝鮮)이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호표(虎豹)의 피(皮)와 털 벗긴 피복(皮服)과 같은 그들의 특산물을 폐물(幣物)로 바치게 하고 그 대가를 주는 조건으로 입조(入朝)케 함이 어떠하오리까.13)
발․조선(發․朝鮮)이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호표(虎豹)의 피(皮)와 털 벗긴 피복(皮服)과 같은 그들의 특산물을 폐물(幣物)로 바치게 하고 그 대가를 주는 조건으로 입조(入朝)케 함이 어떠하오리까.13)
위의 기사에 보이는 ‘발․조선’은14) 제(齊)에 하복(不服)한 지역으로서, 이때는 제환공(齊 桓公)(B.C.685~643)이 연(燕)의 청원으로 북방의 영지(令支)와 고죽(孤竹) 등을 정복한 시기이다. 제(齊)는 이때 고조선과의 교역을 갈망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는 고조선의 이해와도 맞아 떨어졌으므로 이러한 제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무렵 양국간에 교역로가 상설되었음을 뜻하는데, 그 중간에 연(燕)이 소재하고 있었지만 제(齊)의 세력이 강대하였던 만큼 당초에는 육로를 통한 교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산융(山戎)이 연(燕)의 영역을 넘어 제(齊)를 쳤다고한 바15) 고조선과 제(齊)와의 교류도 연(燕) 지역을 통과하는 육상교통로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해 준다. 그러나 연(燕) 세력의 증대에 따라 양국간의 교역은 폐쇄되었다기 보다는 육로 대신 해로를 선호(選好)하였을 가능성을 짚어준다. 지금의 요동반도 남단(南端)의 신금현(新金縣) 북쪽 화올산(花兀山)에서 전국시대부터 한대(漢代)에 걸치는 고성(古城)을 발굴한 바 있다. 이곳은 전국시대 요동군 치소인 양평(襄平)으로부터 남쪽으로 해로(海路)를 통해 산동반도에 소재한 제(齊)에 왕래할 수 있는 수륙(水陸)의 요충지였다.16) 그러므로 이 지역은 전국시대 이전부터 고조선과 제(齊)간의 교섭지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해 준다. 즉, 발해만을 사이에 두고 고조선과 제(齊) 사이에는 교역이 진행되었다. 그럼으로써 고조선은 연(燕) 대한 견제도 어느 정도 가능하였으리라고 믿어진다.
고조선은 정치적으로 볼 때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에 따라 연(燕)을 견제하는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제(齊)와 같은 중원 내륙의 물산을 섭취하는 호기(好機)로 이용했을 것이다. B.C.4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고조선의 최고 지배자가 ‘王’을 칭하였을 뿐 아니라, 연(燕)으로부터 “잔인하고 교만하다”17)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하였을 정도로 고조선이 강성하였던 토대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구축되었음을 알게 된다.
한편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요동반도 일대와 한반도의 서북 지역에는 B.C.323년경에 주조(鑄造)된 이도전(易刀錢)이라는 연(燕)의 화폐가 대량 출토된 바 있다. 한 유적에서 수백, 수천닢씩 무더기로 출토된 적도 있는데18) 고조선과 연(燕)과의 교역이 활발했음을 뜻하는 동시에,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는 교통로의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 진개의 동방진출19) 이후 연(燕)은 조양 차하르성 회래현(造陽 察哈爾省 懷來縣)에서 양평(襄平:요녕성 조양현 북쪽)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였고,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서(遼西)․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였는데, 인접한 각 군(各 郡)간에는 교통로가 확보되어 있었다.20) 그와 동시에 요서 지역과 요동의 양평을 지나 동쪽으로 가면 지금 압록강 유역에 이른다. 이곳은 선진(先秦)시대부터 개척되어 전국시대의 연(燕)과 진대(秦代)에 이르러서는 요동군에 속하였는데,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에 이르는 주요한 교통로였다. 다음의 기사가 그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처음 전연(全燕) 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경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障塞)를 쌓았는데, 秦이 연(燕)을 멸망시키자 요동(遼東) 밖 요(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나자 그곳은 멀어서 지키기 어렵자 다시금 요동(遼東)의 고새(故塞)를 수리하여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21)
주석
9) 대현산성 답사기 (고고민속 196).
10)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論考가 참고된다.
李鍾旭, 古朝鮮史硏究(193).
徐榮洙, 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한국사 시민강좌 2, 198).
盧泰敦, 고조선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 (韓國史論 23, 190).
11) 史記 권8, 蒙恬傳 및 三國志 권30, 韓 條.
12) 王綿厚․李健才, 東北古代交通(190) pp.6~13.
13) 管子 권23, 輕重甲 第80.
14) 위의 기사에 보이는 ‘發朝鮮’을 ‘밝朝鮮’ 혹은 ‘發’과 ‘朝鮮’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런데 大戴禮記 五帝德篇에 의하면 “文王卒受天命…民數通 于四海海外之肅愼 北發來服”라고 하였듯이 ‘發’은 고조선과 구분되는 독립된 세력으로 보는 게 옳다.
15) 史記 권10, 匈奴傳.
16) 王綿厚․李健才, 앞의 책, p.15.
17) 三國志 권30, 韓 條.
18) 조선전사 2(191) pp.102~104.
19) 燕은 滿潘汗을 경계로 고조선과 대치하였다고 하는데, 그 界線은 중국 요녕성 蓋平에서 搏川江을 연결하는 구간으로 설정하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 史學硏究 26, 1975;古朝鮮․三韓史硏究, 1989, pp.157~165).
20) 王綿厚․李健才, 앞의 책, p.14.
21) 史記 권15, 朝鮮傳. 필자는 패수를 압록강으로 지목하는 丁若鏞의 견해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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