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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 제3부 고조선인의 ‘마사다 요새’인 성자산성" 중 "성자산성" 내용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대전자 토성의 깨진 중국어 안내석

[250매 초대형 프로젝트]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단군 어머니 웅녀(熊女)의 자취, 우하량 곰뼈를 찾아라
▼ 제3부 고조선인의 ‘마사다 요새’인 성자산성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com  2008.04.01 통권 583호(p328~368) 


서기전 2000여 년에 축조된 대전자 토성 안쪽에 세워진 안내석. 몽골어로 쓰인 것은 그대로 서 있으나 중국어 안내석은 누군가가 산산조각을 내놓았다(왼쪽). 뼈대로 박아놓았던 나무가 썩어서 생긴 대전자 토성의 구멍을 살펴보는 답사단.

대전자 토성의 깨진 중국어 안내석

하가점 하층 문화 시절 돌성만 쌓았던 것은 아니다. 몽골 초원에는 돌이 적다. ‘마사다 요새’로 활용하려는 산성은 이곳저곳에 있는 돌을 모아 단단히 지어야 한다. 하지만 평상시의 생활공간은 이렇게 만들 수 없다. 흙으로 방어벽을 쳐야 한다.

적봉시 오한기의 대전자향(大甸子鄕)이라는 마을에는 서기전 2000년에 쌓은 토성(土城)이 있다. 평지에 쌓은 평원성(平原城) 개념의 토성인데 높이는 약 3m 정도다.

 

콘크리트 건물은 강도를 높이는 뼈대 역할을 하기 위해 철근이나 철골을 집어넣는다. 같은 개념으로 흙으로 짓는 건축물에는 나무를 집어넣는다. 일부가 무너져내린 이 토성에서는 뼈대로 박아 넣은 나무가 썩어 생긴 작은 구멍을 볼 수 있었다.

이 토성 안쪽에는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지금은 옥수수밭만 펼쳐져 있다. 옥수수밭에서는 400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토기 파편을 주울 수 있었다.

대전자 토성에서 놀라움으로 다가온 것은 안내석이었다. 안내석은 몽골어와 중국어로 쓰인 것 두 개가 있었는데, 중국어 안내석이 둔기에 맞아 쪼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둔기를 휘두른 사람은 중국어 안내석의 기단도 쓸어뜨려 놓았다. 몽골어 안내석은 멀쩡히 서 있는데 중국어 안내석은 왜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일까.

이곳은 내몽고자치구다. 내몽고는 중국의 여러 자치구 가운데에서도 중국화가 가장 많이 진행된 지역으로 꼽힌다. 그러나 시골로 가면 아직 몽골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몽골은 한민족만큼이나 중국의 팽창 정책에 시달려왔다. 몽골인 가운데 대전자 토성은 중국과 관련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이 큰 망치를 들고 와 중국어 안내석을 때려 부순 것은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역사는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출처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13.html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5.html 
(지도)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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