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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 제3부 고조선인의 ‘마사다 요새’인 성자산성" 중 "성자산성" 내용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고조선인의 ‘마사다 요새’인 성자산성
*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 제3부 고조선인의 ‘마사다 요새’인 성자산성" 중 "성자산성" 내용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고조선인의 ‘마사다 요새’인 성자산성
[250매 초대형 프로젝트]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단군 어머니 웅녀(熊女)의 자취, 우하량 곰뼈를 찾아라
▼ 제3부 고조선인의 ‘마사다 요새’인 성자산성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com 2008.04.01 통권 583호(p328~368)
해발 800m인 성자산 정상에서는 주위를 쉽게 관찰할 수 있다(좌). 이곳에는 서기전 2000여 년에 만든 돌성과 제사터의 흔적이 있다(우).
출처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12.html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13.html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5.html
(지도)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com 2008.04.01 통권 583호(p328~368)
해발 800m인 성자산 정상에서는 주위를 쉽게 관찰할 수 있다(좌). 이곳에는 서기전 2000여 년에 만든 돌성과 제사터의 흔적이 있다(우).
감제고지 성자산의 무너진 돌성
적봉 중심지에서 오한기(敖漢旗)로 가다보면 살력파향(薩力巴鄕)과 마니한향(瑪尼罕鄕)의 경계를 이루는 곳의 산 꼭대기에 성이 있다고 하여 성자산(城子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산이 있다. 해발 500m 이상인 내몽고 고원에 있어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해발 높이는 800m쯤이라고 한다.
성자산을 찾아가기 위해 답사단은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성자산은 현지인들도 별로 찾지 않는 곳이라 그곳 지리를 아는 기사가 모는 차를 따로 빌렸다. 그런데도 찾지 못해 인근 동네 사람을 태워 길안내를 맡긴 다음에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었다. 성자산 밑에는 중국어와 몽골어로 된 안내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소백산 정상부처럼 풀만 자라는 성자산의 정상부는 바람이 매우 강하게 불었다. 몸을 10도 정도 기울여도 쓰러지지 않을 정도였다. 입 안으로는 바람에 날린 모래가 들어와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상부는 거대한 망루와 같아서 내몽골 초원과 여기저기 솟아오른 산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 산 정상부를 덮고 있는 것은 풀만이 아니었다. 한 줄기 띠 모양을 이루며 뻗어나간 검은 돌무지도 정상의 주인마냥 버티고 있었다. 이 돌무지는 강한 바람에 무너진 돌담이나 돌성의 흔적이다. 이 돌성 터는 1987년 중국 학자들이 발견해 2000년 조사가 이뤄졌다고 한다.
그 결과 이곳에는 각각 5개의 문을 가진 내성과 외성이 있었고, 내성 안에서는 제단터가 발견되었다. 이곳의 외성에서도 치의 흔적이 있었다. 성자산성의 총 면적은 6.6㎢인데 초기 청동기 문명인 하가점 하층 문화 시절인 서기전 2000년쯤에 축조됐다고 한다.
왜 초기 청동기인들은 내몽고 초원을 감제(瞰制)할 수 있는 고지에 산성과 제단을 만든 것일까. 이스라엘 사해(死海) 서쪽에는 ‘요새’라는 뜻을 가진 난공불락의 ‘마사다 성’이 있다. 마사다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맞서 항전하다 전원 분사한 곳으로 유명하다.
성자산 산성은 하가점 하층 문화를 만든 사람들의 ‘마사다 성’이 아니었을까. 평상시 하가점 하층 문화인들은 이곳에 올라 하늘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방어하기 좋고 사방을 감제하기 좋은 이곳으로 올라와 최후의 항전을 벌이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평야에서 생활하다 유사시 산성으로 올라와 항전하는 것은 고구려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채택된 방어책이다.
조선은 평지인 한양에는 도성(都城)을 쌓아 그 안에서 정치·경제생활을 했다. 그리고 한양 주변의 산에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등을 쌓아놓고 외적이 침입하면 그곳으로 도피해 항전했다. 왜 조선의 방어전략 원형이 내몽고 초원에서 발견되는가?
평지인 삼좌점의 석성과 산지인 성자산의 석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곳저곳의 돌을 모아 성을 쌓으려면 일을 시키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어떤 모양의 성을 만들 것인지 설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시키는 지배자와 일을 하는 피지배자가 있는 것이다. 곧 계급이 있었다는 의미다. 국가의 형태가 등장했으며 부계사회의 특성이 드러난 것으로 해석된다.
출처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12.html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13.html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5.html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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