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네 번째 이야기
12.05.04 10:46 l 최종 업데이트 12.05.04 11:25 l 김종성(qqqkim2000)
▲ <옥탑방 왕세자>의 세자 이각(박유천 분). ⓒ SBS
조선의 왕과 세자는 일종의 공개 오디션을 통해 배우자를 선발했다. 간택이라 불린 공개 심사에 지원한 처녀들 중에서 한 명을 뽑았던 것이다. 간택이란 것은 후보들을 궁궐 마루에 나란히 세워놓고 심사하는 것으로서, 조선 왕실이 창안해낸 전대미문의 제도였다.
간택에 대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반응 중에서 두 가지는 사극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하나는, 간택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에 나온 화용·부용 자매의 집안이 이에 해당한다.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한 이 집안에서는 처음에는 동생인 부용(한지민 분)을 세자빈 후보로 추천했다. 하지만 언니인 화용(정유미 분)의 계략에 의해 부용이 안면 화상을 당하자, 집안에서는 할 수 없이 화용을 추천하여 세자빈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적극성을 보인 집안은 극히 드물었다. 왕실과 거래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파워를 보유한 가문들이나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화용·부용의 집도 그런 가문이었다.
또 하나는, 간택을 기피하는 것이었다.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허연우(한가인 분) 가문이 보인 반응이 이에 해당한다. 연우의 부모는 자기 딸에게 간택에서 떨어지는 '비법'을 가르쳐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우 부모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간택 참가비용이 혼수비용과 맞먹거나 상회했던 데다가,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었다가 자칫 정치적 격랑에 휩쓸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두 가지 반응과 달리, 사극에서 소개되지 않는 제3의 반응이 있다. 그것은 간택제도 자체에 대한 불쾌감이다. 간택에 적극 참가하는 가문이건 그렇지 않은 가문이건 간에, 간택 자체에 대해서만큼은 대체로 불쾌감을 품었다. 사대부 가문들의 분위기가 특히 그랬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는 율곡 이이의 간택 반대론을 포함해서, 간택에 대한 사대부들의 부정적 시각을 압축적으로 설명했다. 사대부들이 간택제도 자체를 반대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사대부가 간택제도 반대한 세 가지 이유
▲ 부용(한지민 분). ⓒ SBS
첫째, 사대부 아가씨들의 체면이 손상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꼭 사대부 가문의 딸이라야 간택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집안의 딸들이 주로 참가했기 때문에 그들의 체면 손상을 우려했던 것이다.
공개 오디션에서는 참가자가 심사위원들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을 포장할 수밖에 없다. 목소리도 평소와 달라지고, 행동도 조금은 가식적으로 바뀌게 된다. 사대부들은 자기 딸들이 그런 식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불쾌해했다. 사대부 가문의 체통이 깎인다고 판단한 것이다.
둘째, 신부 집안의 결혼 주도권을 침해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 권12에 따르면, 사대부들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행동하는 것이 예법'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신랑이 신부 쪽으로 찾아가는 것이 예법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여성이 남자가 사는 궁궐에 찾아가서 간택 심사를 받을 경우, 신랑 쪽이 결혼의 주도권을 쥘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한민족의 전통적인 결혼문화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한민족의 결혼문화에서는 신부 쪽이 주도권을 잡았다.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결혼식을 거행한 뒤 그곳에서 일정 기간 살다가 신랑 집으로 가던 풍습이 그 점을 증명한다.
5만원권 모델인 신사임당이 자기 고향인 강릉에서 율곡 이이를 출산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신사임당 부부는 신부 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를 출산한 뒤 신랑 집으로 갔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까지의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신부 쪽이 결혼식을 주도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신부 후보가 신랑 집(궁궐)에 가서 심사를 받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신랑 쪽에게 주도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간택이 예법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한마디로, '무(無)매너'의 제도로 본 것이다.
셋째, 군주는 현명한 아내를 얻으려면 온 천하를 다 뒤져야 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대부들은, 군주는 현명한 인물을 구하는 심정으로 현명한 아내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주문왕(주나라 문왕)과 강태공의 사례를 거론했다. 주문왕이 인재를 얻고자 천하를 떠돌다가 강태공을 어렵사리 발굴했듯이, 왕이나 세자도 그런 심정으로 배우자를 물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집에 앉아서 오디션을 열 것이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적극적으로 캐스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왕실에서 굳이 간택제도를 고집한 이유는?
▲ 화용(정유미 분). ⓒ SBS
이처럼 간택제도가 기존의 결혼풍속에 위반되고 사대부들의 반대를 받았는데도, 왕실에서 굳이 이것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왕실이 전대미문의 간택제도를 고안해낸 데는 일종의 콤플렉스가 작용했다.
태조 이성계를 위시한 조선 왕실은 정통성이 매우 취약했다. 신(新)왕조를 지지하는 선비들보다 그렇지 않은 선비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여론주도층인 선비들은 신하인 이성계가 주군인 고려 왕실을 배반한 것이 유교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건국의 군사적 기반인 이성계 군단이 주로 여진족 병사들로 구성되었다는 점도 이성계에게는 약점이었다. 이성계가 여진족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성계 군단이 고려 사회의 비주류인 여진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주류 세력을 기반으로 한 통치자가 주류 사회의 충성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림파라 불린 지방 선비들이 왕조에 협력하기 시작한 시점이 건국 100년 만인 15세기 후반이었으니, 초기의 조선 왕실이 얼마나 인기 없는 집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초기의 조선 왕실은 사소한 것에도 상처를 받고 과민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런 분위기를 입증하는 사례 중 하나가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 권9에 소개되어 있다.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왕이 된 뒤의 일이었다. 이방원은 이속이란 사람과 사돈을 맺기 위해 그 집에 사람을 파견했다. 그때 마침 이속은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왕의 사절이 방문했는데도 이속은 바둑을 멈추지 않았다.
왕의 사절이 방문 목적을 설명하자, 이속은 단칼에 퇴짜를 놓았다. 이속의 말은 한마디로 "결혼은 끼리끼리 해야죠"였다. 조선 왕실과는 결혼하기 싫다는 메시지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방원은 왕실이 무시를 당했다는 사실에 격노했다. 그는 이속의 집을 몰수하고, 그 집 자녀가 혼인하지 못하도록 엄금했다. 자존심이 상한 이방원은 "앞으로는 배우자 후보들을 불러놓고 심사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이 간택제도의 기원이라는 게 <성호사설>의 설명이다.
전대미문의 '무매너' 제도인 간택은 이처럼 조선 왕실의 콤플렉스가 낳은 산물이었다. 정통성이 약한 조선 왕실은 배우자 후보들을 자기 집에 일렬로 세워놓고 심사함으로써 왕실의 세를 과시하고 싶어 했다. "줄을 서시오!"라고 그들은 외쳐보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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