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55248
서울대 통합 논란... 조선이 더 '진보적'이네
[게릴라칼럼] 교육의 지방분권을 달성한 조선왕조
12.07.11 19:16 l 최종 업데이트 12.07.12 10:36 l 김종성(qqqkim2000)
▲ 서울교육박물관 벽면에 그려진 김홍도의 <서당>. 서울시 종로구 화동 정독도서관 구내에 있다. ⓒ 김종성
민주통합당의 교육개혁 플랜인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30개 국공립대를 하나로 묶고 신입생 선발 및 학위 부여를 공동으로 하자는 이 방안이 나오자마자, '무한경쟁 교육의 폐해를 줄일 수 있다'며 환영하는 쪽과 '서울대 같은 경쟁력 있는 대학을 없애는 꼴이 될 수 있다'며 반대하는 쪽으로 의견이 갈리고 있다.
민주통합당의 방안대로 전체 국공립대를 하나로 묶든, 기존 체제 속에서 지방대학을 강화하든 간에, 이 논쟁의 본질중 하나는 '어떻게 해야 교육의 지방분권을 달성할 수 있는가'여야 한다. 그런 지방분권이 달성될 수 있다면, 국공립대 통폐합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 시대가 조선시대보다 뒤처진 측면이 많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훨씬 더 좋은 교육을 받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조선시대를 능가하는 제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 교육은 과거시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과거시험 합격자들을 배출하고 그들에게 국가경영을 맡길 목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과거제도가 곧 교육제도였다. 따라서 과거시험에서 지방분권이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교육제도에서 지방분권이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시험은 문과·무과·잡과 등으로 나뉘었지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문과시험에서의 지방분권으로 우리의 논의를 집중하기로 하자. 문과시험은 두 단계로 구분됐다. 소과(小科)와 대과(大科)가 그것이다.
제1단계인 소과에 합격하면, 생원(고전 전문가) 혹은 진사(문학 전문가) 자격증을 획득했다. 생원·진사는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대과에 응시하거나 하급 관료가 되거나, 아니면 지방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제2단계인 대과에 합격하면, 고급 관료의 길을 걸었다. 관직에 취임하지 못한다 해도, 대과 합격만으로도 상당한 영예를 누렸다. 김동인의 1925년 작품인 <명문>에서 구한말 재상인 전성철이 '전 대과(大科)'라 불리는 것을 영광스러워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전성철의 입장에서는 '전 재상'보다는 '전 대과'라고 불리는 것이 기분 좋았던 모양이다. 대과를 통과하지 않고도 재상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대과 출신임을 강조해주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이다. 박사학위 소지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중국에서, 일부 교수들이 '○○대학 교수' 타이틀보다 '○○대학 박사' 타이틀을 명함의 윗부분에 진하게 표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당락 좌우 '거주지'가 큰 몫
▲ 조선시대 과거시험장 중 하나인 성균관 비천당.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있다. ⓒ 김종성
뻔한 질문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알고 보면 뻔하지 않은 질문이 있다. '과거시험의 당락을 좌우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이다. 물론 실력이 가장 중요했지만, 중요한 게 또 있었다. 그것은 거주지였다. 합격자 선정에 지역 할당제가 적용됐기 때문이다.
제1단계 시험인 소과는 초시(1차 시험)와 복시(2차 시험)로 세분되었다. 이 중에서 초시에 지역할당제가 적용됐다. 초시 합격자가 700명이었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한성에서 200명, 경상도에서 100명, 충청·전라도에서 각 90명, 경기도에서 60명, 강원·평안도에서 각 45명, 황해·함경도에서 각 35명을 선발했다.
지역할당제를 맹목적으로 고집할 경우, 자칫 우수한 인재가 탈락할 수도 있다. 당시 사람들도 그 점을 우려했다. 그래서 복시에서는 실력 순으로 200명을 추려냈다. 초시에는 지역할당제를, 복시에는 실력주의를 적용하는 절충적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문과시험 제2단계인 대과에는 생원·진사 자격증 소지자와 성균관 우수학생이 응시했다. 대과 초시에도 지역할당제가 적용됐다. 초시 합격자가 240명이었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성균관에서 50명, 한성에서 40명, 경상도에서 30명, 충청·전라도에서 각 25명, 경기도에서 20명, 강원·평안도에서 각 15명, 황해·함경도에서 각 10명을 선발했다. 2차·3차에는 실력주의가 적용됐다.
성균관에 50명, 한성에 40명이 배당됐다면 결과적으로 한성에 90명이 배당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립대학인 성균관은 전국 각지 출신의 학생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과거시험에 지역할당제를 적용한 것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의 주민들이 자기 고향의 교육기관을 외면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전국 각지가 가급적 균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야만 전국이 골고루 발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역의 인재를 국가경영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조선시대에는 중앙의 성균관뿐만 아니라 지방의 관립 향교나 사립 서원·서당이 비교적 골고루 발전할 수 있었다. 일례로, 화양서원(충북 괴산), 도산서원(경북 안동), 소수서원(경북 영주)처럼 유명한 교육기관들은 거의 다 지방에 있었다.
천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학교도 조선시대판 서울대학인 성균관이 아니라 지방 교육기관인 도산서원이 아닌가. 이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지방 교육기관이 강세를 보였다. 과거시험에서 지역할당제를 적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지방교육의 확산에 기여한 서원. 사진은 경기도 용인시 보라동 한국민속촌 구내에 있는 충현서원의 모습. ⓒ 김종성
그렇지만 한성 거주자가 지방에서 응시하면 한성 사람들만으로 합격자가 채워질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질문할지 모른다. 그런 위장전입에 대비한 조치가 태종 17년 윤5월 14일자(1417년 6월 28일)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다른 도에 가서 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왕명이 소개되어 있다.
지역할당제, 위장전입도 막았다
만약 지역할당제가 없어서 교육 기회가 중앙으로만 집중되었다면, 지방 사람들은 자식을 어떻게든 한성에 보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할당제가 보장됐기에 지방 사람들은 자기 지역의 교육기관을 믿고 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지역할당제가 없었다면, <춘향전>의 러브스토리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수험생인 이몽룡이 시험 직전까지 남원에서 춘향이와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은 지방에도 충분한 교육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이 중앙에 집중됐다면 이몽룡은 가족과 떨어져서 한성에서 공부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춘향이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문학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조선시대 문학작품에서 이몽룡 같은 지방 선비가 과거시험 보러 한성으로 떠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것은, 지방에서도 충분히 학업을 영위할 수 있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과거시험' 하면 '짚신 꾸러미를 메고 상경하는 선비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그만큼 교육의 지방분권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혼자서 사서삼경만 달달 외어도 합격할 수 있는데 어디서 공부하든 무슨 문제가 됐겠느냐고 생각하지는 말자. 수험생들 틈 속에서 출제경향을 파악하는 일은 조선시대에도 중요했다. 정권의 색깔에 따라 출제경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광조 시대에는 시험에서 정치개혁이 강조됐다.
이처럼 출제경향이 중요한데도 많은 선비들이 지방에서 공부했다는 것은, 지방 교육기관이 제구실을 해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교육의 지방분권이 잘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지방분권, 두가지 토끼를 잡다
이 같은 교육의 지방분권이 유익한 결과를 도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 가운데서 2가지만 살펴보자. 하나는, 한성을 포함한 여러 지역이 국가 경영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 영남파와 기호파가 정치와 학문을 주도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영남 지방과 기호 지방이 망라하는 지역은 지금의 경상남북도와 경기·황해·충청남북도에 해당한다. 서울특별시가 대한민국을 홀로 이끌고 가는 오늘날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또 하나는 지방의 역량이 왕조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는 건국 100년 만인 15세기 후반부터 체제 위기에 직면했다. <연산군일기>나 <중종실록>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홍길동 같은 반체제 운동가들이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15세기 후반부터 사회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 조선을 되살린 세력이 16세기 사림파였다. 16세기 후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구세력인 훈구파를 몰아낸 사림파는, 지방에서 공부하고 지방에서 기반을 잡은 중소지주 출신의 선비들로 구성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지방대학 출신들이 조선왕조를 살렸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이 16세기 후반의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동력 중 하나도 사림파였다. 새로운 지배층인 사림파가 지역민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기에, 그들이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의병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전국 곳곳에서 성장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훨씬 더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을 것이다.
사림파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의 지방분권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왕조가 15세기 후반의 체제위기와 16세기 후반의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500년이나 장수할 수 있었던 데는 교육의 지방분권도 큰 몫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머리(서울)가 몸의 대부분을 차지한 이상한 나라다. 그에 비해 조선은 몸 전체가 비교적 균형 잡힌 나라였다. 대한민국이 조선처럼 좋은 몸매를 가지려면, 서울과 지방의 교육 기회를 균등히 함으로써 전국 곳곳에서 훌륭한 인적 자원이 배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육의 지방분권은 대한민국을 건강한 나라로 만드는 비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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