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55852

사도세자가 과거시험 개혁이라니... 터무니없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비밀의 문> 아홉 번째 이야기
14.11.24 18:27 l 최종 업데이트 14.11.24 18:27 l 김종성(qqqkim2000)

▲  <비밀의 문>의 사도세자(이제훈 연기). ⓒ SBS

지난 주 방영된 SBS 월화 드라마 <비밀의 문> 17·18회에서는 사도세자가 혁명적 수준으로 과거시험 개혁을 추진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드라마 속에서 사도세자는 양반만 과거시험을 보는 일에 분노하며 모든 백성에게 응시 자격을 주는 개혁을 추진한다.

영조 임금과 보수파 노론당의 반발로 시험 개혁이 실패하자, 사도세자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다. 제2당인 소론당 영수의 지원을 받아 시험장 대문을 활짝 열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던 서민 출신 응시자들이 시험장 안으로 우르르 뛰어드는 장면이 <비밀의 문> 18회 말미에 방영됐다. 

사도세자가 과거시험 제도에 손을 댔다는 드라마 속 이야기는 실제 역사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더군다나, 드라마 속에서 사도세자가 추진한 일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혁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노비가 아닌 남자는 원칙상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특권층인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도 응시자격을 갖고 있었다.    

시험장 문 연 사도세자, 정말일까?

사실, 양반이란 개념 자체가 상당히 모호했다. 처음에는 무반(무관)과 문반(문관)을 합쳐 양반이라 불렸지만, 나중에는 양반에 필적하는 사회적 지위나 학문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까지 양반이라 불렸다. 

이렇게 양반 개념이 상류층이나 특권층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누가 양반이고 아닌지가 매우 불명확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지배층 범주가 명확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지역 유지들은 일종의 사교 클럽을 만들고, 이 클럽의 회원 명부에 등재한 사람들을 자기 지역의 양반으로 인정했다. 일례로, 경상도 안동에서는 이 지역 상류층이 조직한 진솔회에 가입한 사람들이 양반으로 간주됐다. 

물론 진솔회에서 양반으로 인정했다고 해서 그것이 법적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또 진솔회에서 양반으로 인정했다고 해서 중앙정부나 여타 지역이 그런 판단에 구속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양반만 과거에 응시하도록 한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발상은 애초 나올 수도 없었다. 마치 25세기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는 재벌같은 지배층에게만 사법고시·행정고시 응시 기회를 주었다"고 역사서에 기록하는 것처럼 웃기는 이야기다. 


▲  <비밀의 문>에서 방영된 과거시험 풍경. ⓒ SBS

양반 특권층만 과거에 응시한 게 아니라는 점은 <경국대전> 예전(禮典) 규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전은 <경국대전>의 일부로서 과거시험·학교·제사·외교 등에 관한 규정집이다. 아래에서 괄호로 묶인 부분은 해당 조문의 주석으로 딸린 규정이다. 

"문과시험은 통훈대부 이하(무과도 동일), 생원시험·진사시험은 통덕랑 이하만 볼 수 있다(수령은 생원시나 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다)." 

통덕랑이나 통훈대부 같은 것은 군대 식으로 말하면 중위·대위 등의 계급과 같은 것이고, 소대장·중대장 등의 보직과는 다르다.

위 규정에 따르면, 제1단계 시험인 소과(小科, 생원시+진사시)에는 정5품 통덕랑 이하이거나 지방 수령이 아닌 사람이 응시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요건에 해당되지 않으면 누구나 다 생원이나 진사가 되기 위해 시험을 볼 수 있는 셈이다. 물론 노비는 제외되었다. 따라서 노비가 아닌 이상은 누구나 다 응시자격이 있었다.

소과 합격자가 참여하는 제2단계 시험인 대과(大科)에는 정3품 통훈대부 이하만 응시할 수 있었다. 소과를 통과한 뒤에 어떤 이유로 통훈대부보다 높은 관직에 특채됐다면 대과 응시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과거시험, 노비 빼고 누구나 응시 가능

일정한 품계 이상의 관리들이 소과나 대과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과거시험을 통과하지 않고 특채된 현직 관리' 혹은 '품계가 낮은 현직 관리'들이 더 좋은 관직을 받고자 시험공부에 전념하게 되면 직무 집행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둘째, 현직 관리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그만큼 신진 인물의 등용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응시자격을 갖추었더라도 시험을 볼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결격 사유에 관한 규정 때문이다. <경국대전> 예전에 아래와 같은 규정이 있다. 

"죄를 지어 영구적으로 임용할 수 없게 된 사람, 부정부패를 범한 관리의 아들, 재혼하거나 품행을 상실한 부녀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의 자손인 사람은 문과시험과 생원시·진사시를 볼 수 없다."

'죄를 지어 영구적으로 임용할 수 없게 된 사람'은 중범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관직 취임 자격을 박탈당하는 재판을 받은 사람을 뜻한다. 또 '서얼 자손'이란 표현에 관해서는 '여기서 말하는 자손은 아들과 손자뿐만 아니라 자자손손을 가리킨다'는 1555년의 유권 해석이 있다. 하지만, 서얼에 대한 이런 제한은 훗날 점진적으로 완화되었다. 

이런 결격 사유만 없으면, 응시자격을 갖춘 양인은 원칙상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의 문>에서 사도세자가 보여준 정치적 파란은 실상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부터 일반 양인들도 응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법률 규정상의 이야기다. 법적으로는 노비가 아닌 한 누구나 다 응시할 수 있다지만, 실제로는 시험을 준비할 시간과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만 가능했다. 결과적으로는 지역 양반클럽에 가입한 경제력과 지위를 가진 지주나 관료의 자식들만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양반 클럽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이 과거에 응시한 사례도 적지 않다. 그 중 하나가 송순(1493~1583년)이다. 전라도 담양 사람인 송순은 이른바 양반이 아니었다. 담양의 양반 클럽에서는 이 집안을 양반 가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송순의 조상들이 전통적인 담양 토착민이 아닌 남원에서 온 이주민이었기 때문이다.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거주해야만 양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송순은 과거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대사헌(검찰청장)에까지 올랐다.

대사헌이 된 뒤 송순은 담양을 방문해 양반 클럽 회원들에게 성대한 식사를 제공했다. 그러자 담양 양반들은 그의 이름을 양반 명부에 넣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송순은 이른바 양반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이는 사회적으로 양반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도 과거에 응시했다는 점과 양반의 범위가 법적으로 규정된 게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반' 기준 법으로 규정된 것 없다


▲  과거시험 장소 중 하나였던 예조 관청(별표의 오른쪽). 지도에서는 예(禮)라고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산은 북악산이고, 그 아래에 경복궁이 있다. 이 그림은 1750년대에 나온 <경도오부·북한산성부도>라는 지도의 일부다. ⓒ 김종성

송순보다 훨씬 더 열악한 조건에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이 있다. 바로 백범 김구다. 김구가 10대 중반이었을 때만 해도, 과거시험이 전통 방식으로 치러졌다.

김구의 회고록인 <백범일지>를 읽어보면 과거시험 응시자격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한층 더 깊어질 것이다.

김구의 가문은 전형적인 양인이자 서민이었다. 이 집안은 11대 할아버지 때까지 사회적으로 양반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가문이 역모죄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당한 뒤에 11대 할아버지가 황해도 해주 산골에 정착했고, 이때부터 이 집안은 전형적인 하층민 가문이 되었다. 당연히 김구는 이른바 양반은 아니었다.

양반에서 하층민으로 몰락했기 때문인지, 이 집안 내에서는 양반에 대한 저항심이 무척 강했다. 김구의 아버지인 김순영은 툭하면 동네 지주나 양반들을 혼내주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소년 김구는 스스로를 '상놈'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그는 양반에게 무조건 저항하기보다는 자신이 양반이 되는 길을 추구했다. 그는 상놈에서 탈피하기 위해 과거시험 공부에 착수했다.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더라도 진사 정도만 되면 상놈의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소년 김구의 생각이었다.

김구는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시험 소과의 황해도 예심에 응시했다. 이때가 1892년, 열일곱 살 때였다. 하지만, 그는 고배를 마셨다. 이 사례도, 하층 양인도 최소한의 경제력과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이 점은 오늘날도 별로 다르지 않다. 오늘날 행정고시 등은 원칙상 누구나 다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시 수험생은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킬 수 있는 경제력'과 '대학을 졸업한 자녀를 몇 년간 더 지원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는 집안 출신이다.

누구나 고시에 응시할 수 있기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 같은 고졸 출신 서민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판사까지 할 수 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다 뿐이지, 조선시대 상황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비밀의 문>의 시대적 배경인 사도세자 시대에도 경제력과 시간을 갖춘 양인들은 얼마든지 과거시험을 칠 수 있었다. 따라서 드라마 속의 사도세자가 정말로 개혁다운 개혁을 하고 싶다면, 시험제도에 관한 법률을 바꿀 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했다.

가난한 양인의 자식도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교를 늘리고 수업료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또 지주가 소작인 가족을 과도하게 착취하지 못하도록 막음으로써 소작인의 자식들이 공부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이 같은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가 가장 근본적인 과제였던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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