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16193
조선시대 '새누리당'의 최후...끔찍했다
[역사 파고들기①] 조선시대 '독주체제' 이어간 서인당
12.04.05 17:34 l 최종 업데이트 12.07.18 16:46 l 김종성(qqqkim2000)
▲ 조선 후기 정치의 1번지인 창덕궁. 사진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소재. ⓒ 김종성
지금으로부터 338년 전인 1674년, 조선왕조에서는 51년 만의 정권교체가 발생했다. 1623년에 광해군을 내쫓고 정권을 차지한 서인당이 남인당에게 권력을 내준 것이다.
서인당은 율곡 이이의 사상을, 남인당은 퇴계 이황의 사상을 추종했다. 오늘날 이이는 진보적인 느낌을, 이황은 보수적인 느낌을 풍긴다. 그래서 서인당은 진보적이고 남인당은 보수적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오늘날의 느낌이다. 현대 한국의 보수파는 이이보다는 이황을 선호하지만, 조선시대 보수파는 정반대였다. 이황보다는 이이를 선호한 조선시대 보수파의 선두는 서인당이었다. 서인당이 보수파라는 점은 그들이 강력한 사대부 중심주의를 추구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조선시대 당파들은 기본적으로 사대부 중심주의를 지향했다. 주상(왕의 공식 명칭)보다는 사대부가 국가경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대부 중심주의를 나쁘게 표현하면, 기득권세력 중심주의란 말이 된다. 부동산과 유교적 교양과 사회적 지위를 갖춘 사대부들은 지도층인 동시에 기득권층이었다.
사대부의 이익을 극단적으로 옹호한 집단은 서인당이었다. 여타 당파들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였지만, 서인당이 가장 격렬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인당의 정치노선은 서민층에게는 별로 이로울 것이 없었다.
반면, 남인당은 주상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이었다. 주상은 사대부와 대립하는 관계였고 주상의 권위가 높아지면 기득권층의 이익이 감소하기 때문에, 서민 입장에서는 주상의 권위를 인정하는 당파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서인당보다는 남인당이 득세하는 게 서민층에게는 유리했다고 볼 수 있다.
51년 만의 정권교체 가능케 했던, '2차 예법 논쟁'
▲ 주상과 신하들의 모습. 사진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 있는 모형들이다. 유리관 안에 전시되어 있다. ⓒ 김종성
1674년에 51년 만의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이른바 제2차 예법 논쟁이었다. 이것은 제2차 예송이라고도 불린다. 논쟁의 핵심은 '죽은 인선왕후(효종의 부인)를 위해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몇 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였다.
장남 부부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는 3년간 상복을 입고, 차남 이하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는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했다. 서인당은 '효종은 임금이지만 차남'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의대비가 1년만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남인당은 '효종은 차남이지만 임금이며, 임금은 장남보다 앞선다'는 논리를 들어,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리적으로 보면, 남인당의 주장이 맞았다.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서는 임금이 된 아들을 장남으로 태어난 아들보다 앞자리에 놓았다. 임금이 된 아들이 어버이의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따라서 서인당의 주장은 효종을 폄하하기 위한 정치논리에 불과했다.
서인당이 효종을 폄하한 것은, 그가 살아생전에 왕권강화를 위해 군비증강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증세정책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군비증강은 기득권층의 주머니를 터는 일이었다. 그래서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당은 효종을 압박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효종은 마흔한 살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서인당이 '효종은 차남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런 악연 때문이었다. 그들은 효종에 대한 폄하를 통해 '사대부의 이익을 침해하는 군주의 말로는 비참하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고자 했던 것이다.
팽팽하던 제2차 예법 논쟁은 야당인 남인당의 승리로 끝났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이 남인당을 지지한 것이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다. 뒤이어 남인당이 주요 포스트를 장악하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캐스팅보트를 쥔 현종의 선택이 51년 만의 정권교체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것이다.
정권을 되찾은 서인당, 그리고 독주는 이어졌다
정권교체가 발생한 1674년에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했다. 야당으로 전락하여 숙종의 취임식을 지켜본 서인당은 정권을 탈환하고자 절치부심했다. 이때부터 서인당과 남인당 간에는 현대 정당들의 선거전을 뺨치는 격렬한 정치투쟁이 전개되었다.
서인당은 정권을 빼앗긴 지 6년 만인 1680년에 권력을 탈환했다. 허적을 비롯한 남인당 주역들을 역모죄로 몰아 축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번에는 남인당이 절치부심했다. 9년 만인 1689년, 정권은 다시 남인당으로 넘어갔다. 이때는 서인당 영수 송시열이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패배한 쪽은 사약을 마셔야 했으니, 당시의 '선거'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674년 이후 남인당은 도합 11년간 집권했다. 1674년부터 1680년까지 6년간, 1689년부터 1694년까지 5년간, 도합 11년간이다. 서인당 입장에서는 두 기간이 '잃어버린 11년' 같았을 것이다.
▲ 송시열 초상화. ⓒ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1694년에 서인당은 정권을 되찾았다. 이때부터 왕조 멸망 때까지 서인당의 독주체제가 계속됐다. 당파 활동이 금지된 영·정조 시대에 실질적인 집권세력 역할을 한 것은 서인당의 분파인 노론당이었다.
19세기 전반기에 외척이 되어 국정을 독점한 것도 역시 서인당의 후손이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길 당시의 지배층도 기본적으로 서인당의 후손이었다. 이런 장기집권은, '잃어버린 11년'에 쇼크를 받은 서인당이 두 번 다시 정권을 내주지 않으려고 독주체제를 공고히 한 결과였다.
서인당은 반성할 줄 모르는 당파였다. '잃어버린 11년' 이후로 정권을 사수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을 뿐, 집권당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잃어버린 11년'으로부터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 것이다.
서인당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에 대해 둔감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민층의 외면을 받는 당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시대적 변화에 둔감했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서민층의 정치적 성장을 억누르는 데만 급급했다. 조선 후기에는 서민층의 경제적 성장이 두드러졌다. 합리적인 집권당이라면, 부유해진 서민들을 정치권으로 끌어들이려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정치 시스템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인당은 서민 출신 엘리트들과의 권력 공유를 거부했다. 서민층의 경제력 향상이 정치적 성장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한 서인당은 사대부들의 특권을 공고히 하는 데만 주력했다. 기존 예법(사회질서)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한 예학(禮學)이 그들 사이에서 발달한 것이 이 점을 증명한다.
둘째, 노비제도의 해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18~19세기에는 노비제도가 위기에 봉착했다. 노비들이 가혹한 노동조건을 거부하고 주거지를 이탈하여 임금노동자로 변신하거나 주인에게 대들거나 주인을 살해하는 일이 급증했다. 주로 노비들이 산업생산을 담당했기 때문에, 노비제도의 위기는 경제체제의 위기나 마찬가지였다. 오늘날로 치면 노사관계의 파탄에 해당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서인당은 변화에 둔감했다. 그들은 노비제도를 손보려 하지 않았다. 물론 부분적으로 법령 개정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노비제도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다.
'잃어버린 11년' 안타까워하다, '잃어버린 35년' 초래한 서인당
결국 조선의 노비제도는 1894년에 일본군에 의해 폐지되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침략한 일본군이 조선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친일파 정권과 협력하여 노비제도 폐지를 단행한 것이다.
1894년 이전까지 근 2백년간 조선의 노비제도 즉 노사관계는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상태로 운영되었다.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얼마나 컸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현실과 제도의 불일치를 좀더 빨리 손보았다면, 산업생산도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일본이 조선을 추월한 이유 중 하나는, 17~18세기 조선이 상대적으로 정체상태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서인당은 이런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만 집착했다. 이런 직무유기가 결국 1910년 국권상실로 이어진 것이다. '잃어버린 11년'을 안타까워하다가 '잃어버린 35년'(일제 강점기)을 초래한 것은 서인당과 그 후예들의 책임이다.
서인당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에만 신경을 썼지,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해 세상이 잃어버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정권교체가 오늘날처럼 선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서민들은 '잃어버린 11년'에만 집착하는 서인당에게는 절대로 표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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