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14156

조선 왕세자가 이러는 거... 고춧가루 때문이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첫번째 이야기
12.03.29 10:54 l 최종 업데이트 12.03.29 13:18 l 김종성(qqqkim2000)

▲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 SBS

한밤중에 연못에 빠져 죽은 아내의 사망 원인을 조사하다가 괴한들에게 쫓겨 절벽 밑으로 떨어진 조선 왕세자 이각(박유천 분). 이각이 측근 3인방과 함께 대한민국 서울의 옥탑방에 떨어진 뒤에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별세계에 떨어진 이각과 3인방에게 당혹스러운 것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서울 시민들의 표정이다. 시민들은 사극 탤런트나 정신병원 탈출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들과 최초로 조우한 옥탑방 주인 박하(한지민 분)는 "궁으로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들을 트럭에 태워 창덕궁에 실어다 주었다. 하지만, 입장권을 끊지 않고 뛰어 들어가는 바람에 이들은 도로 쫓겨나고 말았다. 

박하는 처음에는 이들을 경복궁에 데려다 주려 했다. 그런데 조수석에 앉은 이각이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이미 불타버렸거늘, 네가 나를 속이려 하느냐?"고 호통 치자, 박하는 "(정신병자들이) 역사고증까지 다 했느냐?"며 할 수 없이 핸들을 돌렸다. 그래서 창덕궁에 갔다가 쫓겨난 것이다. 

도저히 궁궐에 들어갈 길이 없어서 옥탑방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심부름을 해주며 하루하루를 당혹감 속에 연명하고 있는 이각과 3인방. 다행히 이들에게 당혹스럽지 않은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음식문화다.  

물론 배고파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들은 21세기 음식에 신속히 적응했다. 케첩 찍찍 뿌린 오므라이스도 뚝딱, 젓가락 비비고 뚜껑 접어 먹는 컵라면도 뚝딱이다. 무사가 활 쏘는 장면에 놀라 텔레비전을 부술 정도로 21세기 문명을 낯설어하면서도, 유독 음식문화에 대해서만큼은 꽤나 신속히 '연착륙'했다. 

임진왜란(1592~1599년) 때 경복궁이 불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데서 드러나듯이, 왕세자 일행은 조선시대 후기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대화 내용을 볼 때, 이들은 17세기나 18세기 사람들이다. 

만약 이들이 16세기 이전에 태어났다면, 21세기 음식에 좀 더디게 적응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태어나기 이전인 16세기에 세계 음식문화에 혁명적 변화가 발생했고, 그때 새로 생긴 음식문화의 기조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21세기 음식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은 조선 후기 음식문화와 현대 음식문화에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16세기 이전의 음식문화는 그 이후의 음식문화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16세기 이전에 태어났다면 현대 음식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16세기 이전에는 아메리카에서만


▲  편의점 앞에 서 있는 왕세자 이각(박유천 분). 뒤의 여학생들은 컵라면을 먹고 있다. ⓒ SBS

오늘날 우리 식탁 위에 올라오는 옥수수·감자·고구마·고추·토마토·땅콩·파인애플. 이것들은 우리에게 꽤나 친숙한 식품들이다. 옥수수나 감자는 일부 국가나 지역에서 주식의 지위를 점하고 있고, 고추는 주요 양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식품들은 16세기 이전만 해도 아프로유라시아(소위 구대륙)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아메리카에서만 재배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서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진출을 계기로 지구의 나머지 지역으로도 전파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지구 전역의 음식문화가 하나로 통합되었으니, 16세기는 음식문화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아프로유라시아 식품이 아메리카에 도움을 준 측면도 있지만, 아무래도 아메리카 식품이 아프로유라시아에 도움을 준 측면이 훨씬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아메리카 식품이 아프로유라시아에 신속히 보급되어 이 지역의 만성적인 식량부족사태를 해소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아스텍문명과 마야문명의 거점인 멕시코에서 최초로 재배된 고구마. 이 작물은 척박한 땅에서도 재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칼로리 공급량이 높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대규모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 적합하다. 이런 이점을 바탕으로 고구마는 아프로유라시아의 식탁을 신속히 장악했다. 

멕시코에서 고구마를 발견한 서유럽인들은 이것을 항해용 식량으로 활용했다. 이것은 태평양을 횡단하는 선원들에 의해 필리핀에 전해졌고, 명나라 복건성(푸젠성)과 오키나와왕국과 일본을 거쳐 조선에까지 전해졌다. 

고구마가 필리핀에서 복건성으로 전파되는 과정은 목화씨가 중국에서 고려로 전파되는 과정과 흡사했다. 문익점은 붓대 속에 목화씨를 숨겨 왔다. 요즘 말로 하면, 볼펜 속에 숨겨온 셈이다. 필리핀을 방문한 중국 상인 진진룡은 배의 돛줄로 고구마를 가린 채 중국으로 귀환했다. 고구마 유출을 꺼리는 현지인들의 방해를 그런 식으로 피해나간 것이다. 

중국경제사 학자인 드와이트 퍼킨슨이 내놓은 통계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인구는 1600년에 적어도 1억 2천만 명이었고, 1913년에 4억 3천만 명 정도였다. 인구가 3백 년 만에 3~4배나 급증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바로 고구마였다. 동아시아 최고의 구황작물로 부각된 고구마가 곳곳에 신속이 보급되어 식량부족을 해소했기 때문이다. 


▲  생크림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는 이각. ⓒ SBS

감자·고구마 계기로 두 대륙 음식문화 통합

남아메리카 안데스 지역이 원산지인 감자는 본래 잉카문명권의 식품이었다. 유럽에 처음 전해졌을 때만 해도, 유럽인들은 감자를 '감히' 먹지 못했다. 종양처럼 생겨서 징그러웠기 때문이다. 

이것을 먹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프로이센(독일)이 식량부족을 해결하고자 농민들에게 재배를 권장하면서부터였다. 프로이센 정부는 말을 듣지 않으면 코와 귀를 베겠다는 협박까지 하면서 농민들에게 감자 재배를 강요했다. 감자가 독일인들의 주식이 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유럽에 들어온 감자는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과 동아시아에 전달되었다. 또 대서양 횡단노선을 통해 북아메리카로도 전해졌다. 남아메리카 감자가 북아메리카로 곧장 전해지지 않고, 유럽을 거친 뒤에야 북아메리카에 전해진 것이다. 고구마가 동아시아 식량문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면, 감자는 유럽 식량문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 

아메리카의 고구마·감자가 아프로유라시아의 밥상을 신속히 장악한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16세기 서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진출을 계기로 두 대륙의 음식문화는 신속히 통합되어 나갔다. 

16세기 이후의 이 같은 교류가 없었다면, 조선 후기 사람들은 옥수수·감자·고구마·고추를 구경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들은 오늘날의 우리와 현저히 이질적인 식성을 가졌을 게 분명하다. 

만약 그랬다면, 조선 후기의 김치 맛은 현재의 김치 맛과 확연히 달랐을 것이다. 고춧가루 없이 파·소금·마늘만으로 김치를 담가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는 오래 전부터 동아시아에서 재배됐고, 마늘 역시 단군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재배됐다. 

고춧가루 없이 이런 것들로만 김치를 해먹는다면, 아마도 얼큰한 맛이 훨씬 더 약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얼큰한 맛에 익숙한 것은 16세기 이후의 변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옥탑방 왕세자 일행은 그런 변화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대 음식문화의 출발점인 16세기 이후에 출생했으므로, 그 이전 사람들과 비교하면 21세기 음식에 훨씬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옥탑방 왕세자가 300년 정도나 나이 어린 박하와 생활하려면, 적어도 음식문화 만큼은 두 사람이 비슷해야 한다. '나이 차이'도 많은데 식성마저 다르다면, 세대차 때문에 함께 다니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옥탑방 왕세자는 자신이 16세기 이전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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