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8338
<해품달>의 뻥... 이건 좀 심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여섯 번째 이야기
12.02.17 11:34 l 최종 업데이트 12.02.17 11:35 l 김종성(qqqkim2000)
▲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이훤(왼쪽)과 허연우. ⓒ MBC
조선시대 사회상을 묘사하고 있는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지난주에 방영된 11, 12부에서는 허연우(한가인 분)와 이훤(이수현 분)의 데이트 장면이 나왔다. 궁을 나선 연우와 잠행에 나선 이훤이 시장에서 우연히 만나 데이트까지 하게 된 것.
조선시대에는 왕의 동선이 일일이 기록됐기 때문에, 왕이 임의로 궐을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훤 임금은 워낙 '날렵'한지라,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잠행에 나섰나 보다. 게다가 잠행 길에 데이트까지 하게 되는 귀한 행운도 얻었다.
드라마 <동이>의 숙종 임금은 애인과 함께 주막집에서 술과 돼지껍질을 즐겼지만, <해를 품은 달>의 이훤은 훨씬 더 세련된 모습을 보여줬다. 이훤은 연우와 함께 길거리 인형극을 관람했다. 주요 데이트 코스인 '뮤지컬'을 즐긴 것이다.
두 사람이 시장 땅바닥에 앉아서 관람한 인형극의 제목은 <무수리의 첫 사랑>. '비정규직' 궁녀이자 궁녀의 보조자인 무수리가 임금과 드라마틱한 사랑을 나눈다는 이야기다. 왕이 잠행에 나섰다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나중에 이 여인이 우연히 무수리가 돼 입궁한다는 줄거리다.
그런데 이 공연은 공짜가 아니었다. 가까이서 관람하려면 돈을 내야 했다. 관람료는 1인당 5냥. 이훤은 잠행 중이라 수중에 돈이 없었기 때문에, 돈 잘 버는 연우가 대신 지불했다. 요즘 액받이 무녀로 잘 나가는 연우가 흔쾌히 돈을 냈던 것이다.
여성에게 데이트 비용을 부담시킨 게 미안했는지 아니면 돈을 못 내서 자존심이 상해서였는지, 이훤은 "꼭 갚을 테니 염려 말라"고 단단히 다짐했다. 그러나 연우는 "개의치 마십시오"라고 사양할 뿐이었다. 이훤이 "난 빚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며 "저녁에 보자"고 재차 강조했지만, 연우는 여전히 돈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국으로 치면 고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중국 주나라 시대. 그때의 시를 모은 <시경>에 이런 시가 있다. <시경> '패풍' 편에 나오는 시다.
단아한 아가씨, 아름답기까지 한데
내게 붉은 대통을 선물하는구나
붉은 대통, 붉기도 하다
그대 아름다움에 내 마음은 설레고 설레
'붉은 대통'이 어떤 물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모의 여성이 그런 선물까지 했다는 것에 대해 감탄을 표한 시다. 아름다운 여자가 자기를 위해 돈까지 썼다는 사실에 '격한 감동'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더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이다. 드라마 속의 이훤 역시 연우가 돈을 썼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찜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 좋았을 것이다.
인형극 관람료가 5냥... 말이 되나?
▲ 인형극을 관람하는 연우와 이훤. ⓒ MBC
연우와 이훤의 데이트 장면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들이 지불한 비용이다. 드라마 속의 연우는 마치 '껌값' 정도 쓴 듯한 태도였다. 그런 돈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연우가 낸 돈 10냥은 정말 그렇게 '시원하게' 쏠 수 있는 돈이었을까?
얼마 전에 종영된 어느 사극에서는 등장인물이 돈 1냥으로 떡이나 과일 몇 개를 사 먹는 장면이 나왔다. 많은 드라마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 물가를 고려해보면, 드라마 속의 상인들이 얼마나 바가지를 씌우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해를 품은 달>은 등장인물이나 줄거리는 100% 허구지만, 시대적 배경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이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드라마에서 사림파가 중앙정계 진출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1567년 제14대 선조 임금의 즉위를 기점으로 그 이전의 지배층은 훈구파, 그 이후의 지배층은 사림파라 불린다. 훈구파는 각종 정변에서 승리를 거둔 공신들로 구성된 데 비해, 사림파는 정상적인 시스템을 밟고 정권을 장악한 선비들로 구성됐다.
훈구파는 주로 수도권을 거점으로 하는 대규모 부동산 소유자들이고, 사림파는 주로 지방을 거점으로 하는 중소 부동산 소유자들이었다. 일반적으로 훈구파 유형의 지배층은 국가 초기의 불안정기에, 사림파 유형은 중기 이후의 안정기에 권력을 잡는다.
제9대 성종(재위 1470~1494) 때부터 중앙정계를 노크한 사림파는 몇 차례의 사화(士禍, 선비들의 재앙)로 타격을 입었지만, 제11대 중종 때 조광조의 출현과 함께 잠시 권력을 잡았다. 그러다가 선조의 집권과 함께 권력을 항구적으로 장악했다. 드라마 속의 보수파 거두인 윤대형(김응수 분)이 사림파의 결집을 경계하는 것으로 볼 때, <해를 품은 달>은 성종 이후의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절 조선에서는 주화란 것이 사용되지 않았다. 1장을 단위로 하는 저화란 지폐도 있었지만, 이것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화폐로 사용된 것은 주로 직물이나 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는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주화 1냥이란 개념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장에서 돈 10냥을 지불하고 뭔가를 구매하는 풍경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럼, 만약 <해를 품은 달>이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한다면 어떨까? 주화인 상평통보가 본격적으로 유통된 17세기 후반 이후를 배경으로 한다면, 1인당 5냥을 주고 인형극을 관람한다는 게 성립될 수 있을까?
쌀도 사고 노비도 고용할 수 있는 돈 10냥
▲ 조선시대 주화인 상평통보.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경제사 학자인 김용만은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에서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거래된 노비 151명의 몸값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노비는 일반적으로 5~20냥에 거래됐다. 이 돈이면 노비 본인과 그 자녀들을 대대로 고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주로 노비가 노동을 담당했다. 그러므로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 1명을 평생 고용하는 데 그만한 돈이 들었던 셈이다. 10냥이란 돈, 얼마나 큰 돈인가!
100냥이 넘는 가격에 노비가 거래된 사례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일반적인 노비 매매가 아니었다. 첩을 삼을 목적으로 여자 노비를 사는 경우였던 것이다. 고가에 거래된 노비는 십중팔구 첩이었다고 보면 된다.
경제학자인 이영훈과 박이택은 <농촌미곡시장과 전국적 시장통합, 1713~1937>이란 논문에서 경상도 경주의 쌀값 추이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쌀 1가마니의 평균 가격이 18세기 전반에는 0.8냥, 18세기 후반에는 0.9냥, 19세기 전반에는 1.1냥, 19세기 후반에는 2.9냥이었다.
경제학자인 전성호는 <18~19세기 물가 추세>란 논문에서 전라도 영암의 쌀값 추이를 조사했다. 이에 따르면, 1744~1850년에 쌀 1가마니의 최고 가격은 3.0냥, 최저 가격은 0.4냥이었다.
쌀값에 비해 노비 값이 너무 싼 게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조선시대의 인건비가 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쌀값이 오늘날에 비해 현저히 비쌌다고 생각하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한 판단이다.
땅값과 비교해 봐도, 조선시대 쌀값의 비중을 이해할 수 있다. 쌀값과 땅값의 비중을 시소에 비유하자면, 오늘날에는 후자 쪽으로 시소가 현저히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후자 쪽으로 약간 기울었을 뿐이다. 이 말은, 조선시대에는 쌀값의 가치가 오늘날과 달리 매우 높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쌀 1가마니가 '몇 냥'이었으므로, 그 몇 냥은 '지금의 20만 원도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쌀 1가마니의 가치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전제하에, 쌀 1가마니에 해당하는 '몇 냥'의 가치를 계산해야 한다. 정리하면, 조선 시대에는 쌀값이 엄청나게 비쌌고, 1가마니 사는 데 드는 '몇 냥'도 오늘날의 20만 원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말이다.
이런 연구 결과들을 보면, 주화 10냥이 얼마나 큰 돈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돈이면 값싼 노비 1명을 평생 부릴 수도 있었다. 또 시기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쌀을 몇 가마니나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조선시대의 쌀 1가마니는 오늘날과 달리 매우 비싼 물건이었다.
노비도 살 수 있고 쌀도 많이 살 수 있는 10냥. 그래서 웬만한 서민들한테는 '전 재산'이라고 할 수도 있는 10냥. 10냥의 가치가 조선 후기에도 이처럼 높았다면, <해를 품은 달>의 시대적 배경인 조선 전기에는 훨씬 더 높았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드라마 속의 연우는 그런 거액을 그저 껌값 정도로 생각하고 '화끈하게' 시장에 뿌렸다. 그깟 돈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그것도 땅바닥에 앉아서 관람하는 공연을 위해 거액을 아낌없이 던진 것이다.
인형극 한 번 보여주고 거액을 받거나 떡·과일 몇 개 팔고 거액을 챙기는 사극 속의 상인들. 거액의 돈으로 시시한 상품을 구매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는 사극 속의 서민들.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들의 상행위와 씀씀이를 지켜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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