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71056

외간남자와 통한 궁녀, 즉각 '참형' 당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여섯 번째 이야기
11.12.16 11:28 l 최종 업데이트 11.12.16 12:04 l 김종성(qqqkim2000)

▲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강채윤(장혁 분). ⓒ SBS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강채윤(장혁 분)은 간절한 소원 하나를 품고 있다.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궁녀 소이(신세경 분)와 살림을 차리는 것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하늘보다도 높고, 땅보다도 무거운 소원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오로지 소이뿐"이라고 답할 것이다. 

채윤은 자신의 소원을 이미 절반은 이루었다. 그는 비밀조직인 밀본을 와해시키고 훈민정음 창제를 완성하면 소이와 함께 궁을 나가도 된다는 약속을, 세종(한석규 분)으로부터 받아냈다. 

손오공이 주인공인 <서유기> 제8회에서 관음보살은 저팔계에게 "사람이 착한 소원을 가지면 하늘이 반드시 들어준다"(人有善願, 天必從之)고 말했다. 궁녀와 결혼하겠다는 소원은 하늘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조선시대에는 결코 '착한 소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법에 위반되는 '나쁜 소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 속의 채윤과 달리, 대부분의 조선시대 남자들은 궁녀와의 사랑을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MBC <대장금>에서 군관 서천수(박찬환 분)는 장금이의 어머니인 궁녀 박씨(김혜선 분)와 결혼했고 판관 민정호(지진호 분)는 궁녀 장금이를 사랑했지만, 이것은 웬만한 남자들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바깥 사람과 간통한 궁녀, 즉각적으로 '참형'

▲  소이(신세경 분). ⓒ SBS

조선시대 법전들, 이를테면 <수교집록><속대전><대전회통> 등에서는 "궁녀가 바깥사람과 간통하면 남녀 모두 즉각적으로 참형을 가한다"고 규정했다. '바깥사람'이란 임금 이외의 남자를 가리킨다. 궁녀가 임금 이외의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면 참형(참수형)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실상을 반영하는 대표적 사례가 현종(숙종의 아버지) 때 발생한 '귀열이 사건'이다. 현종 8년 5월 20일자(1667년 7월 10일) <현종실록>에 따르면, 귀열이란 궁녀가 서리(하급 관료)인 이흥윤과 성관계를 가져 아이까지 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흥윤은 귀열이의 형부였다. 

궁녀의 배가 볼록해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에 충격을 받은 조정에서는 논의가 분분했다. 형조(법무부)와 승정원(대통령비서실)에서는 교수형 정도로 처리하자고 건의했고, 현종은 자기 혼자 끝끝내 참형을 주장했다. 결국 현종의 주장이 관철됐다. 

한번 궁녀는 영원한 궁녀였다. 궁에서 퇴직한 뒤에도, 성관계 금지의무는 평생을 두고 집요하게 궁녀를 쫓아다녔다. 그래서 전직 궁녀와 살림을 차리는 것 역시 법으로 엄금되었다. 이와 관련된 사례가 세종 21년 5월 15일자(1439년 6월 26일) <세종실록>에 기록된 '이영림 사건'이다. 장교 이영림이 전직 궁녀와 간통한 사건이었다. 

사헌부(검찰청)에서는 이들에 대해 참형을 주장했다. <세종실록>에서는 이영림이 참형보다 2단계 낮은 형벌을 받았다고 했다. 목을 베는 대신 사약을 내린 듯하다. 한편, 전직 궁녀가 감형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 궁녀에게는 참형이 그대로 적용된 듯하다. 

또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는 전직 궁녀를 처나 첩으로 맞이하면 곤장 100대를 때리겠다고 규정했다. 전직 궁녀와 한번만이라도 성관계를 가지면 참형을 가하면서도, 전직 궁녀와 결혼하면 사형 대신 곤장을 친 것은 고위층이나 왕족들의 위신을 고려한 것이었다. 

전직 궁녀를 처나 첩으로 맞아들이는 남자들은 주로 고위층이나 왕족들이었기에, 그들에게 참형을 집행하기 어려워서 그렇게 규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곤장 100대를 맞고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이 경우도 사실상 사형을 규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현직이든지 전직이든지 간에 궁녀를 가까이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외간남자와 궁녀의 사랑에 관용을 베푼 왕

이런 현실에 분노를 느낀 용감한 선비가 있었다. 현종 때의 승지(대통령비서관)인 김시진이 그 주인공이다. 현종 3년 4월 2일자(1662년 5월 19일) <현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전직 궁녀에게도 결혼을 허용하자는 파격적인 건의를 올렸다. 그러나 이 건의는 묵살되었다. 귀열이 사건에서 나타난 것처럼, 현종은 그런 관용을 베풀 남자가 아니었다. 

이렇듯, 궁녀와 더불어 살림을 차린다는 것은 실정법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드라마 속 채윤은 좋은 임금을 만났으니 '나쁜 소원'을 품을 수 있지만, 그런 소원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남자들에게, 궁녀와의 사랑은 원칙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  세종(한석규 분). ⓒ SBS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하여 그냥 물러서야 할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하여, "가랑비야 내 얼굴을 거세게 때려다오!"라고 절규하며, 가랑비 축축한 한밤중에 슬픈 눈물을 뿌리며 밤거리를 헤매야 할까.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남자들에게 희망이 될 만한 사례가 있었다. 

드라마 속 세종처럼 외간남자와 궁녀의 사랑에 대해 관용을 베푼 임금이 있었다. 세종의 증손자인 성종(연산군의 아버지)이 그 주인공이다. 성종은 조위(1454~1503)나 신종호(1456~1497) 같은 젊은 문신들을 아꼈다. 1457년에 출생한 성종은 이들보다 좀 어린 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섹스 스캔들이 조선 후기 민담집인 <금계필담>에 수록되어 있다. 

어느 날 밤, 성종은 내시 한 명만 데리고 홍문관(서적·문서 관리기구)을 시찰했다. 그곳에서는 숙직 중인 조위가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성종이 문을 열려는 순간, 그 방의 뒷문을 열고 얼른 들어가는 궁녀가 있었다. 순간, 성종은 문에서 손을 떼고 방안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궁녀 : "저는 평소 선비님을 사모했습니다."
조위 : "이러시면 안 됩니다."

조위가 완강히 거부하자, 궁녀는 칼을 꺼내 자살을 시도하려 했다. 조위는 할 수 없이 궁녀를 끌어안았다. 방안에서는 불이 꺼졌고, 남녀는 잠이 들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입고 있던 돼지가죽 옷을 벗어 내시에게 주면서 "쟤들한테 덮어줘"라고 지시했다. 

다음 날 아침, 조위가 사형을 자청하자 성종은 "나 혼자만 아는 일"이라며 덮어두었다. 옆에 있던 내시는 불쾌했을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내시 같았으면 '나는 사람도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은 성종 혼자만 아는 일이 아니었다. 전날 밤, 신종호도 홍문관에 갔다가 조위와 궁녀를 목격했던 것이다. 

"평안도엔 미인이 많으니, 가까이하지 말라"

신종호가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하자, 성종은 그에게 함구를 지시했다. 성종은 유능한 관료들을 잃기 싫었던 것이다. 그 직후, 성종은 신종호를 평안도 암행어사로 파견했다. 성종은 떠나는 신종호에게 당부했다. "평안도에는 미인이 많으니, 너는 여인을 가까이하지 말라." 

신종호가 떠난 뒤, 성종은 평안도 관찰사에게 비밀지령을 내렸다. 어떻게든 신종호와 평양 기생을 붙여주라는 것이었다. 관찰사는 옥매향이란 관기에게 지시를 내렸다. 신종호를 어떻게든 유혹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옥매향은 걱정 말라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임지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은 신종호는 한밤중에 들려오는 여인의 통곡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울음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나선 그는, 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하고 순간 넋을 잃었다.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다름 아닌 옥매향이었다. 

신종호는 옥매향에게 접근했다. 그는 옥매향에게 자신의 신분부터 밝혔다. 암행어사라고 소개한 것이다. 암행어사는 남루한 옷차림으로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이런 옷차림으로는 미녀의 관심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신분을 밝힌 것은 아닐까. 


▲  성종의 무덤인 선릉.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역 인근에 있다. 중종의 무덤인 정릉도 이곳에 있다. 오른쪽 윗부분에 한강이 보인다. ⓒ 네이버 항공사진

이날 밤, 신종호는 왕명을 어기고 기생을 가까이했다. 그리고 정표로 부채까지 선사했다. 물증을 남긴 셈이다. 이 모든 것은 관찰사를 통해 성종에게 그대로 보고됐다. 신종호의 위법 사항은 단지 이것만이 아니었다. 암행어사가 적절한 사유도 없이 신분을 밝힌 것부터가 위법이었다. 

임지에서 돌아온 신종호를 보고 성종은 "여자 조심했겠지?"라고 질문했다. 낌새를 알아챈 신종호는 즉각 엎드려 죄를 청했다. 성종은 "젊은 사람들이 어찌 실수가 없을 수 있겠느냐?"며 "지난 번 조위의 사건도 이것과 똑같은 것"이라면서 한 살 많은 '형님'에게 인생과 사랑을 가르쳤다. 성종은 조위의 일을 알고 있는 신종호의 입을 막고자 이런 일을 꾸몄던 것이다. 

간통을 무마하고 결혼까지 주선한 성종

성종은 조위와 신종호의 죄를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조위와 궁녀를, 신종호와 옥매향을 연결해주었다. 각각 살림을 차리도록 한 것이다. 

성종은 외간남자와 궁녀의 간통을 무마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혼까지 직접 주선해주었다. 당시 이 일이 널리 회자되어 성종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고 <금계필담>은 전하고 있다. 

궁녀와의 결혼을 꿈꾸는 조선시대 남자들은 이런 사례로부터 용기와 희망을 얻었을 것이다. 궁녀의 이성교제는 물론이고 궁녀의 결혼에 대해서까지 관용을 베푼 성종 같은 임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법에서 엄금했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간절한 소원이 하늘에 닿는다면 조위처럼 행운을 얻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늘이 들어주는 소원은 '착한 소원'이라기보다는 '간절한 소원'이 아닐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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