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30&fileName=kn_074_0030.pdf
*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이도학" 중  "Ⅴ.백제의 성장과 교통로 - 4.가야 지역 진출 통로의 개척"을 가져왔습니다.

백제의 가야 지역 진출 통로의 개척
이도학 1997년

집권국가를 지향하는 369년, 백제는 마한과 가야 지역에 대한 경략을 단행하였다. 마한과 가야 경략은 상호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한 전역(戰役)에서 있었던 것인데, 이 전쟁의 대미(大尾)를 장식한 종장(終場)이 마한의 침미다례(忱彌多禮)였다. 침미다례는 지금의 해남으로 비정되므로, 백제군대는 낙동강 유역에서 서진(西進)하여 이곳에 이른 것으로 보겠다. 그리고 백제와 왜와의 교섭이 경상남도 창원의 탁순국을 매개로 한 것을 볼 때129)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 교통로가 설정되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해로의 존재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백제 대군(大軍)은 지금의 대전(大田) 방면에서 추풍령을 넘어 낙동강 수계를 따라 남하하여 가야제국을 격파한 후 계속 서진(西進)하여 지금의 섬진강 하류를 통과하여 한반도의 서남 모서리인 해남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겠다.130) 백제가 특별히 해남 지역[침미다례(忱彌多禮)] 장악을 남정(南征)의 대미(大尾)로 삼은 것은 한반도 서남 해안의 해로의 장악과 관련된 안전한 기항지(寄港地)의 확보와 연관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해남 지역에는 강대한 세력이 성장해 있었을 뿐 아니라, 군곡리패총에서 신(新)의 화폐인 화천이 출토되었을131) 정도로 대외교역의 요충지에 소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낙랑군과 대방군이 소멸된 이후 기존의 삼한 영역에서 중원대륙과의 독점적인 교역을 확보한 백제로서는, 백제를 축으로 하여 가야와 왜로 이어지는 거대한 해로(海路)를 통하여 재부(財富)의 집중을 기하는 동시에, 그 권력범위의 확대를 기하고자 한 것이다. 

4세기 후반 백제는 기본적 생존자원에 대한 생산수단인 저수지와 같은 대대적인 수리시설의 축조를 단행하였다. 그럼에 따라 확보되는 물적자산은 백제가 군사․경제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한 지방의 거점에 축성한 담로(檐魯)132)를 통하여 중앙으로 조달되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 물량이 늘어나는 공납․수취물의 원활한 운송을 위한 도로망의 확장을 가져오게 마련이었다. 백제 영역 내의 간선 도로망은 이미 소금공급을 통하여 개척되어 나갔었겠지만, 담로체제의 실시에 따라 도로망은 정비되었을 것이며 나아가 우역(郵驛)의 설치도 생각하게 한다. 결국 담로는 ‘관도(官道)’라고 하는 전국적인 도로망의 확장․정비와 짝을 이루면서 거점 지역에 축조된 ‘궁성(官城)’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백제의 수리권 장악은 담로를 거점으로 하여 중앙 권력의 범위를 확대시키는 요체인 동시에 지방세력을 통제하는 관건으로도 유효하게 기능하였다.

475년 백제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지금의 공주로 천도함에 따라 영산강 유역으로의 진출에 박차를 가하였고, 5세기말 이 지역을 영토로 편제시켰다.13) 이러한 영토 편제는 백제가 노령산맥 이남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대규모 교통로의 확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백제의 남방 진출 통로는 익산→전주→임실→남원→곡성→순천으로 이어지는 통로와, 익산→김제→부안→고창→영광→함평→나주→영암→강진→해남, 그리고 김제에서 분기(分岐)하여 정읍→장성→광주→화순→보성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개척되었다고 보겠다. 요컨대 백제의 교통로는 소금 교역망의 형성을 통하여 조성되었는데, 즉 한반도 중부 내륙 수계인 한강․임진강․예성강을 따라 물류(物流)의 이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거대한 수로(水路)의 개척에 따라 중원대륙과 일본열도를 잇는 교역체계의 확립을 가져왔으며, 나아가 그것을 인도지나 반도까지 확대시켰다. 육상교통로의 경우는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북(北)으로는 개성 이북과 원산만, 동남쪽으로는 춘천을, 남(南)으로는 금강 유역에서 4세기 후반에 는 고부(古阜)까지 미쳤다. 또, 가야통로(加耶通路)도 개척되었다. 5세기말 이후 백제는 노령산맥 이남으로의 교통로를 확대시켰는데, 남원을 지나 경상남도 함양(咸陽)의 팔량현(八良峴)을 넘는 동(東)쪽 가야로의 진출로 또한 활발하게 개척되었다.134)


주석

129) 金泰植, 加耶聯盟史 (1993) p.186.
130) 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 p.142.
131) 木浦大學校 博物館, 海南 郡谷里 貝塚I(1987)  p.63.
132) 李道學, 漢城後期의 百濟王權과 支配體制의 整備 (百濟論叢 2, 1990) p.308.
133) 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 pp.142~143.
134)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咸陽郡 形勝 條에 의하면, 팔량현 위에는 신라때의 陣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원은 백제가 이곳에 진출하였을 때까지 소급할 수 있으며, 백제는 중요한 교통로상에 군사적 방어망을 구축하였음을 시사해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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