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go9.htm 
"百濟의 馬韓 幷呑에 대한 新考察(
백제의 마한병탄에 대한 신고찰) - 강봉룡" 중 "3.馬韓의 세력 범위"의 앞부분을 가져와 제목을 달리 달았습니다.

목지국 위치로 본 마한(馬韓)의 세력 범위
강봉룡 1997

이상에서 백제의 마한 병탄 시점을 290년 경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판단하였는데, 그렇다면 백제에게 병탄된 마한의 세력 범위는 어느 정도였을까? 그간 이에 대해서, 충청도와 전라남북도를 포괄하는 지역을 대상 범위로 본 견해와 충청도와 전북 지역을 대상 범위로 본 견해, 그리고 충청도 지역만을 대상 범위로 본 견해 등으로 나뉘어 있어, 논자들 간에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에 여기에서는 백제에게 병탄된 마한의 세력 범위를 새로이 추적해 보기로 한다. 이에 대한 논의 역시 온조기(溫祚紀)의 관련 기사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1) 10월에 왕이 사냥을 하는 채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는데,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의 두 성만이 굳게 지켜서 함락되지 않았다[온조기(溫祚紀) 26년조(年條) ; 나-3 기사에서 재인용].

2) 4월에 2성(城) 원산([圓山)과 금현성(金峴城)이 항복하여 그 인민을 한산의 북쪽에 옮기니 마한이 마침내 망하였다.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온조기(溫祚紀) 27년조(年條) ; 나-4 기사에서 재인용].

3) 7월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의 민호(民戶)를 나누어 옮겨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圓山)과 금현(錦峴)의 2성을 수즙(修葺)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利城)을 쌓았다[온조기(溫祚紀) 36년조(年條) ; 다-2 기사에서 재인용].

사-1)·2)·3) 기사는 각각 온조기(溫祚紀) 26년조와 27년조, 그리고 36년조에 나오는 기사로서, 이들은 앞의 <표 1>에서 제시한 기준에 따라 기년을 재조성하여 각각 290년(책계왕/責稽王 5년)과 291년(책계왕/責稽王 6년)과 300년(분서왕/汾西王 3년) 경의 사실로 볼 것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백제는 먼저 290년 경에 마한의 국읍(國邑)을 병합하고 291년 경에 마지막까지 항거하는 원산(圓山)과 금현성(金峴城)의 투항을 받아들여 마한을 완전 병탄한 연후에, 마한의 요충지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고, 300년 경에는 탕정성(湯井城)을 쌓아 마한의 민호를 분거(分居)시키고,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축(修築)하는 한편, 고사부리성(古沙夫利城)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백제가 마한을 병탄한 후에 기왕의 성을 수축(修築)하거나 새로운 성(城)을 축조(築造)한 사실을 전한 것이다. 따라서 백제에게 병탄된 마한의 세력 범위를 살피기 위해서는, 마한의 국읍(國邑)과 백제에 마지막까지 항거한 원산(圓山),금현(錦峴)의 두 성과 백제가 마한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대두산성(大豆山城)과 탕정성(湯井城), 그리고 더나아가 고사부리성(古沙夫利城)의 위치를 그 단서로서 살필 필요가 있다.

먼저 첫번째로 마한의 국읍(國邑)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한의 국읍은 그간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목지국(目支國)의 국읍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왔으며, 이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목지국의 위치 이에 대한 기왕의 견해를 보면, ① 익산설, ② 공주설, ③ 직산설, ④ 인천설, ⑤ 익산 부근설, ⑥ 영산강유역설, ⑦ 예산설, ⑧ 천안 청당동 일대설 등 매우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따라서 목지국의 위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에 대한 교통 정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기왕의 견해들을 일별해 볼 때 우선 우선 눈에 띠는 것은 각 논자들이 다양한 기준에 의거하여 목지국의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중 먼저 문헌고증의 입장에서 각 논자들이 목지국 위치 비정의 기준으로 거론한 것을 보면, 준왕(準王)의 남래(南來) 지점[①]과 백제와 접경한 지점[②·③], 그리고 비류가 도읍했다는 미추홀[④]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에 고고학적 고찰에 의거하여 목지국 위치 비정의 주요 근거로 제시한 것을 보면, 청동기유물 혹은 지석묘가 집중 분포한 지점[⑤·⑥-1·⑦]과 옹관고분 혹은 토광묘와 철기유물이 집중 분포한 지점[⑥-2·⑧]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각 논자들은, 문헌고증의 입장에서든 고고학적 고찰의 입장에서든, 제각각의 근거·기준에 따라 목지국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논자의 경우 목지국의 위치를 논고에 따라 수시로 바꾸어 비정하기도 한 것을 보면, 목지국의 위치 비정 문제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문제인가가 극명해진다고 하겠다. 따라서 목지국의 위치 비정에 대한 논의는, 우선 그 비정의 기준을 검토하여 대체적인 위치를 파악하고, 문헌 자료와 구비 전승 자료, 더나아가 고고학적 자료 등을 면밀히 비교·검토하는 보완 절차를 거쳐야 하리라고 본다.

먼저 문헌 고증의 입장에서 목지국 위치 비정의 기준을 모색해 보기로 하겠는데, 목지국이 백제에게 병탄된 마한의 국읍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준왕의 남래 지점이나 비류의 도읍지인 미추홀 보다는 백제와 접경했을 충청도 일대에서 그 위치를 찾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기왕의 견해들 중에서 공주설[②]과 직산설[③]만이 남게 되는데, 이중 막연한 추측에 의한 공주설 보다는 문헌과 구비 전승 자료를 면밀히 비교·검토한 직산설이 일단 설득력을 갖는다고 본다.

다음에 고고학적 고찰을 통해서 이를 검증해 보기로 하자. 기왕의 고고학적 고찰에 의하면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지와 철기시대의 유물,유적지를 각각 위치 비정의 유력한 근거로 삼는 두 갈래의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목지국이 3세기 말 경에 백제에 병탄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후자에 근거한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옹관묘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것을 주목한 영산강유역설[⑥-2]과 토광묘에서 초기철기시대 및 삼국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된 점을 중시한 천안 청당동 일대설[⑧]이 우선 후보지로 압축될 수 있겠다. 그런데 천안 청당동 일대는, 앞에서 목지국의 유력한 후보지로 주목한 직산과는 지근한 거리에 있어 동일한 고대문화권으로 파악될 수 있겠으므로, 천안*직산 일대가 목지국의 위치로서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 두번째로 백제에 마지막까지 항거한 원산(圓山)과 금현(錦峴)의 두 성의 위치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이 두 성이 백제에 마지막까지 항거했다는 점에서, 마한의 요충지였을 가능성이 있고, 또한 지리적으로 백제와 멀리 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있겠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원산과 금현과 관련된 다음의 기사를 검토해 보면서 그 위치를 주적해 보기로 하자.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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