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go9.htm 
"百濟의 馬韓 幷呑에 대한 新考察(
백제의 마한병탄에 대한 신고찰) - 강봉룡" 중 "2.馬韓 幷呑의 시기"의 앞부분을 가져와 제목을 달리 달았습니다.

진서(晋書)로 본 마한(馬韓) 병탄(幷呑)의 시기 
강봉룡 1997  

위에서 온조기(溫祚紀)에 나오는 백제와 마한의 관계에 대한 기사와 이를 둘러싼 여러 견해를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각 논자들은, 온조기(溫祚紀)의 마한 병탄 기사를 온조왕 때의 사실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면서도, 그 병탄의 시기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신공기(神功紀) 49년조(年條) 기사와 진서(晋書) 동이열전 마한조(東夷列傳 馬韓條)에 나오는 마한(馬韓)의 진(晋)에 대한 견사(遣使) 기사, 더 나아가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를 각기 그 유력한 전거로 제시하고 있는데, 백제의 마한 병탄 시기를 검토하기 위해서 이미 제시된 이러한 전거들에 대한 면밀한 재검토가 필요하리라 본다. 필자는 이중에서 진서(晋書) 동이열전 마한조(東夷列傳 馬韓條)에 나오는, 마한(馬韓)의 진(晋) 왕조에 대한 사신 파견 기사에 특히 주목하고자 한다.

라) 무제(武帝) 태강 원년(太康 元年)과 2년에 그 주(主)가 자주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 7년과 8년과 10년에도 자주 이르렀다. 태희 원년(太熙 元年)에 동이교위(東夷校尉)인 하감(何龕)에게 와서 헌상(獻上)하였다. 감녕(咸寧) 3년에 다시 오고 그 이듬해에도 내부(內附)하기를 청하였다.

윗 기사에서 마한이 진(晋)에 사신을 파견했다고 한 무제 태강 원년(武帝 太康 元年)과 2년·7년·8년·10년은 각각 무제의 치세인 280년과 281년·286년·287년·289년이고, 동이교위(東夷校尉) 하감(何龕)에게 사신을 보냈다는 태희 원년(太熙 元年)은 290년으로 무제의 말년이다. 또한 기록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긴 하지만 역시 사신을 보냈다는 감녕(咸寧) 3년과 4년은 각각 277년과 278년이다. 이에 의한다면 마한은 277년에서 290년까지 8차례에 걸쳐 무제(武帝) 치하의 진(晋) 왕조 혹은 동부도위에 직간접적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윗 기사에 나오는 마한에 대하여, 기사 그대로 마한으로 보지 않고 백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으므로, 우선 이에 대한 검토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견해의 논지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중국 군현을 통한 간접적 교섭 형태에서 벗어나 중국 진 왕조와 직접적 원거리 교역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정치권력의 집중화'가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점을 전제하고, 대개 3세기 중후반 이후에 백제가 마한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리는 점을 지적하면서, 당시 백제만이 진 왕조와 직접적 원거리 교역을 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몽촌토성에서 3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서진(西晋)의 회유 전문도기편(灰釉 錢文陶器片)이 출토된 것을 백제와 서진 사이의 직접적인 문물교류의 유력한 물증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논지에 따라 백제(百濟)가 진서(晋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입록되지 않았을 리 없었을 것으로 보고, 마한(馬韓)을 백제의 이칭(異稱)으로 간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견해에서 3세기 중후반 경에 백제의 주도권 장악을 전제한 것은 막연히 대세론적으로 파악했다는 감이 다분하다. 또한 물증으로 제시한 몽촌토성 출토의 서진계(西晋系) 도기편(陶器片)은 낙랑군과 대방군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유입될 수도 있는 것이어서, 반드시 백제와 진 왕조 간에 공식적 외교 사절의 교류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도 의문이다. 여기에서 {진서}의 관련 기사를 보다 엄밀히 재검토해 볼 필요를 느끼는 바이다.

'진서' 동이열전에 의하면 동이의 모든 국가가 게재(揭載)된 것이 아니라, 부여국(夫餘國)·마한(馬韓)·진한(辰韓)·숙신씨(肅愼氏)·왜인(倭人)·비리등십국(裨離等十國) 등만이 차례로 입조(入錄)되어 있다. 여기에는 백제 뿐만이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의 이름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주목된다. 신라의 경우는 몰라도 고구려의 경우는 '정치권력의 집중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백제보다 월등히 앞섰을 것이므로, '진서'에 고구려의 사신 파견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백제의 경우보다 더욱 의외의 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이런 견지에서, 마한을 백제의 이칭(異稱)으로 간주했듯이 부여국(夫餘國)을 고구려의 이칭으로 보는 것 역시 대세론적으로 용인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이 용인될 수 없는 무리한 추론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정치권력의 집중화'의 정도는 '진서' 동이열전에 입록되는 필요 조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충분 조건은 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진(晋) 왕조와 통교관계가 성립되었는가의 여부가 그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진서' 동이열전에 입록되지 않은 것을 굳이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결국 새로운 유력한 근거가 나타나지 않는 한 '진서'에 나오는 마한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진서' 동이열전에 의하면 마한은 동이제국 중에서 부여국에 이어 두번째로 입록되어 있다. 이는 곧 진 왕조가 부여국과 마한을 외교적으로 가장 중시하고 있었고, 부여와 마한 역시 진 왕조와의 공식적 통교관계를 적극적으로 전개해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먼저 부여의 경우를 보면 285년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일시 망국의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진(晋) 왕조의 도움으로 복국(復國)된 바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진 왕조에 대한 부여의 정치외교적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바이다.

마한의 경우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그럴 경우, '진서'에서 특히 마한이 가장 빈번하게 진 왕조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그만큼 진 왕조에 대한 마한의 통교의 필요성이 절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그 통교의 필요성이란, 온조기(溫祚紀)에 나오는 백제와 마한의 관계 기사-마한의 영도를 받던 백제가 위협적 세력으로 성장하더니 급기야는 마한을 멸망시켰다는 기사-에서 시사받을 수 있듯이, 백제의 위협에 대해 외교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진서' 동이열전에 백제가 입록되지 않고 마한이 부여국에 이어 두번째로 입록된 사실은 그대로 인정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이를 인정할 수 있다면, '진서' 동이열전에서 마한의 사신 파견 기사의 단절 시점과 관련하여 마한의 멸망 시기를 찾으려한 견해는 긍정적으로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진 왕조에 대한 마한의 사신 파견이 단절되는 291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마한이 멸망했을 것으로 보고, 그 구체적인 멸망의 시점으로 비류왕(比流王) 5년(309)을 지목하였다. 필자는, 마한의 사신 파견이 단절되는 시점과 마한의 멸망 시점을 연관시켜 파악한 점은 기본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마한 멸망의 시점으로 비류왕 5년(309)을 지목한 것은 그 이유가 애매하여 재검토될 여지가 있다고 본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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