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go9.htm 
"百濟의 馬韓 幷呑에 대한 新考察(
백제의 마한병탄에 대한 신고찰) - 강봉룡" 중 "2.馬韓 幷呑의 시기"의 뒷부분을 가져와 제목을 달리 달았습니다.

백제 고이왕대의 국력 신장
강봉룡 1997  
 
그렇다면 '진서' 동이열전에 나오듯이 277년에서 290년에 걸쳐 마한이 진(晋) 왕조에 자주 사신을 파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이 '진서' 동이열전에 의하면 입록된 동이제국 중에서 마한이 가장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나타나 있고 또한 부여국에 이어 마한을 두번째로 입록하고 있어, 마한의 사신 파견이 갖는 의미가 자못 궁금해진다. 이는 291년 경에 백제가 마한을 병탄한 것으로 파악한 앞에서의 논지와 관련지워 다음과 같이 추론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백제가 291년 경에 마한을 병탄하기 전에 일정 기간의 준비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백제의 위협에 대한 마한의 대응책의 하나가 바로 진(晋) 왕조에 대한 사신 파견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제 이 가능성을 보강하기 위해서, 마한 병탄을 완료한 책계왕 직전의 시기에 이해 당사세력(利害 當事勢力)인 백제와 마한과 중국 군현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갔을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점 책계왕의 부왕(父王)인 고이왕대(古爾王代)의 사정이 우선 검토되어야 하리라 본다.

고이왕대는 안으로 백제의 국가체제가 크게 정비되어 제2의 건국기로 평가되고 있고, 이에 상응하여 밖으로도 그 국력이 일정하게 발산되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고이왕대의 대외관계 기사는 대부분 신라와 공방전을 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외에도 말갈(靺鞨)의 장(長)인 나갈(羅渴)이 양마(良馬) 10필을 바쳐온 기사와 중국 군현과의 관계를 전하는 기사가 각각 1건씩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고이왕대에 중국 군현과 관계한 '三國史記'의 기사와, 이와 관련된 삼국지(三國志) 소재의 몇몇 기사를 비교 검토해 보면서, 고이왕대의 백제와 마한과 중국 군현의 관계가 전개되어 간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모구검(毋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과 함께 고구려를 치므로 왕은 그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보내어 낙랑을 쳐서 변민(邊民)을 빼앗았다. 유무(劉茂)가 듣고 노하매 왕이 침토(侵討)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민구(民口)를 돌려주었다.

2)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의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한 부분이 있어, 신지(臣智)가 한(韓)을 격분시켜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그를 쳤는데, 궁준(弓遵)은 전사하였지만 2군(郡)이 결국 한(韓)을 멸하였다.

3) 2월에 유주자사(幽州刺史) 모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쳤다. 5월에 예맥(濊貊)을 쳐서 깨뜨리니 한나예(韓那濊) 등 수십국이 각각 종락(種落)을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나오는 바-1) 기사는 백제가 고이왕 13년(246)에 낙랑군을 쳐서 변민을 노획했다가 그 보복이 두려워 되돌려 주었다는 내용이고,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바-2) 기사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한(韓)과 낙랑,대방군 간에 충돌이 일어났던 사건을 전하고 있으며, 삼국지(三國志) 제기(帝紀)에 나오는 바-3) 기사는 위의 유주자사(幽州刺史) 모구검(毋丘儉)의 고구려 침략으로 야기된 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간 이 세 기사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몇가지 논의가 있어 왔으므로, 본고의 효율적인 논지 전개를 위해서는 우선 이를 검토해 둘 필요가 있다.

첫째, 바-2) 기사가 반영하는 시기의 문제이다. 그간의 논의를 살펴보면 바-2) 기사를 바-3) 기사와 동일시하여, 그 반영 시기를 정시(正始) 7년(246)의 일로 보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왔다. 이는 바-3) 기사의 '한나예(韓那濊)'에 관칭된 '한(韓)'을 바-2) 기사의 한(韓)과 동일시하고, 바-3)에 나오는 '한나예(韓那濊) 등 수십국이 (모구검군/毋丘儉 軍에) 투항했다'는 기록을 바-2)의 '2군(郡)이 한을 멸하였다'는 기록과 동일시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3) 기사는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모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이 남옥저로 피난하여 그 전선(戰線)이 멀리 동해안까지 확대되면서 촉발되어진 사건이라 하겠으므로, 한나예(韓那濊) 등 수십국이란 그 전선에 연접한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바-3)의 한나예(韓那濊)는 바-2)의 한(韓)와 동일시될 수 없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3) 기사는 바-2) 기사 보다는 오히려 바-1) 기사의 사건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즉, 바-1) 기사에 전하는 바는 246년에 위(魏)가 모구검(毋丘儉)과 낙랑,대방군의 태수들을 총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백제가 낙랑을 공격한 사건으로서, 이 사건의 발단이 바-3) 기사의 그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바-2)의 사건은 오림(吳林)이 한(韓)의 8개 소국에 대한 간접적 지배권을 낙랑군(樂浪郡)에 귀속시키려 한 것에 대한 한(韓) 소국들의 집단적 반발 사태로 볼 것이므로, 사건의 발단 자체에서 바-1)이나 바-3)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또한 바-2) 기사에 의하면 한(韓)과 낙랑·대방군의 충돌로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전사했다고 하므로, 이 기사에 전하는 사건은 궁준(弓遵)이 살아서 참전했다고 하는 바-1) 기사의 반영 시기[246년] 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둘째, 바-2)에서 낙랑·대방군과의 전쟁에서 한(韓) 소국들의 투쟁을 촉발시킨 존재로 거론된 신지(臣智)의 정체에 대한 문제이다. 그간의 논의를 보면, 이 신지(臣智)를 백제 고이왕으로 보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는 바-2) 기사와 바-1) 기사를 동일시한 데에서 귀결되어진 바였다. 그러나 위에서 살폈듯이 두 기사는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없다 하겠으므로, 신진(臣智)를 백제 고이왕으로 본 견해 역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 바-1) 기사에 나오는 고이왕은 낙랑의 변민을 약취하였으나 곧 되돌려 줌으로써 중국 군현과 곧 타협해 버리고 말았던 반면에, 바-2) 기사에 나오는 신지(臣智)는 한의 소국들을 격분시켜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여 그 태수 궁준(弓遵)을 전사시킬 정도로 치열한 전쟁을 벌여나갔고 그 결과 '2군(郡)이 마침내 한(韓)을 멸했다'고 표현될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어, 양 기사에 나타난 고이왕과 신지의 전쟁 전개 양상이 판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2) 기사에 나오는 신지(臣智)는 백제 고이왕과는 별개의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며, 굳이 그 실체를 든다면 290년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마한의 왕 이외에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해야겠다.

바)의 기사를 이상과 같이 볼 경우, 3세기 중엽경의 고이왕대에 백제와 마한 사이에 역관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났으리라는 점을 부수적으로 간취할 수 있다. 즉, 백제는 고이왕 13년(246)에 고구려 공격에 여념이 없던 낙랑군을 단독으로 공격하여 그 변민(邊民)을 약취하였다가 이에 대한 낙랑의 항의를 받자 그 보복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약취한 변민을 되돌려 주는 양면 작전을 구사함으로써, 중군 군현의 예봉을 피하면서 국력의 신장을 과시하는 실리를 챙겼다고 할 수 있다[바-1 기사]. 반면 신지(臣智)를 칭한 마한왕(馬韓王)은 246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낙랑군이 한(韓) 소국의 일부에 대한 영도권을 주장하자, 이에 반발하여 그의 영도 하에 있던 한(韓) 소국들을 분발시켜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고 대방태수를 전사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일관한 결과 '2군(郡)이 마침내 한(韓)을 멸했다'고 칭해질 정도의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바-2 기사].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백제는 고이왕대에 국력을 급신장해 갔던 반면에 마한은 그의 영도권을 급속히 상실하는 대조적인 추세로 나아가, 급기야 백제와 마한 사이에 역관계의 역전 현상이 나타나고 심화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마한은 점차 백제의 병탄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당시 낙랑군과 대방군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진(晋) 왕조에 직접 사신을 파견하여 이들 중국 군현으로 하여금 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게 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진서(晋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서 마한(馬韓)이 277년부터 290년까지 진 왕조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했다고 한 것[라 기사]이 그 구체적 증거이겠다. 진 왕조로서도 급성장한 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기 위해서 마한(馬韓)을 중시해야 했을 것인 바, 진서(晋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서 마한(馬韓)을 부여국(夫餘國)에 이어 두번째로 입록(入錄)한 것이 그 반영이라 여겨진다.

진 왕조와 마한이 밀착되어 감에 따라, 백제는 중국 군현의 견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들에 대한 적극적인 친교정책을 펼쳤을 것이 예상된다. 책계왕이 즉위 전후 시기에 대방군과 혼인관계를 맺고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대방군을 지원했던 것[마-1 기사]이야말로 그 구체적인 예증인 것이다. 이러한 친교정책은 고이왕 대에 필요에 따라 중국 군현에 대해 취했던 타협정책을 계승,재현한 것으로서, 마한 병탄을 위한 임시적 방편이었던 것임은 물론이다.

백제와 마한과 중국 군현 사이의 관계는 이처럼 새로이 재정립되어 갔던 것이다. 새로이 정립된 세 세력 간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미 인용한 바 있는 다음의 기사를 재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26년 7월에 왕이 말하기를 "마한이 점차 약해지고 위아래에서 인심이 이반하니 그 세력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혹시 다른 세력이 이를 차지하면 우리까지 위태로와지니 후회해도 소용없다. 남보다 먼저 취하여 후환을 면하는 것이 좋겠다"라 하였다. 10월에 왕이 사냥을 하는 채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는데,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의 2성만이 굳게 지켜서 함락되지 않았다[나-3 기사의 재인용].

이 기사는 온조기(溫祚紀)의 26년조(年條)에 나오고 있으나, 앞에서 살폈듯이 책계왕(責稽王) 5년(290) 경의 사실로 볼 것이다. 이 기사에서 '위아래의 인심이 이반한다'는 구절은 마한이 낙랑,대방군과의 격렬한 전쟁을 치러 큰 타격을 입은 이래 한(韓) 소국들에 대한 영도권을 급속히 상실해 간 간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면, 마한을 선점할지 모르겠다고 우려한 '다른 세력'이란 '진한 8국'에 대한 영도권의 귀속을 노린 바 있는[바-2 기사] 중국 군현 세력을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윗 기사는, 백제의 책계왕이 마한의 영도권이 크게 약화된 것을 보고, 이에 대한 중국 군현 세력의 선점[영향력 확대] 가능성을 염려하다가, 중국 군현에 친교정책을 써서 그들을 잠시 방심시켜 놓고서 290년 경에 전격적으로 마한을 쳐서 병탄한 것을 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백제는 중국 군현의 공격을 받아 책계왕과 분서왕이 앗따라 전사 혹은 피살되는 시련을 겪에 되었음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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