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go9.htm 
"百濟의 馬韓 幷呑에 대한 新考察(
백제의 마한병탄에 대한 신고찰) - 강봉룡" 중 "2.馬韓 幷呑의 시기"의 중간 부분을 가져와 제목을 달리 달았습니다.

백제 온조기(溫祚紀)와 책계기(責稽紀)의 대응
강봉룡 1997  

마한의 멸망 시점의 문제는 결국 온조기(溫祚紀)에 나오는 백제의 마한 병탄 기사의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누구나 인정하듯이 온조기(溫祚紀)의 마한 병탄 기사는 후대의 사실을 온조기(溫祚紀)에 소급 기록한 것이라 하겠으므로, 이 기사가 원래 있었을 합당한 시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기사의 형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으로 나누어 그 시점을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삼국사기' 기사의 형식적 측면에서 살펴 보자. 온조기(溫祚紀)의 마한 병탄 관련 기사들이 후대 사실을 온조기(溫祚紀)에 집단적으로 소급·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병탄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바로 그 시점의 기사는 '삼국사기'에서 집단적으로 누락된 채로 처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291년에 가까운 시점의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의 기사를 살펴볼 때, 책계왕조(責稽王條)(이하에서는 이를 '책계기(責稽紀)'라 약칭하기로 함)의 기사가 우선 눈에 띤다. 책계기(責稽紀)(286-297년)에 의하면 책계왕 즉위년조(卽位年條)과 2년조(年條)와 13년조(年條)의 기사만이 있고, 3년-12년(年) 사이의 기사가 집단적으로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기사의 형식적 측면에서 볼 때, 책계왕대(責稽王代)가 실제의 마한 병탄 시기와 관련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가능성을 그 내용적 측면에서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의 책계기(責稽紀) 기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왕이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집(修葺)하였다.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니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의 왕녀(王女) 보과(寶菓)를 취하여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이로 인해 말하기를, "대방은 우리의 구생(舅甥)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구(侵寇)를 두려워하여 아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즉위년조(卽位年條)].

2) 동명묘(東明廟)에 배알(拜謁)하였다[2년(年) 정월조(正月條)].

3)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 오므로 왕이 나아가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갔다[13년(年) 9월조(月條)]. 

마-1)에 보이는 대방(帶方)은 중국 군현의 하나인 대방군(帶方郡)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대방왕(帶方王)'이란 '대방군태수(帶方郡太守)'를 지칭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마-3)에 나오는 한(漢) 역시 중국 군현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책계기(責稽紀)의 기사는, 백제의 역대왕이 통상적으로 즉위 2년에 행하는 동명묘 배알 의식[마-2 기사]을 제외한다면, 중국 군현과 관계한 기사가 내용의 전부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에 의하면 책계왕은 즉위 전후 시기에는 대방군과 혼인을 통해 우호관계를 맺고서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대방군을 구원해 주기도 하면서 그 관계를 더욱 강화해 갔던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 그 말년인 13년에는 중국 군현의 침입을 받아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어, 즉위년의 기사와 13년의 기사 사이에 중국 군현과의 관계에 대한 상반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책계기(責稽紀)의 기사에 따른다면 책계왕 3년에서 12년 사이에 백제와 중국 군현과의 관계가 우호관계에서 적대관계로 일변되는 사태가 있었음직 한데, 그 기간 중의 기사가 집단적으로 누락되어 있어서 어떤 사태가 일어났는 지를 알기 어렵다. 그런데 여기에서 온조기(溫祚紀)에 전하는 백제·마한 관계의 제2단계 기사[나 기사]와 3단계 기사[다 기사]를 책계왕(責稽王) 3년∼12년 사이의 누락된 기사로 본다면 그 전후의 사건 전개가 순조롭게 설명될 수 있어, 주목을 끈다. 즉, 온조기(溫祚紀)에 나오는 마한 병탄 관련 기사들[나·다 기사]을 책계기(責稽紀)의 3년-12년의 사이의 누락된 기사로 볼 경우, 책계왕 때 백제의 중국 및 마한과의 관계는 대개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전개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제1단계 : 백제가 마한을 병탄하기 위해서 우선 북쪽의 대방군과 우호관계를 구축한 단계이다[책계기(責稽紀)의 즉위원조(卽位年條) 기사]. 책계왕은 즉위년 전후 시기에 혼인 관계와 군사적 지원을 통해서 대방군과의 우호관계를 어느 정도 구축할 수 있었다. 책계왕 즉위년에 위례성(慰禮城)과 아단성(阿旦城)과 사성(蛇城) 등을 축성한 것 역시 북변의 군사적 안정을 기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마-1 기사].

제2단계 : 이를 바탕으로 하여 백제가 마한을 병탄·지배해 간 단계이다[온조기(溫祚紀)의 나·다 기사]. 먼저 웅천책(熊川柵)을 만들어 마한의 반응을 떠보고[나-1 기사], 마한 병탄을 위해 일정한 준비를 거친 다음에[나-2 기사] 마한의 국읍을 병합하고[나-3 기사], 마한 잔여 세력의 투항을 받아들임으로써[나-4 기사] 마한 병탄을 완료했으며, 이어 백제에 반(叛)하는 마한 토착세력을 진압하고 마한의 옛 영역에 축성을 행하여[다 기사] 이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제3단계 : 중국 군현이 백제를 적극 견제한 단계이다[책계왕(責稽王) 13년조(年條)(마-3 기사)와 분서왕(汾西王) 7년조(年條) 기사]. 책계왕 대의 마한 병탄으로 백제의 국력이 급격히 신장되자, 당시 북쪽의 고구려로부터 남침 위협을 받고 있던 중국 군현세력으로서는 남쪽의 백제 역시 새로운 위협 세력으로 비춰졌음직하다. 이런 면에서 중국 군현 세력이 맥인(貊人)과 함께 백제를 공격하여 책계왕을 전사시켰던 것은[마-3 기사] 백제에 대한 견제책의 극단적 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책계왕의 뒤를 이은 분서왕(汾西王)은 중국 군현에 대한 적극 공세로 맞서서 동왕 7년(304)에 낙랑의 서현(西縣)을 공취(攻取)하기도 했으나, 결국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그 역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곧 마한 병탄 이후에 백제와 중국 군현 간에 치열한 군사적 공방전이 야기되었음을 알겠다.

이렇게 본다면 책계기(責稽紀)에서 백제와 중국 군현과의 관계가 책계왕의 즉위 초년기와 말년기 사이에 우호관계에서 대립관계로 변한 이유가 설명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바로 백제의 마한 병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것이다. 즉, 백제의 책계왕은 마한 병탄을 노려 대방군과 정책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고 이를 강화해 갔던 것인데, 결국 백제가 전격적으로 마한을 병탄하자 허를 찔린 중국 군현은 백제에 대해 강경한 견제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추리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내용적 측면에 있어서도 온조기에 나오는 마한 병탄의 사건은 원래 責稽王 연간에 일어났던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상에서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의 형식적·내용적 측면에서의 검토를 통해서, 온조기(溫祚紀)에 나오는 백제의 마한 병탄 기사[온조왕 24년-27년 사이의 기사]의 원위치가 책계기(責稽紀)의 3년-12년(288-297) 사이일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는 바, 이제 이를 적극 수용하여 온조기(溫祚紀)와 책계기(責稽紀)의 대응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1> 온조기(溫祚紀)와 책계기(責稽紀)의 대응표

온조기 책계기 주요 내용
온조왕 24년조 책계왕 3년(288) 웅진책(熊津柵) 설치
온조왕 25년조 책계왕 4년(289) 백제왕, 마한 병탄 결심
온조왕 26년조 책계왕 5년(290) 마한 국읍 병합
온조왕 27년조 책계왕 6년(291)
마한 병탄 완료, 원산(圓山),금현성(金峴城) 항복

<표 1>에 의하면 온조기(溫祚紀)에서 온조왕 26년조에 나오는 마한 국읍 병합 사건은 책계왕 5년(290)에 일어난 것이 되고, 온조기(溫祚紀)의 온조왕 27년조에서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항복을 받아 마한을 완전히 병탄했다고 한 사건은 책계왕 6년(291)에 일어난 것이 된다. 그런데 <표 1>은 온조기(溫祚紀)의 마한 병탄 관련 기사를 책계기(責稽紀)에 최대한 앞당겨서 대응시켜 본 것이므로, 좀 늦춰서 대응시킨다면 마한 병탄 시기가 이보다 몇년 정도는 내려갈 수도 있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마한은 적어도 290년 이전에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 되고, 291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멸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은 {진서} 동이열전에서 마한의 사신 파견이 단절되는 시점과 정확히 일치되는 바여서, 마한의 사신 파견 단절 시점을 마한의 멸망 시점으로 본 견해와 관련하여 그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고 볼 것이다.

그렇다면 '진서' 동이열전에 나오듯이 277년에서 290년에 걸쳐 마한이 진(晋) 왕조에 자주 사신을 파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이 '진서' 동이열전에 의하면 입록된 동이제국 중에서 마한이 가장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나타나 있고 또한 부여국에 이어 마한을 두번째로 입록하고 있어, 마한의 사신 파견이 갖는 의미가 자못 궁금해진다. 이는 291년 경에 백제가 마한을 병탄한 것으로 파악한 앞에서의 논지와 관련지워 다음과 같이 추론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백제가 291년 경에 마한을 병탄하기 전에 일정 기간의 준비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백제의 위협에 대한 마한의 대응책의 하나가 바로 진(晋) 왕조에 대한 사신 파견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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