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다들 잘 아시는 사건일 테지만,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설명이 이 시점에서 필요할 것 같습니다.
[기자]
네, 1987년, 당시 23살의 서울대 재학생이던 박종철 군이 대공 수사관들에게 불법 연행을 당한 뒤 물고문으로 숨진 사건입니다.
당시 경찰은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로 조작된 사인을 발표했는데요.
정권 차원의 은폐 축소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해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앵커]
아시는 것처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시작부터 축소와 은폐였습니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그 때의 시대상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했지요. 그나마 진실을 밝히는 데에는 시민과 종교계, 특히 천주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수사팀은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고, 그 이후 예외없이 승승장구했습니다.
조민진 기자가 이 내용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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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정부는 이 사실을 조직적으로 축소 은폐하려 했습니다.
사건 수사를 맡은 검찰이 고문경찰관 2명을 구속기소했지만 한달쯤 지난 뒤,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이 3명 더 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도 수사를 미적거렸습니다.
그러다, 그해 5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가 있은 뒤에야 2차 수사를 벌여 3명을 추가 구속했습니다.
이 때문에 2009년 과거사위원회는 당시 검찰이 외압에 의해 진실을 왜곡했다며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공식 사과는 없습니다.
사건 수사검사였던 안상수 창원시장은 자서전을 통해 외압으로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데 대해 "부끄러웠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해서는 할 만큼 다한 수사였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안상수/당시 수사검사(오늘 청문회) : 지금의 잣대로 모든 것이 자유스럽게 수사할 순 있는 이때의 잣대로 보면 안 됩니다. 그때는요. 사실은 목숨 걸고…]
수사팀에 참여했던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도 같은 취지였습니다.
[박상옥/대법관 후보자(오늘 청문회) : 경찰의 조직적 사건 축소 다음에 은폐 이런 것들이 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 내용이었기 때문에…밝히는 과정이 좀 길고 힘들었다는…]
이들 수사팀은 이후 약속이나 한 듯 승승장구했습니다.
당시 신창언 부장검사는 헌법재판소 재판관까지 올랐고, 안상수 검사는 정계에 진출해 여당 대표까지 지낸 뒤 현재는 광역단체장으로 있습니다.
당시 박상옥 검사는 현재 사법부 최고 권위의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된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