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 2부의 문을 엽니다.
1987년 1월 19일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똑같은 진회색 방한복을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스무 명의 남성이 있습니다. 복제인간도 아닌데 모두 쌍둥이 같아 보입니다. 이들은 취재진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2대의 미니버스에 나눠 타고 구치소로 이동합니다.
스무 명 모두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때까진, 단 두 명. 이들의 얼굴을 가려주기 위해 경찰이 벌인 기상천외한 촌극이었습니다.
'복제인간'
오늘(7일) 앵커브리핑이 고른 단어입니다.
짐작하셨겠지만 경찰이 마치 숨은그림찾기 같은 상황까지 만들어가며 보호하려 했던 두 사람은 "턱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23살의 박종철 군을 물고문한 경관들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그들이 대공 업무를 맡고 있어 북한에 얼굴이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에 이런 촌극을 벌였다"는 말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지요.
고문 경관이 단지 둘 뿐이었겠느냐는 세간의 의심을 뒤로 하고 결국 두 사람만을 고문경관으로 내세운 경찰이, 그 두 사람마저 가리려고 벌인 일종의 가면극이 아니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웃지 못할 호송작전이 알려지면서 의혹은 더 증폭됐고 여론은 더 악화됐습니다.
1987년. 나라를 뒤흔들었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이 땅의 민주주의는 그의 죽음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28년이 지나 당시 검찰 수사팀 말석에 있었다던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가 오늘 진행됐습니다.
지각 청문회를 열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지요.
"검사로서 본분을 저버리지 않았다"
후보자는 당시의 수사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런 확신이 틀림이 없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그러나 2009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수사한 검찰에 대해 직무유기, 외압에 굴복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당시 말석에 있던 검사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이 과하다는 주장도, 또 그에 대한 반론도 무성합니다.
법관의 최정점의 자리인 대법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은, 87년 이후에도 마무리되지 않은 우리사회 미완의 과제를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은 누구의 말도, 또한 누구의 싯귀도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당시의 이 사진이 많은 말을 해주는 오늘이지요.
청문회의 결론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법관이 다뤄야 하는 우리의 법은 박종철의 죽음이 만들어준 민주 헌법이라는 사실입니다.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