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유체이탈’ 화법의 원형, “돈이 왜 필요해요?”
등록 :2015-04-22 15:40수정 :2015-04-22 15:47 [한겨레21]

“대선캠프에선 각자 알아서 돈 썼다… 어떻게 모았는지는 서로 알 수 없었다”
“VIP는 돈 세본 적이 없다”… 그럼, 그 돈은 누굴 위해 쓰였을까?


3월1일 박근혜 대통령이 중동 4개국 순방을 위해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라타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김기춘, 허태열한테만 줬겠나.”
“성완종 회장은 마당발이다. 친교를 넓게 하기 때문에 정치를 하면서 또 정치를 하기 위해서 돈을 많이 줬을 거다. 돈을 많이 돌렸다고 보면 된다.”
“그 사람들만 받았겠나? (리스트에 등장한 사람들은) 돈 받은 수많은 사람 중에 대통령과 관련 있는 이들일 것이다.”
“대선 때 지저분한 사람들은 여의도에 소문이 다 났다.”

명단이 가리키는 것 ‘박근혜 대통령’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가 터진 직후 여권 인사들의 반응이다. “터질 게 터졌다”는 식이다. 여권 분위기를 들여다보면 이번 사건이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음모’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성완종 전 새누리당 의원에게 돈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그만큼 많았고 이런 사실은 여권 내부에서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져 있었다는 뜻이다. 검찰이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기 이전에 이미 정치적 판단은 끝난 셈이다. 이런 분위기에 걸맞게 새누리당 수습 대책은 ‘망인의 근거 없는 주장 바로잡기’가 아닌, ‘이 사태를 최소화해 내년 총선 전에 가라앉히기’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분주한 새누리당의 분위기와는 달리 이 혼돈 속에서 멀리 비켜서 있는 이가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다.

성 전 의원이 지난 4월9일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 남긴 8명의 이름 가운데 7명이 친박 핵심이다. 허태열·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병기 현 청와대 비서실장은 박근혜 정부의 비서실장을 총망라한다. 거기에 이완구 국무총리, 유정복 인천시장, 서병수 부산시장,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은 친박 핵심 가운데서도 핵심이라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은 2012년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 캠프에서 각각 새누리당 충남선대위 명예위원장(이완구), 직능총괄본부장(유정복), 당무조정본부장(서병수), 조직총괄본부장(홍문종) 등 주요 직책을 맡았다. 이 명단이 가리키는 것은 이들 개인이 아닌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사건이 불거진 이후 일주일 동안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을 쓰다 중남미 해외 순방을 떠나버렸다. 박 대통령은 사건이 터진 사흘 뒤인 4월12일 “검찰이 법과 원칙에 따라 성역 없이 엄정히 대처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현 정부의 핵심 인사들과 측근들이 불법자금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에 대한 유감 표명은 없었다. 이후 4월15일에는 “부정부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과거부터 현재까지 완전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용납하지 않겠다’는 표현은 이번 사건은 오롯이 돈을 주고받은 이들의 잘못이며, 자신은 이들에게 단죄를 가하는 주체로 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부정부패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중심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은 완전히 배제된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완전히 밝혀야 한다’는 발언도 비리 수사 대상을 이전 정부와 야권까지 모두 포함하겠다는 의미로 사실상 검찰에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다. 그러고는 4월16일 이완구 국무총리의 거취에 대해 “(중남미 순방을) 다녀온 뒤 결정하겠다”며 나라를 떠났다.

2004년 천막당사 첫 일성

박 대통령의 이런 무책임한 대처 방식은 2004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당대표로서 총선 승리를 이끌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2003년 말 불거진 대선 불법자금 사태는 한나라당에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안기며 총선 패배의 위기를 불러왔다. 이런 상황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박 대통령은 부정부패 근절의 의미로 천막당사를 세웠다. 2004년 3월24일 천막당사에서의 첫 일성은 “국민 여러분께 지은 죄를 진심으로 참회한다”였다. “부정부패 비리 연루자를 보호하지 않을 것이며 유죄가 확정되면 영구 제명 조처를 취하겠다”고도 했다. 그러고는 조계사에서 108배, 영락교회에서 회개예배, 명동성당에서 고해성사를 올렸다. 이런 반성의 모습을 통해 박 대통령은 위기 속에서도 의석수 121석을 확보하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에 벌어졌던 문제와 현재 불거진 문제는 같다. 당의 대선 불법자금이다. 그러나 그때 머리 숙여 사과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은 현재 없다. 왜 그럴까. 지금껏 박 대통령이 했던 사과나 유감 표명의 면면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으로부터 ‘타자화’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2004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대선 불법자금의 주체가 아니었다. 한나라당에서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가 2002년 다시 복당한 박 대통령은 당 주류에서 밀려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이 위기에 몰리자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 등 당내 쇄신파들이 나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박 대통령을 당대표로 추대한 것이다. 결국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사과는 ‘대리 사과’였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사과가 아니었다. 본인도 그것을 잘 알았기에 기꺼이 사과와 반성의 행보가 가능했던 것이다. 2012년 총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박 대통령은 당시 디도스(DDoS·분산 서비스 거부 공격) 사태 등으로 위기에 몰렸던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등장했고, 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비리는 철저히 분리돼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는 현직 대통령이고 리스트의 8명 가운데 7명이 정권의 핵심 인사 또는 측근이다. ‘타자화’가 불가능하다. 대통령이 사과를 하면 오롯이 대통령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된다. 이는 도덕성을 무기로 버텨온 박 대통령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일 것이다. 새누리당 안에서도 이번 사태와 박근혜 대통령은 분리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대통령은 끝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이번 사태가 대통령까지 가게 되면 계파를 떠나 내년 총선에서 폭삭 망하게 된다. 거기까지는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VIP에게 돈 달라고 하면 돌아온 말은…


4월14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생각에 잠겨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당내에서는 성완종 사태와 박근혜 대통령을 분리시키려는 논리로 “박 대통령은 돈에는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한다. 여권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본인이 평생 계산을 안 해보신 분이다. 평생을 그리 살았으니 그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활동비를 각자 조달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선거 캠프에) 돈이 좀 들어가나. 건물 임대료와 상근자 월급 등 들어갈 데가 많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기업인들한테서 당긴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새누리당 관계자는 “대선 캠프에서 VIP에게 돈 달라고 하면, ‘돈이 왜 필요해요?’라고 하는 상황이라서 각자 알아서 돈을 썼다. 그런데 어떻게 각자 돈을 모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결국 대선 불법자금은 박 대통령과는 무관하게 밑에서 저지른 일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으로 박 대통령의 도덕적·정치적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이끄는 조직의 돈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고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은 리더로서 그만큼 무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종배 시사평론가는 “정치적 맥락과 정치적 책임의 귀속 문제에 대해서 얘기해야 한다. (누가 돈을 받았든) 박 대통령의 정치자금으로 쓰인 것이다. 물론 박 대통령이 몰랐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궁극적인 책임 당사자가 박 대통령이 되는 게 부정되느냐.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창열 용인대 교수도 “돈의 흐름을 파악 못했다고 하더라도 후보로서 총체적인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한다. 대통령이 거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자기 캠프에서 일어난 일인데 ‘난 몰랐다’고 하는 말로 국민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겠나”라고 했다.

박 대통령의 ‘모르쇠’식 리더십이 오히려 이런 사태를 불러온 원인이 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을 지낸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본인은 완전히 모른다고 하는 얘기가 이런 때는 득이 되기도 한다. 직접적인 불꽃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면 그런 식의 리더십 때문에 이렇게 뿌리까지 흔들린다는 측면도 있다.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교도소의 담벼락을 걷다가 잘못하면 교도소 담장 안으로 들어간다’는 정치판에서 홀로 도덕성을 유지하며 민감한 문제에는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방식의 리더십이 오히려 주변의 부패를 키우는 부메랑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검찰의 힘을 빌려 경쟁자에게 사정의 칼날을 들이대는 식의 권위주의적 국정 운영이 만든 참극이라는 분석도 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박 대통령이 정부를 운영하는 방법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그동안 박 대통령은 공약했던 것을 열심히 실천하는 게 아니라 본인의 권력을 누수 없이 열심히 관리하려고만 했다. 처음부터 검찰을 활용한 정치를 하면서 라이벌 세력을 관리해왔다는 생각이다. 이번 사태는 그런 방법이 낳을 수 있는 묘한 복수극 같은 느낌이 든다. 본인의 권력정치가 이런 사태를 가져온 면이 있다”고 했다.

도덕성의 상처, 리더십의 위기

대통령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이번 사태는 박근혜 정권의 도덕적 정통성과 리더십에 치명타를 안길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권은 공고한 도덕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 올려진 정권이다. 유권자들 사이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돈 문제만큼은 깨끗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깨졌다. 이는 이명박 정부 등 당선 이전부터 도덕성 문제가 불거져나왔던 정권들이 같은 상황에서 받을 타격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대선 불법자금이 실제로 드러난다면) 정권을 창출한 것부터 원천적으로 부정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검찰 수사는) 거기까지는 연관성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 맺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정권의 핵심들이 사건에 연루된 것만으로도) 이미 도적적·정치적으로는 타격이 크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권의 무능함과 책임 회피를 봐주기에는 국민이 이미 지쳤다는 점도 정권이 위기를 맞고 있는 주요 원인이다. “지난해와는 상황이 다르다. 유권자 입장에서는 이게 첫 번째 충격이 아니다. 이 정부의 정통성과 관련해서 볼 때 우선 집권하자마자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문제가 있었다. 박 대통령은 ‘몰랐다’고 했지만 유권자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막 뽑아준 정부였고 다른 대안이 없으니 넘어가준 것이다. 두 번째로 세월호 충격이 있었다. 정부의 대처는 지지부진했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가족들의 요구가 무리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아무것도 안 돌아가게 만드는 정부의 무능에 대한 인식은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충격이다. 유권자 입장에서도 이제는 임계점을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의 분석이다.

도덕성에 대한 상처는 리더십의 위기를 불러온다. 지난해 말 터진 ‘정윤회 국정 농단 사태’와 청문회 과정에서 불거진 신임 총리의 도덕적 결함은 이미 국정 동력의 상실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추진한 ‘비리와의 전쟁 선포’가 또다시 박 대통령과 연결된 부정부패를 드러내는 부메랑으로 작용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것으로써 박근혜 정권의 리더십은 이미 큰 상처를 입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최창열 교수는 “깨끗한 선거를 하겠다고 했는데 대선자금에 연루됐다면 국민들이 바라볼 때 도덕적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는 집권 3년차에 레임덕과 바로 연결된다고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도 “인사 실패가 계속 축적되면서 신뢰가 무너졌다. 국정 동력이 상실됐고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정권이 녹다운 직전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지루한 공방전을 펼쳐 물귀신 작전으로 가면 더 망가질 수밖에 없다. 국정을 쇄신하려면 초당적인 중립 인사로 총리를 추대하고 중립 내각을 새롭게 구성해 나머지 일정을 이끌어가야 한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다”라고 말했다.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나는 몰랐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건을 덮거나 회피하려 하지 말고 모든 의혹에 대해 국민에게 사실관계를 명확하고 성실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오히려 국민이 가진 불신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완화하는 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나는 몰랐다”는 방식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사죄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서복경 선임연구위원은 “당장 시급한 것은 유권자들의 불신을 먼저 다독여야 하고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 정도는 해줘야 일이 해결된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정권마다 불거지는 대선 불법자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상훈 대표는 “제대로 된 정치라면 사회로부터 돈도 나오고 후원자도 나오고 자원봉사자도 나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치는 사회적 기반 없이 권력이나 영향력에 매달려 있는 구조다. 그러다보니 좋은 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이런 구조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 돈을 가진 사람, 언론 등 영향력이 있는 곳을 통해서 정치적 자산을 얻으려고 한다. 정치가 사회를 잘 대표하는 방식으로 돈이나 지지를 받은 구조가 아닌 것이다. 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은 바로 그런 문제가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성완종 전 의원이 권력을 얻기 위해 돈을 뿌릴 수밖에 없었던 비뚤어진 한국의 정치 구조를 바꿔야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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