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815.newstapa.org/#/3
관련기사 : [해방 70년 특별기획]친일과 망각 3부 ‘부의 대물림’ - 뉴스타파
친일재산조사위가 환수한 친일 재산을 금액을 따치면 모두 2,105억 원어치다. 친일파 별로 보면 이해승의 후손로부터 320억 원, 이근호 후손 150억 원, 박희양 120억 원, 김춘희 115억 원, 민상호 110억 원, 박철희 84억 원 등이다.
제3부 부역의 대가, 부의 대물림
1. 일제 강점기, 강원도 영월
온 마을이 떠들썩하다. 널찍한 가설무대가 세워졌고, 당대 최고의 명창과 고수가 등장했다. 춘향전에 이어 가야금 가락에 승무가 펼쳐지고, 경기민요가 흥을 돋군다. 마을 사람들은 구경에 신바람이 났다. 잔치는 여러 날 계속됐다.
일제 강점기 어느 날,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큰 잔치 풍경이다. 고 안비취 명창은 지난 93년 이 잔치에 초청 공연을 갔던 기억을 술회한 바 있다. 자신을 비롯해 조선 말기 판소리 5대 명창인 이동백, 산조 명인 정남희, 춘향모 역의 당대 1인자였던 박초월, 가야금 병창의 명인 오태석, 줄타기의 명고수 이정업, 조선의 마지막 무동이었던 김천흥, 나중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받는 강선영 등이 가설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말 그대로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총출동한 셈이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들을 죄다 불러 잔치를 벌일 수 있었을까? 잔치를 마련한 이의 권세와 재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주인공은 장준영, 아버지를 위해 거창한 잔치를 마련했다고 한다. 장준영은 1942년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이하 반민규명위)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포함시켰다.
당시 결정보고서를 보면 장준영은 평북 후찬군 일대 100만평의 광업권을 설정할만큼 큰 부자였다. 또 ⟨강원神社(신사)⟩ 공사에 1만원, 육영 사업비에 6만 원, 국방헌금 1천원을 내기도 했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보석으로 풀려났다. 당시 그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거나 몰수됐다는 기록은 없다.
장준영 결정문
장준영(1906~1975)은 강원도에서 활동한 인물로 1928년 9월 동아일보 강원도 영월군 지국장을 지냈으며, 1930년부터 1935년까지 강원도 관동운수주식회사 이사에 임명되어 사장까지 지냈다. 1933년과 1937년에는 강원도 도회의원에 민선으로, 1941년에는 관선으로 임명되었다.(중략)
1939년 영원군청 신축 기성회 회장, 영월철도 기성회 대표를 지냈으며, 11월에는 영월군에 소재한 소학교와 군청사에 각각 5천원씩을 기부하였다. 1940년에는 일본적십자사로부터 공적이 인정되어 유공장을 받았으며, 다음해인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강원도지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2년 6월 3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이던 1942년 9월에는 원목생산조합 강원도 설립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44년에는 조선총독부 상공경제회 설립위원으로 임명되었다.(중략)
이러한 장준영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호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에 해당된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장준영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9호에서 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
출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4권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장준영은 해방 이후에도 강원도 평창군 부암광산과 홍천군 가족광산을 운영했다.
출처: 친일인명사전 - 장준영
해방 60년이 지난 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친일재산조사위)는 본격적으로 장준영의 친일재산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모두 12건이었다. 그러나 친일재산으로 확정한 것은 1건에 그쳤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 장림리에 있는 하천 162 제곱미터가 그것이다. 시세는 129만 6천 원, 결국 친일재산조사위는 장준영의 친일재산 중 129만 원어치만을 친일재산으로 확인해 국가로 귀속시킨 것이다.
어디 장준영 뿐이겠는가, 조선 최대의 땅 부자였다는 김갑순, 조선귀족 출신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던 민영휘, 7,000만 제곱미터의 땅을 가졌다는 송병준 등 친일파가 소유했던 재산은 가늠하기조차 힘든 규모였다. 해방 70년이 된 지금 그들의 재산은 어디로 갔을까? 정부는 이 친일재산 가운데 얼마나 찾았을까?
2. 2015년 7월 22일, 법무법인 해마루
장완익 변호사는 요즘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법무법인 대표변호사인데다 현재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비상임위원을 맡고 있다. 몇 년 전 일과 관련해 인터뷰를 요청하는 게 내심 미안했지만 장 변호사는 선뜻 받아들였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06년 출범한 친일재산조사위의 사무처장으로 4년 넘게 활동했었다.
취재진은 법무법인 해마루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약속보다 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서둘러 인터뷰를 시작하려는 순간, 그는 문서 한 장을 꺼냈다. 2010년 7월 7일자 보도자료였다. 제목은 ⟨친일재산 국가귀속 임무 완수 관련 보도자료⟩ (2010.7.7.친일재산조사위). 친일재산조사위가 발표한 마지막 보도자료였다. 그가 하필 이 보도자료를 보여준 이유는 뭘까? 아직 친일청산의 할 일은 여전히 많은 데, 위원회의 활동을 마감해야 했던 아쉬움의 다른 표현이 아니였을까? 순간, “갈 길은 먼데 날은 저문다”는 옛 싯구가 떠올랐다. 그와 만남이 끝날 무렵 8층 사무실 안으로 오후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당시 보도 자료
친일재산조사위에서 사무처장으로 활동한 장완익 변호사는 당시 기자들을 상대로 ‘대변인’ 역할까지 도맡았다. 기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뭐였는지 물어봤다. 짐작한 대로 “위원회가 어느 정도 친일재산을 찾아내 국가에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였다. 그는 주로 “아직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실제로 남아 있는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는 조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는 식으로 답했다고 한다.
해방 후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을 감안할 때, 4년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에 그래도 여의도 1.5배 규모의 토지를 국고로 환수한 것은 적지 않은 성과였다는 게 당시 언론들의 총평이었다. 이 역사적 작업을 주도했던 장 변호사는 9년이 지난 지금 친일재산조사위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소송 참여 후손들을 친일파 별로 집계해보면, 삼양사 설립자 김연수의 후손과 조선 최대 갑부였던 민영휘의 후손이 각각 30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이어 김정태 후손 14명, 윤정현 후손 11명, 이달용 후손 10명, 조성근 후손 9명, 박철희 후손 6명 순으로 집계됐다.
이들 소송에 참여한 친일파 후손들 가운데는 국적 포기자가 11명, 해외 거주가 28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49명은 직업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기업인 19명, 의료인 9명, 대학교수 6명, 금융인 6명, 법조인 1명 등으로 나타났다.
5. 2015년 5월, 뉴스타파 사무실
접근이 가능한 모든 자료를 뒤져 찾을 수 있는 만큼 찾았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 1,177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이들의 학력과 직업도 확인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여기서 좀 더 나아가고 싶었다. 이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거주지와 소유 주택은 적어도 그 사람의 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라고 판단됐다.
하지만 거주지를 파악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인물정보 데이터베이스에는 직업과 학력, 기본 경력 정도는 나오지만 거주지를 제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민이 계속됐다.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자료들을 확인해보자는 것, 그리고 친일재산조사위가 친일 재산의 국가귀속을 결정하면서 고시한 자료를 살펴보자는 방안 등이었다.
취재팀은 무려 5천 건이 넘는 국가귀속 대상 토지를 확인하고 등기부를 열람해 친일파 후손들의 주소지를 확인했다. 이를 토대로 후손들의 거주지를 찾아냈다. 세입자인 경우는 제외시켰다. 오랜 작업 끝에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 475명의 거주지 475곳을 확인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과 경기도가 각각 300곳, 100곳으로 전체 84%였다.
서울은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등 이른바 강남3구가 130건으로 43.3%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에 거주하는 친일 후손의 절반 가까이가 강남3구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강남3구 이외의 거주 지역도 부촌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가령 서울 영등포구에는 친일파 후손의 거주지 10곳이 확인되는데, 6곳이 상대적으로 부촌인 여의도동에 몰려있었다. 나머지는 신길동 1곳, 대림동 1곳, 영등포동 1곳, 양평동 1곳 등이었다.
주거형태로 보면 단독주택의 경우 한남동, 이촌동, 성북동, 평창동 등 전통적인 부촌에 많이 분포됐다.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부터는 강남지역으로의 이동이 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서울 강남3구와 경기도 분당지역에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은 144명으로 나타났다. 친일파 후손들의 주거형태도 세월이 흐르면서 사대문 안의 전통적인 ‘강북’지역 부촌에서 신흥 부의 상징인 ‘강남’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풀이된다.
‘조물주’ 보다 더 좋은 직업은 건물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뉴스타파의 확인결과 23명의 친일파 후손들이 상가와 임대주택을 소유한 임대사업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상가 건물의 경우 상속이나 증여를 통해 부의 대물림이 이뤄지고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서울 삼성동에 있는 시가 40억∼50억 원을 호가하는 건물이 그렇다. 이 빌딩은 친일파 김서규의 아들의 소유였다가 2001년 김서규의 손자에게 상속된다. 아들과 손자는 둘 다 대학교수다. 김서규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도지사를 지냈으며, 3.1운동 당시 군민을 단속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에게 현상금을 걸기도 한 인물이다. 천황과 일제를 찬양하는 한시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서규 아들과 손자 소유 상가 등기부등본 사진
서울 이태원동에 있는 민영휘 후손의 저택도 마찬가지다. 이 저택의 규모는 324 제곱미터다. 수십억 원을 호가한다. 폐쇄 등기부등본을 확인해보면, 적어도 1970년 이전부터 민영휘의 증손자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이후 1980년 민영휘 증손자는 이 주택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이후 다시 부인에게 소유권을 넘어갔다. 그리고 친일재산조사위가 민영휘의 친일재산을 본격적으로 조사하던 2008년 돌연 이 집을 매각했다. 이 저택의 마지막 소유자인 민영휘 후손은 1972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민영휘 후손이 한때 소유했던 이태원동 저택
6. 2015년 6월, 뉴스타파 사무실
2015년 6월,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과 거주지를 추적하던 뉴스타파 제작진은 관련 자료를 찾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제목은 ‘친일파와 일제 강점기 토지’, 저자는 홍경선 청운대 교수다. 홍 교수는 2006년부터 4년 동안 친일재산조사위에서 전문위원으로 친일재산 조사와 추적 업무를 담당한 경력이 있다. 그는 책에서 일제 때 각종 자료 등을 근거로 해 일제 강점기 동안 친일파가 축적한 토지 규모를 추산해 냈다. 홍 교수의 추정치는 대략 1억 3천만 평, 4억 3천만 제곱미터에 이른다.
4억 3천만 제곱미터는 현재 서울시 면적의 2/3에 해당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그렇다면 이들 토지는 해방 이후 어떻게 됐을까?
지난 2006년 친일재산조사위가 해방 후 처음으로 정부 차원에서 친일 재산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친일재산조사위가 조사 대상으로 삼은 토지는 5천 필지, 면적은 2,181만 제곱미터였다. 이것은 홍경선 교수가 추산한 친일파 축적 토지의 5% 수준이다. 여기에서 친일재산조사위가 친일 재산으로 최종 확정해 국가에 귀속시킨 토지는 1,300만 m2에 불과했다. 3%대로 줄었다.
정부는 국가로 귀속시킨 토지를 매각해 그 돈을 독립운동가 후손 지원에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국가에 귀속된 토지 가운데 실제 매각된 것은 얼마나 될까? 국가보훈청에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130만 제곱미터가 매각됐다는 답변이 왔다. 결국 친일반민족 행위자가 일제 때 축적한 것으로 추정되는 토지 가운데 불과 0.3%만이 국가에 귀속돼 매각 처리된 셈이다. 해방 후 70년 동안 친일 청산이 얼마나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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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 환수가 이렇게 부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뉴스타파는 친일재산조사위에서 활동했던 전문가 3명을 차례로 만나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들었다.
7. 2015년 7월 8일, 경기도 의정부
반민특위 위원장이자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김상덕의 장남 김정륙 선생의 자택에 들어서면서 서글픈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이 사는 곳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부인과 사별한 이후 혼자 살고 있는 경기도 의정부 시의 아파트는 외벽 균열이 생긴 곳에 페인트 칠이 돼 있어 누더기처럼 한 눈에도 누추해 보였다. 김정륙 선생은 아파트 구석 작은 방에 커다란 병풍을 보관하고 있다. 12폭에, 펼치면 5미터 길이의 이 병풍은 그에겐 한없이 소중한 가보이다. 하지만 방이 좁은 탓에 펼쳐 놓지도 못하고 있다. 그는 좁은 방에서 병풍을 꺼내 거실에서 취재진에게 펼쳐보였다. 좁은 거실을 가득 메웠지만 완전히 펴지지 않는다.
이 병풍에는 그의 아버지 김상덕이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 중 주도했던 1919년 2.8 독립선언의 선언문 전문이 새겨져 있다. 김정륙 선생은 이 병풍에 담긴 독립선언문 글귀에서 아버지의 향기를 느낀다고 했다. 병풍의 글은 김정륙에게 단순한 글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정신이 각인되고, 아버지의 신념이 살아있는 글이다.
병풍을 온전하게 펼쳐 놓을 수 있는 곳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병풍을 펼쳐놓고 보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김정륙, 하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그의 소박한 꿈은 현재로선 그저 꿈일 수밖에 없다.
뉴스타파 해방70년 특별기획 디지털 스토리 ‘친일과 망각’ 다음 편에서는 오랜 고민 끝에 뉴스타파 카메라 앞에선 시인과 목사, 그리고 정치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인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친일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고, 친일 청산과 과거 극복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진솔하게 말합니다.
취재, 글 : 김강민 김용진 박중석 송원근 심인보 이보람 최윤원
디자인 : 최미정
사진 : 김남범 최형석
출판 : 임종헌
자료조사 : 김민정 김태민 박단비 박주은 임세지 서가람 정상석 제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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