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2161


‘500년 조선’을 파는 매국 협상, 30분 만에 상황 종료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23호 | 20110619 입력  

숲이 우거지면 그늘도 깊다. 조선은 일본의 군사 강점과 고종의 무능, 인조반정 이래 집권당이었던 노론의 매국이 결합해 망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그 폐허 속에서 제국의 복벽(復辟:망한 왕조를 다시 세움)이 아니라 민주공화제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그 절망 속에서 대한민국이 탄생을 위해 꿈틀대고 있었다.

한일합방에 찬성한 내각 각료들이 일본을 견학하고 있다. 아래에서 둘째 줄 왼쪽 여덟째가 대원군의 아들 이희(이준용 부친), 두 사람 건너 이재각, 한 사람 건너 순종의 장인 윤택영.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⑬환호하는 수작자들

총리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이 한밤중에 몰래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를 찾아가 매국(賣國) 조건에 대해 협상하고 간 사나흘 후 이인직은 밤중에 다시 그를 찾아갔다. 이완용은 이인직을 통해 “‘병합 조건이 의외로 관대하다면서 이런 방침이라면 병합 실행은 그렇게까지 곤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단 너무 오래 끌면 여러 가지 장애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실행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자칫 일진회에 매국의 공을 빼앗길까 조바심이 난 것이다. 이완용이 서두르자 고마쓰는 ‘데라우치 통감은 이토와 달리 복잡하게 얽힌 교섭 등은 아주 싫어한다’면서 “요구 같은 말을 꺼내거나 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감정을 해쳐 장래에 불리한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고 말했다. 어떤 요구도 하지 말고 주는 떡이나 먹으라는 뜻이었다.

고마쓰가 1934년 경성일보(京城日報)에 쓴 ‘데라우치(寺內) 백작의 외교 수완’의 핵심은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를 상호 경쟁시키는 것이었다. 그간 일본은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사살이 합방을 앞당기는 계기가 된 것처럼 설명했지만 사실과 다르다. 이토는 이미 그해 4월 총리 가쓰라, 외무 고무라와 3자 회합에서 한국 병합에 찬성했고, 일본 각의는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한국을 병합하려면 먼저 격렬하게 저항하는 의병을 진압해야 했기에 8월 14일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臨時韓國派遣隊司令部)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 실시계획’을 세웠다. 의병이 가장 활발했던 호남을 중심으로 충청도와 영남까지 일체의 의병을 뿌리 뽑겠다는 군사계획이었다. 계획의 제12조는 ‘토벌대는 전 지구 내를 빠짐없이 수색하여 전후종횡으로 행동하고 특히 산지와 촌락은 엄밀히 수색을 실행한다’고 규정했다. 제14조는 ‘거주 남자(20세 이상~60세 미만)를 대조·조사하고 각 가옥을 임검(臨檢)한다’고 규정해 전체 주민을 작전 대상으로 삼았다. 같은 사령부에서 9월에 보고한 ‘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 보고’는 영남과 호서(충청)에도 의병이 자주 출몰하지만 특히 호남은 “다른 도에 비하여 적세가 창궐하고 수괴가 각지에 할거해서 그 세력이 강대하다. 대병력으로 일거에 이를 탕진하는 방책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1 조선총독부장. 2 3대 조선통감 겸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후 조선총독 자리엔 군인들이 부임하는 게 원칙이 되었다.

“전라남북도의 한국인은 청일·러일전쟁에 있어서 한 번도 우리 군대의 활동을 보지 못해서 그 진가를 모른다. 문록(文祿:임진왜란)의 옛날을 몽상해서 일본인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단연 대토벌을 결행, 파견대의 전력을 기울여서……남쪽 벽촌과 산간도서의 한국인들에게까지 황군(皇軍)의 엄숙하고 용감한 무위(武威)에 놀라게 해서 일본 역사상의 근본적인 명예회복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 ‘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 보고(南韓暴徒大討伐實施報告)’)”

남한 대토벌을 임란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엿보인다. 일본군의 통계는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의병 사상자가 2만1485명이라고 전하지만 민간인 사상자가 누락된 숫자다. 일제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로 전국을 군사적으로 강점한 후 매국 친일파들을 이용해 병합하는 수순을 밟은 것이다. 고마쓰로부터 보고를 받은 통감 데라우치는 이완용에게 통역관을 보내 통감 저택으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완용은 이때 다시 일진회의 허를 찔렀다. 이인직의 일본 정치학원 동창이자 일본어에 능했던 농상무대신(農商務大臣) 조중응을 대동하고 데라우치를 방문한 것이다. 소론 조중응을 끌어들여 집권 노론이 주도하는 합방 공작을 야당인 소론 일부에 떠넘기려 한 것이다. 1910년 8월 16일 이완용·조중응은 일본의 호우 피해를 위문한다는 표면적 핑계로 데라우치를 방문했다.

고마쓰는 “통감 저택 내의 한 방에서 데라우치 통감은 이·조 두 대신을 면회하고, 일·한 병합의 피할 수 없는 사정과 장래의 처분 안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하시고, 그 대요를 필기한 각서를 건넸다”고 전하고 있다. 합방 후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각서를 받은 두 사람이 30분 만에 통감 저택을 나왔다. 혹시 병합 담판이 아닐까 주목하던 내외 신문·통신들도 30분 만에 ‘500년 종사’를 파는 매국협상이 이뤄질 수는 없다고 보고 위로 방문으로 여겼다. 고마쓰가 전하는 유일한 이견은 이완용 등이 “한국 원수(元首:조선 황제)의 칭호를 대공(大公:국왕과 공작 사이)으로 하는 게 어떠냐는 문의가 있어 일본 측은 오히려 구래(舊來)의 칭호인 국왕으로 하는 것이 낫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효종 국상 때 국왕이 아니라 사대부가의 예법을 적용해 1년복설을 주장한 것처럼 조선 국왕을 임금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사대부 계급으로 여겨왔던 인조반정 이래 노론 당론이 다시 확인되는 셈이었다. 두 대신이 데라우치를 만난 지 6일 만인 8월 22일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되었다. 군사 강점 상태에서 매국 친일파들과 맺은 조약이므로 굳이 황제의 재가가 없다는 사실을 거론할 필요도 없는 불법 조약이었다.

‘조선총독부관보’등에 따르면 두 달이 채 못 된 1910년 10월 12일 조선총독부는 매국 친일파 76명에게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을 지급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의 각서를 토대로 만든 이른바 ‘한일병합조약문’ 제5조에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勳功)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恩級)을 부여한다’고 명기한 데 따른 포상이었다. 76명의 수작자(授爵者)들을 분석하면 두 가지 흐름이 발견된다. 하나는 왕실 인사들이다. 가장 고위직인 후작은 이완용을 제외하면 이재완·이재각·이해창·이해승 등 모두 왕실 인사였다. 윤택영은 순종비 윤씨의 친정아버지였고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였다. 또 하나는 사실상 ‘노론 당인 명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권 노론 일색이었다. 76명 중 소속 당파를 알 수 있는 64명의 당적을 분석하면 남인은 없고, 북인이 2명, 소론이 6명, 나머지 56명은 모두 노론이다. 후작에서 자작까지 31명의 명단과 소속 당파는 다음과 같다(조선귀족열전(朝鮮貴族列傳)명치 43년(1910), 조선신사대동보(朝鮮紳士大同譜)대정 2년(1913), 조선귀족약력(朝鮮貴族略歷:1929년께)등을 참조해 작성한 것임) 

후작 이재완(李載完:대원군 조카)
후작 이재각(李載覺:왕족)
후작 이해창(李海昌:왕족)
후작 이해승(李海昇:왕족)
후작 윤택영(尹澤榮:본관 해평, 순종 장인, 노론)
후작 박영효(朴泳孝:본관 반남 철종 사위, 노론)
후작 이완용(李完用:본관 우봉, 노론)
백작 이지용(李址鎔:본관 전주, 노론)
백작 민영린(閔泳璘:본관 여흥, 순종비 민씨 오빠, 노론)
백작 송병준(宋秉畯:본관 은진, 자칭 노론)
백작 고희경(高羲敬:본관 제주, 중인)
자작 이완용(李完鎔:본관 전주, 노론)
자작 이기용(李埼鎔:본관 전주, 노론)
자작 박제순(朴齊純:본관 반남, 노론)
자작 조중응(趙重應:본관 양주, 소론)
자작 민병석(閔丙奭:본관 기흥, 노론)
자작 이용식(李容植:본관 한산, 노론)-3·1운동 가담 작위 박탈
자작 김윤식(金允植:본관 청풍, 노론)-3·1운동 가담 작위 박탈
자작 권중현(權重顯:본관 안동, 한미한 가문 출신)
자작 이하영(李夏榮:본관 경주, 한미한 가문 출신)
자작 이근택(李根澤:본관 전주, 노론)
자작 임선준(任善準:본관 풍산, 노론)
자작 이재곤(李載崑:본관 전주, 노론)
자작 윤덕영(尹德榮:본관 해평, 노론, 순종 처숙부)
자작 조민희(趙民熙:본관 양주, 노론)
자작 이병무(李秉武:본관 전주, 무과 출신)
자작 이근명(李根命:본관 전의, 노론)
자작 민영규(閔泳奎:본관 여흥, 노론)
자작 민영소(閔泳韶:본관 여흥, 노론)
자작 민영휘(閔泳徽:본관 여흥, 노론)
자작 김성근(金聲根:본관 안동, 노론)

자작 이상은 소론 조중응 외엔 노론 일색이었다. 송상도(宋相燾)가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일부는 조선총독부의 강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수작을 거부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작위를 거부한 조정구(趙鼎九)·민영달(閔泳達)·한규설(韓圭卨) 같은 노론 인사들도 있었는데 모두 남작이다. 조선은 일제의 군사 점령과 고종의 무능에 집권 노론의 매국 당론이 더해 멸망했다. 집권당이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한 사례였다. 그러나 역사는 음지에서도 꽃을 피운다. 음지일수록 그 꽃은 더욱 찬연하다. 이런 폐허 속에서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의 싹이 트고 있었다.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제의 싹이었다.(망국의 몇 풍경 끝. 다음 호부터는 ‘절망을 딛고서’가 시작됩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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