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3116.html

블랙리스트 공작, 국정원이 개입했다
2008년 청와대가 작성한 ‘문화권력 전략’ 보고서 ‘좌파 청산-우파 지원’ 
2013년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와 일치… MB 정부 때부터 시작된 공작정치
제1150호 등록 : 2017-02-20 16:44 수정 : 2017-02-23 15:17

이렇게 취재했습니다

‘블랙리스트’는 언제 어떻게 등장한 것일까. 그 의문에서 취재를 시작했다.

우선 <한겨레21>이 단독으로 입수한 여러 문서를 분석했다.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의 공소장을 통해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판단한 범죄 혐의를 분석했다. 이를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수첩 내용과 일일이 비교했다. 또한 더불어민주당 도종환·진선미 의원실, SBS 등 다양한 경로로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내부·기밀 문서들도 확보했다.

이후 관련자들을 취재했다. 김인수 전 영화진흥위원회 사무국장을 비롯한 전·현직 영진위 직원들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인터뷰했다. 이들은 블랙리스트 작성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거나 피해를 입은 당사자였다. 이 가운데 다수는 익명을 요청했다.

2주에 걸친 취재 결과, 블랙리스트는 이명박 정부 시기 이미 작성됐고 박근혜 정부가 그대로 이어받아 실행했으며, 두 정부에 걸쳐 그 기획과 실행에 국가정보원이 깊숙이 관련된 점을 파악했다. 청와대, 국정원, 문화체육관광부, 그리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등이 한 몸으로 움직인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비로소 드러났다.

취재 김완·김선식 기자, 편집 허윤희 기자, 디자인 장광석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부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 때 이미 기획된 것들이 보수 정권 체제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박영수 특검팀은 반드시 이 부분을 더 조사해야 한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21>이 입수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공소장을 보면, 2013년 9월 초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은 보고서 하나를 받았다. 보고서 제목은 ‘예술위의 정부 비판 인사에 대한 자금 지원 문제점 지적’(이하 ‘예술위의 정부 비판’). 보고서를 작성한 곳은 국가정보원이었다. 국정원이 정부 비판 문화계 인사를 직접 조사했다는 증거다.

같은 공소장을 보면, 김기춘 비서실장은 이 보고서를 토대로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 수행을 방해하기 위하여 국론 분열의 획책을 목표로 국정 흔들기를 시도하는 세력들이 의도적으로 정부 비판 여론을 조성하고 있으므로, 이에 찬동하는 문화예술인 등에 대한 정부 지원을 보다 적극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굳혔다.

공소장에는 2013년 9월9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이 발언한 내용도 있다.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가 메가박스에서 상영되는 것은 종북 세력이 의도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작자와 펀드 제공자는 용서가 안 된다.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개구리>도 용서가 안 된다.”

국정원이 문화계 인사의 정치 성향을 조사한 보고서를 올리고, 청와대가 이를 근거로 문화예술계에 직접 개입한 것이다. 이후에도 김 비서실장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여러 차례 ‘문화예술계 정화’를 지시했다고 공소장은 밝혔다. “좌파 성향 단체들에게 현 정부가 지원하는 실태를 전수조사하고, 그에 대한 조치를 마련하라”고 거듭 지시했다는 것이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런 내용을 근거로 문화예술계의 특정 인물·단체 등을 탄압한 ‘블랙리스트’를 추적했고, 마침내 김기춘 비서실장을 구속시켰다. 그러나 블랙리스트의 전모를 밝히려면 김기춘 비서실장에 앞서 블랙리스트를 작성·집행한 이들부터 살펴야 한다. 특검이 아직 손대지 못한 대목이다.

① ‘블랙리스트’ 공작, MB 정부가 입안했다


<한겨레21>이 도종환 의원실, 진선미 의원실, SBS 등으로 부터 입수한 블랙리스트 관련 여러 기밀 문건과 박영수 특검팀의 공소장과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수첩을 비교해본 결과, 국정원이 지속적으로 개입한 걸 확인했다. 시민단체들의 주장대로 이 과정은 정치 공작이었다.
2013년 김기춘 비서실장의 발언 기조는 2008년에 작성된 또 다른 문건과 정확히 일치한다. 2008년 8월, 이명박 정부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실은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이하 ‘문화권력 전략’)이란 제목의 대외비 보고서를 작성했다.

<한겨레21>이 더불어민주당 도종환·진선미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문화권력 전략’ 보고서는 모두 7쪽 분량이다. ‘Ⅰ.문화권력은 이념지향적 정치 세력 Ⅱ.좌파 세력의 문화권력화 실태 Ⅲ.균형화 추진 전략 Ⅳ.주요 대책(안) Ⅴ.추진 체계 및 재원계획 Ⅵ.향후 일정’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보고서는 “좌파는 지난 10년간 정부의 조직적 지원하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중심으로 주도 세력으로 부상”했다고 진단했다. 이전 정부에서 만들어진 문화 관련 민간 위원회(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는 ‘(문화계) 예산 지원을 민간 좌파 인사들이 주도하기 위해 구성되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괴물> <공동경비구역 JSA> <효자동 이발사> 등 당시 흥행 영화들은 “대중이 쉽게 접하고 무의식중에 좌파 메시지에 동조하게 만드는 수단”이 됐다고 짚었다.

이 문서는 청와대가 직접 작성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일 나치나 동독 슈타지의 문화예술계 탄압에 비교될 만한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명박 정부는 이를 실제로 집행했다.

문화권력 전략 문건을 보면, “대부분의 문화예술인은 정부와 기업의 지원금에 의존하는 점을 고려, 의도적으로 자금을 우파 쪽으로만 배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할 것을 대책으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좌파 집단에 대한 인적 청산은 소리 없이 지속 실시”하고 “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등 핵심 기관 내부에 많은 수의 좌파 실무자들(을) 청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우파 문화 싱크탱크(문화정책포럼) △우파 문화 실행 기관(한국문화산업연구소) △우파 지원을 위한 모금회 및 펀드(문화산업 모금회) △우파 인사들이 활동할 문화센터(창조문화센터) 등을 건립하되, 정부의 직접 지원은 최소화하면서 삼성·현대차·CJ·KT·SKT 등 기업이 국가나 단체에 기부하는 형식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좌파 인사·집단을 지목하여 은밀하게 청산하면서 대기업을 동원해 우파를 지원하자는 문화예술계 조작 공작을 청와대가 노골적으로 입안하여 실행을 지휘한 것이다. 이 문건에는 향후 일정과 관련해 “9월 대통령 보고”라고 적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이 공작을 챙겼다는 증거다.

이후 문화체육관광부는 ‘산하기관 인적 청산, 새로운 우파 구심 세력 형성 지원’ 역할을 맡았고, 기획재정부는 ‘문화부 예산을 정밀 검토하여 좌파 지원 예산은 전액 삭감’하는 방안을 시행했다. 각 부처의 조정은 청와대가 맡았다.

우파 집단들은 정부의 지원과 특혜 속에 문화 관련 민간 위원회들을 장악해갔다. 영진위는 ‘합의제, 호선’으로 위원장을 임명하던 관행을 깨고 ‘강한섭-조희문’으로 이어지는 낙하산 위원장을 밀어붙였다. 기업에도 압력을 넣었다. SKT 같은 재벌을 통해 ‘베넥스인베스트먼트’라는 250억 규모의 문화산업 투자 펀드를 만들었다. 정경유착을 통한 문화예술계 탄압은 박근혜-최순실이 아니라 이명박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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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블랙리스트’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

정권 차원의 블랙리스트 공작이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시작됐다는 것은 관련 내부자들의 증언에서도 확인됐다. <한겨레21>과 만난 복수의 영진위 전·현직 직원들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내부 직원 성향 조사가 실시됐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청한 이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영진위는 2009년 ‘①열성 노조 분자 ②참여정부 지지자 ③문화부 갈등 관련자’ 등으로 직원들을 분류하고 ‘성분 분량자’를 좌천시켰다.

익명을 요청한 영진위 직원은 “참여정부 시절 (영진위의) 안정숙 위원장과 김혜준 사무국장과 가깝다고 평가되던 이들이 (성분 분량자 가운데) 1순위”였고, “낙하산 위원장에 반대했던 이들도 포함됐다”고 말했다. 이후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해 현상실과 녹음실 등에서 근무하던 정년 임박자 10여 명을 우선 정리해고하고, 진보적 인사로 분류된 계약직 연구원들은 재계약하지 않는 방식으로 솎아냈다”고 설명했다.

성분 분량자들을 가려내는 성향 조사 뒤 7명의 직원은 갑자기 급조된 ‘고객 지원 TF’로 강제 발령됐다. 직무와 직군이 없는 유배지였다. 당시 인사조치된 한 영진위 직원은 “할 일이 없어 풀도 뽑고 그랬다”고 술회했다.

당시 상황은 2011년부터 2015년 초까지 영진위 실무를 책임진 김인수 전 사무국장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김 전 사무국장은 “(2011년 8월) 영진위에 가보니 직원들 성향 조사를 해서 리스트를 만들어 좌천시켜 내부가 꽤 시끄러웠다”고 말했다.

영진위 직원 성향 조사를 기록한 문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인터뷰에 응한 영진위 직원은 “그런 걸 여태 문서로 남겨두겠느냐”며 “전자우편 등에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그마저 블랙리스트 논란이 발생한 뒤 영진위 내부 시스템 교체가 이뤄져 사라졌다”고 말했다.

다만, 영진위의 복수 직원들이 증언한 내용처럼 급조한 ‘고객 지원 TF’로 인사조치가 있었다는 영진위 내부 문건은 입수했다. 영진위는 2009년 11월4일 발령을 통해 1~5급 직원 7명을 ‘고객 지원 TF’로 인사조치했다.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핵심  과제
좌파  찍어내고  기업  돈으로  우파  지원하고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실이 작성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이 제시한 핵심 과제는 △좌파 집단 인적 청산 및 재정 지원 중단 △건전 문화 세력(우파) 형성 지원 △기업을 활용한 우파 문화 지원 등이다. 용어는 약간 달라졌지만,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역시 비슷한 목표로 만들어지고 시행됐다.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이들을 좌파로 찍어내 배제하고 우파 세력에게 자금 지원을 몰아주는 방식이다. 누적된 좌파의 역량을 곧장 우파가 대체할 수 없으니 이 공백은 정부 지원과 기업의 돈으로 메운다는 발상도 같다.

이명박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문화예술계 인적 청산을 단행했다. 문화권력의 주도 세력으로 꼽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에 대한 정부 지원금은 4분의 1로 축소됐고, 그 밖의 단체들은 ‘촛불시위 단체’라는 명목으로 문화예술단체 지원에서 배제했다.

특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 등 민간 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산영화제 등은 좌파 집단의 3대 축으로 꼽혔다. 2008~2009년 1년 새 임기가 끝나지 않은 기관장을 포함해 25명의 문화예술 관련 기관장이 사퇴하거나 해임됐다.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장,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박명학 한국문화예술위 사무처장 등이었다. 훗날 이들이 제기한 해임무효 소송은 모두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대신 ‘문화정책포럼’ ‘한국문화산업연구소’ 등이 우파 문화 단체를 표방하며 설립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들을 집중 지원했다. 이들 기관 행사에 당시 유인촌 문체부 장관이 여러 번 참석했고, 방송통신위원회, 청와대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등 다양한 정부 부처가 후원했다. KT·SKT·포스코·한국전력 등 쟁쟁한 기업들의 협찬이 줄을 이었다. 기업 협찬 과정에서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당시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이 사퇴하는 일까지 있었다.

영진위가 앞장서고 SKT 등 기업들이 뒤따르는 1천억원 규모의 우파 영화 제작 지원 펀드도 조성하려 했다. SKT는 이를 위해 미래저축은행에서 630억원의 차명 대출을 받아 ‘베넥스인베스트먼트’라는 이름의 투자 펀드를 직접 조성했다. SK 최태원 회장은 이 펀드를 조성하며 모은 돈을 횡령한 혐의로 실형을 살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사면됐다.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에 창조문화센터 설립이 추진 과제로 잡혀 있는 점도 흥미롭다. 당시 삼성이 보유하던 서울 종로구 송현동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에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방송 제작물 등을 제작해 테스트해볼 수 있는 실험적 문화 공간’을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이후 무산되긴 했지만 박근혜 정부의 핵심 의제이자 최순실 국정 농단의 키워드 중 하나인 창조문화센터가 이미 이명박 정부 때 기획됐다.

③ 2008년과 2013년의 공통분모, 국정원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문화권력 전략’ 문건과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예술위의 정부 비판’ 문건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기관이 있다. 국정원이다.

‘문화권력 전략 문건’에는 “영화사와 협력하여 우파 영화를 제작하고, ‘메이저 신문’과 협력하여 좌파 행적을 밝히는 기획물을 연재”하자는 제안이 등장한다. 이와 관련해 “과거 정부의 좌파 지원 내역과 산하기관 장악 시나리오에 대한 국정원 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메이저 신문과 기획(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각종 문화예술 기관을 조사했음을 이명박 정부 스스로 드러낸 대목이다.

박근혜 정부에선 국정원의 개입이 더 노골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직접 보고된 ‘예술위의 정부 비판’ 문건을 작성한 것은 국정원이었다. 이 문건 역시 국정원이 문화예술 기관·단체를 사찰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다.

국정원은 관련 기관도 직접 사찰했다. <한겨레21>과 만난 한 영진위 직원은 “2009년 내부 직원 성향 조사 이후에도 국정원 직원이 전화해 직원 3명의 실명을 대며 성향을 물은 적이 있는데 우리 편이냐, 온건하냐, 과격하냐 등을 물었다”고 기억했다. 전화한 국정원 직원은 영진위가 서울 동대문구 홍릉으로 이전한 뒤 꾸준히 영진위를 출입한 국정원 정보관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문화권력 전략’ 문건과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예술위의 정부 비판’ 문건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기관이 있다. 국정원이다.

과거 영진위 국내진흥부에서 일했던 또 다른 직원은 “2011년 <잼 다큐 강정> 상영 문제로 논란이 됐을 때 영화에 참여한 연출자와 제작자의 성향 조사 보고서를 만들라고 해서 대외비 문건을 직접 만들었고, 그 문건이 위로 보고됐다”고 말했다. ‘위가 구체적으로 어디냐’는 질문에 “문체부나 청와대일 수도 있지만 성향 보고는 국정원의 요구에 따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영진위 관계자 역시 “이명박 정부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 최근까지도 천안함, 강정마을, 세월호 같은 사회적 현안을 다룬 작품이 논란이 될 때마다 위에서 ‘(제작자의) 성향 보고’를 해달라는 얘기가 나왔다”며 “그 위가 청와대인지 국정원인지 실무자 입장에선 알 수 없었지만, 성향 조사에 지속적으로 관심 있는 기관은 국정원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영진위 직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2008년 이후 국정원 정보관이 영진위에 출입하며 실무자 및 영화인 성향 정보를 꾸준히 수집해왔고 이 내용들을 종합해 청와대에 전달된 정보 보고서가 만들어진 것 아닌가 추론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국정원 국내 정보 사찰 문제를 꾸준히 들여다본 진선미 의원실 한 관계자는 “국정원 정보원들의 기관 출입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보수 정부 내내 꾸준히 있었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예술위에도 개입했다. 그 흔적은 문서로 남았다. <한겨레21>이 도종환 의원실 등을 통해 입수한 예술위 2016년 공모사업 선정 내부 문건을 보면, 20차례 이상 ‘K’라는 영문 이니셜이 등장한다. ‘연극, 무용 분야 해당 없음-K(15.12.21)’ ‘타 분야도 결과가 늦어지므로 먼저 진행할 것(16.1.7)-K’ ‘총 14명 중 10명 신규자, 해당 없음-K(15.12.14)’ 등이다.

이 문서는 예술위가 작성한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청문회’에서 밝혀졌듯 정부 보고서 등에서 K는 국정원을 지칭한다. 예술위 내부 논의 사항에 국정원의 승인 또는 검토를 거쳤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문서에는 또 다른 영문 이니셜 ‘B’도 등장한다. 2015년 12월11일에 있던 2016 국제교류공모사업 심사 서류에 등장하는 ‘문학 ①정영효, ②공지희, ③홍정선 확인(2000년,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활동-국가보안법 폐지 서명 등)→예술위 사업에 적극 협조, 개인 사업이 아닌 문학계 행사로 양해됨(B)’ 등이 대표적이다. 예술위 문제에 대해 청와대의 승인 또는 검토를 거쳤다는 내용인 것이다.

또 다른 대목을 보면 청와대와 국정원이 동시에 등장한다. 2016년 공모사업에 응모했던 연출가 고선웅의 경우 ‘양해됨(K,B 동의/1차관)’이란 대목이 있는데 이는 청와대와 국정원이 동시에 지원자를 들여다봤고 이를 문체부가 확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예술위 공모 지원 사업 심사에 앞서 국정원이 사전에 지원자들을 직접 확인했고, 지원 가부를 결정해 통보했으며, 경우에 따라 청와대가 직접 나서 이를 결정한 것이다.

지금까지 ‘블랙리스트’의 실행 체계는 청와대 지시를 받은 문체부가 리스트를 만들고 예술위와 영진위 등이 집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예술위 내부 자료는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예술위가 지원 배제를 직접 보고한 대상은 청와대뿐만 아니라 국정원도 있었다. 국정원이 예술위, 문체부, 청와대를 횡적으로 오가며 개입했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도종환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예술위의 전체 회의록 역시 국정원의 개입을 시사한다. 예술위 상임위원들과 예술진흥본부장 등이 참석했던 2015년 5월19일 예술위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권영빈 예술위원장은 “해당 기관에서 그분들에 대한 신상 파악 등을 해서 ‘된다, 안 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탈락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신상 파악이 성향과 관련된 부분이라면 영진위 사례에서 보듯 그 정보를 취합한 건 역시 국정원일 가능성이 높다.

국정원이 문화부 산하기관 중 영진위와 예술위를 ‘타깃’으로 정한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한 단서는 ‘문화권력 전략’ 문건에 등장한다. 이 문건에서는 좌파 문화권력이 확산된 배경이 ‘문화부⇒위원회⇒시민단체’로 이어지는 조직 구조에 있다고 봤으며, 예산·사업 등 정부 지원을 통해 세력이 확대됐다고 분석했다. 영진위와 예술위는 각각 영화발전기금과 문예진흥기금을 운영하며 별도의 지원 심사 체계를 갖춘 기관이었다.

④ 특검이 파고들어야 할 과제


한겨레 김정효 기자

국정원법을 보면, 제9조에 ‘정치 관여 금지’의 원칙이 있고 제11조에는 ‘직권 남용 금지’ 규정이 있다. 국정원이 수집할 수 있는 국내 정보는 ‘대공(對共), 대정부전복(對政府顚覆), 방첩(防諜), 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과 관련한 보안 정보로 제한된다. 이 규정을 어기면 ‘7년 이상의 징역과 7년 이하의 자격 정지’에 처해진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걸쳐 국정원의 기관 조사와 정보 보고가 계속됐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예술계에 대한 정권 차원의 통제가 실행됐다는 것은 국정원이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뜻이기도 하다.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집행이 불법이라면, 국정원 역시 그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블랙리스트의 전모를 밝히고 그 잘못을 제대로 묻자면,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원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수사해야겠지만 박영수 특검팀은 아직 이 대목에 손대지 못하고 있다. 블랙리스트의 출발점이던 이명박 정부의 책임에 대해서도 파고들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 제2조를 보면, 특검의 수사 대상으로 △청와대 문건 유출 △정부 주요 정책 개입 등 14가지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제2조의 마지막 15항에는 ‘제1호부터 제14호까지의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인지된 관련 사건을 수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문화예술인 지원 배제, ‘블랙리스트’ 수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특검이 국정원의 개입을 인지하고,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블랙리스트 공작이 추진됐다는 점을 확인하면, 이와 관련한 수사를 벌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시간이다. 박영수 특검 수사팀의 수사 기한은 2월28일까지다. 추가로 30일을 연장할 수 있지만,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아직 특검 연장은 검토할 사안이 아니다”는 입장이다. 대선 국면으로 접어든 정치권은 황교안 권한대행을 압박할 뿐 수사 연장 일정을 정치적으로 합의하지 못했다.

특검팀은 아직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직권남용, 비리행위 관여 및 방조 또는 비호 혐의’를 수사하지 못했고, 삼성 외에 재벌 문제도 본격화하지 못했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구속하며 이제 막 ‘3부 능선’을 넘었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 국정원과 이명박 정부까지 파고들어야 할 과제가 새로 등장했다. 시간이 부족하다.

‘2015년도  연극  분야  지원  심사’   정부  개입  전말
“지원해줄  수  없도록  판단하는  리스트가  있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공작이 어떻게 집행됐는지 실상을 드러내는 자료가 있다. <한겨레21>이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실 등을 통해 입수한 예술위 내부 문건들과 예술위 전체 회의 녹취록 3건, 연극 분야 지원 심사위원 발언록 등을 보면 2015년도 연극 분야 지원 심사는 그야말로 ‘요지경’이었다.

애초 심사는 2015년 4월11일에 끝났다. 심사위원들은 최종 후보에 오른 15편의 시범 공연을 서울 종로구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5일간 나눠 관람한 뒤 8편을 선정작으로 골랐다. 심사는 별 탈 없이 끝났고 예술위가 선정작을 발표하는 단계만 남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최종 선정작 발표까지 무려 6개월 가까이 걸렸다. 첫 번째 문제는 4월11일, 심사 마지막 날에 발생했다. 당시 심사에 참여했던 위원의 증언에 따르면, 예술위 창작지원부 장용석 부장이 불쑥 심사 현장에 나타나 특정 작품의 이름을 대며 최종 선정에서 배제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몇몇 심사위원이 근거를 요구하며 반발했다.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거부한 심사위원도 있었다. 소동이 있었지만 결국 원안대로 8편이 선정됐다. 그런데 예술위는 이를 수용하지도 발표하지도 않았다. 심사가 종료되고도 한 달 넘게 표류했다.

심사 종료 한 달 넘은 지난 2015년 5월29일, 예술위 전체 회의에 참석한 권영빈 예술위원장은 “심사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율적인 심의가 원만하지 않다”며 “지원해줄 수 없도록 판단하는 리스트가 있고, 해당 기관에서 신상 파악을 한다”고 말했다. 성향 조사에 근거한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문화예술계에 각인시킨 첫 발언이었다.

같은 날 회의에서 이한신 당시 예술위 예술진흥본부장은 한발 더 나아갔다. “(심사 완료하고) 지금까지 발표를 못했던 이유는 (극단) 골목길 때문”이라며 “(골목길이) 너무 위험해서 문화부, 기재부 예산이 다 묶여 있다”고 말했다. 심사 결과대로 선정작이 발표되면 예술위 사업 전체의 예산을 받기 어렵다는 취지의 협박이었다. 결국 예술위는 한 달여 뒤인 6월18일 심사위원회를 재소집한다.

6월18일 재소집된 심사위원회에 참석했던 한 심사위원에 따르면, 회의 개최 직전 예술위 직원들은 ‘지원이 불가한 명단’을 아예 복사해 왔다고 알렸다. 심사위원들에게 노골적으로 “필요하면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한 심사위원은 <한겨레21>과 만나 “정확한 기억”이라며 “예술위 직원이 ‘필요하면 (명단을) 보여드릴까요’ 해서 ‘안 보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 자리에서 한 심사위원은 “우리가 (지원 불가 명단에) 동의를 안 하고 그대로 발표하면 어떤 문제들이 생기느냐?”고 물었다. 이한신 본부장은 “2개월이 지나갔던 것처럼 또 한 달, 한 달 갈 확률이 높다”고 답했다. 회의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났다.

놀라운 일은 이후 벌어졌다. 회의 다음 날인 6월19일 이한신 본부장과 장용석 부장은 직접 극단 골목길의 박근형 연출가를 찾아가 지원 포기를 종용했다. 사흘 뒤인 22일에도 박근형 연출가를 찾아가 ‘포기 각서’를 요구했다. 그리고 한 달 보름여 뒤인 8월4일 예술위의 어느 직원이 내부 시스템에 접속해 박근형 연출가의 동의를 받지 않은 포기신청서를 임의로 접수했다.

이는 블랙리스트의 야만이 드러난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공소장에서 밝힌 예술위의 범죄 행위는 무려 300건이 넘는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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