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일, 왜구 탓에 끊긴 외교를 왜구 탓에 재개
[한겨레] 등록 : 20111223 20:22
한명기 교수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 외교사
⑦ 조선 초기의 한일관계 (Ⅱ)
» 서울 종로구 무악동에 있는 인왕산 국사당 벽에 걸려 있는 최영의 모습. 우왕 때 고려의 동량이었던 최영은 왜구 토벌에서도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1376년(우왕 2) 홍산대첩을 통해 왜구 섬멸에 대한 자신감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에게 밀려나 죽은 뒤로 무속인들의 숭배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문화재청
고려에 대한 왜구의 침략은 끔찍하면서도 집요했다. 왜구는 주로 서남해를 중심으로 미곡이 집결되는 조운 창고가 있는 곳이나 조운선 등을 공략했다. 조운의 집결지인 강화도와 교동, 경상도와 전라도의 조창이 있는 마산, 사천, 순천 등지는 왜구의 침입이 가장 빈번했던 지역이었다. 1360년(공민왕 9) 왜구는 강화를 습격하여 300여 명을 살해하고 미곡 4만석을 탈취했다. 1374년(공민왕 23)에는 350척의 왜구 선단이 마산 일대에 몰려와 고려군 5천여 명이 죽는 처참한 피해가 발생했다. 1376년(우왕 2) 고려는 전라도, 경상도, 양광도의 조운을 폐지하고 미곡을 육로를 통해 운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왜구는 내륙 지역으로 공략의 방향을 바꾸었다. 내륙에 있는 육로와 수로의 거점, 내륙으로 통하는 연해 지역의 피해가 커졌다. 고려가 정책을 바꾸자 왜구도 침략 형태를 바꾸었던 것이다.
왜구 발호의 배경
왜구가 진드기처럼 고려로 밀려들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멸망한 14세기 초반 이래 일본은 극심한 혼란기를 맞이했다. 새로운 무가(武家) 실력자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가 권력을 장악한 1338년 이후에도 두 명의 천황이 존재하는 이른바 남북조 시대의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어 다카우지 형제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다시 그 내분에 편승하여 남조와 북조의 대립, 무사 계급의 반목과 이합집산이 지속되었다. 1355년 북조를 장악한 다카우지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정치적 대립과 갈등의 여파는 확산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영주와 무사들과 연결된 악당들이 세금을 약탈하거나 산적과 해적으로 변신하는 등 혼란이 퍼져가고 있었다.
왜구의 발호는 이 같은 정세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남북조 내란의 여파는 큐슈(九州) 지역에도 밀려왔다. 큐슈와 이곳의 정세 변화에 민감했던 쓰시마 등지의 무력 집단들은 군사력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고려 쪽으로 눈을 돌렸다. 특히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는 1350년 무렵부터 쓰시마 등지의 악당들은 고려에서 미곡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하여 군량미나 노동력으로 충당하려 했다.
고려는 조운을 통해 세수(稅收) 대부분을 운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습격하여 약탈하기에 알맞은 존재였다. 더욱이 당시 고려의 지방에는 대규모의 왜구를 막아낼 만한 군사력이 갖춰지지 않았다. 따라서 불시에 나타나 조창이나 조운선을 습격하는 왜구들을 제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남원황산대첩비지(南原荒山大捷碑址). 1380년 이성계가 황산에서 아키바쓰가 이끄는 왜구의 대부대를 무찌른 사실을 기념하여 세운 승전비가 있던 자리. 당시 아키바쓰 일당은 삼남의 내륙을 횡행하면서 고려 전체를 공포에 빠뜨렸다. 당시 이성계는 이들을 섬멸해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조선은 그를 기념해 1577년(선조 10) 승전비를 세웠는데 일제가 1945년 폭파했고, 1973년 비석이 있던 자리를 다시 정비했다. 문화재청
왜구 금압을 위한 고려와 일본의 외교 교섭
고려 조정은 왜구 금압을 위해 고심했다. 1367년(공민왕 16) 고려는 사신 김룡(金龍) 등을 교토로 보내 아시카가 막부에 왜구의 침략을 중지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막부가 북조(北朝)에 고려 사신의 도착 사실을 알렸을 때 그들 조정이 보였던 반응이 흥미롭다. 북조는 “고려는 신공왕후(神功王后)가 삼한을 정벌한 뒤 우리 조정에 귀속되고 서번(西蕃)이 되어 신하가 되었던 나라인데 국서의 형식이 무례하다”며 사신들을 퇴짜 놓았다. 고려를 ‘무례한 신하국’으로 비하하면서 접견을 거부했던 것이다.
막부의 대응은 달랐다. 그들은 김룡 등을 교토 천룡사(天龍寺)에 머물게 하고 승려 묘하를 시켜 고려에 보낼 답서를 쓰게 했다. 답서는 ‘왜구는 큐슈 등지의 해적들이 벌이는 행위이며 장차 금지할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막부는 김룡 등이 귀국할 때 승려 범탕(梵盪) 등을 동행시켜 고려에 답서를 전달했다. 왜구 문제를 계기로,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고려와 일본의 관계가 재개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공민왕이 시해된 1374년을 전후하여 왜구는 다시 기승을 부린다. 고려는 1375년(우왕 1)에는 나흥유(羅興儒)를 교토에, 1377년에는 정몽주(鄭夢周)를 큐슈로 보내 왜구의 금압을 요청했다. 나흥유는 막부로부터 “큐슈 평정 이후 왜구를 금압하겠다”는 답서를 받아내는데 그쳤지만 정몽주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큐슈 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담당했던 큐슈탄다이(九州探題) 이마카와 료순(今川了俊)은 쓰시마, 잇키 출신들의 해적 행위를 금지시킬 것을 약속하고 왜구에 잡혀왔던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송환했다.
료순과의 교섭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고려는 이후 대일외교의 방향을 바꾼다. 중앙의 막부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큐슈 등 변경 지역의 실력자들과 교섭하여 왜구에 대한 실질적인 금압을 요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는 1378년 료순에게 사절을 다시 보내 왜구 통제를 요청하면서 그에게 금은, 인삼, 호표피 등을 선물로 주었다. 료순은 그에 호응하여 왜구 금압을 거듭 약속하고 또 다른 포로들을 송환했다. 고려의 경제적 증여와 왜구 금압, 포로 송환을 서로 맞바꾸는 거래가 자리를 잡아가는 순간이었다.
왜구에 대한 군사적 대책
외교 교섭만으로 왜구를 온전히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려는 군사적 대책도 강구했다. 왜구의 주요 침입지인 연해의 방어력 강화를 위해 각지에 성을 쌓고 진수군(鎭戍軍)이라 불리는 지방군을 증설했다. 또 수군에 해당하는 기선군(騎船軍)을 다시 정비했다. 바닷가와 섬 출신으로서 배를 조종하는데 뛰어난 자들을 뽑아 수군에 배속하고 그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해상에서 왜구 선단을 요격하기 위해 화약과 화기를 정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최무선이 화약 제조에 성공했고, 각종 화포를 생산하고 화통방사군이라는 화기 전문부대를 만들었다.
여기에 최영, 이성계, 정지 등 걸출한 무장들이 왜구와의 결전에 직접 나서면서 왜구에 대한 억지력은 증강되었다. 1376년(우왕 2) 최영은 부여 홍산에 상륙한 왜구를 격파했다. 당시 61세의 노령이었던 최영은 화살을 입술에 맞았음에도 끝까지 분전하여 왜구를 격퇴했다. 1380년(우왕 6)에는 나세(羅世)와 최무선 등이 금강 하구 진포(鎭浦)에서, 1383년에는 정지(鄭地)가 진도(珍島)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 선단을 물리쳤다. 화약 병기의 위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진포의 수전에서 패했던 왜구는 상륙한 뒤, 영남과 호남, 호서 내륙을 횡행하며 살략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윽고 그들은 1380년 9월, 남원 운봉의 황산 일대로 몰려들었다. 당시 이성계는 아키바쓰(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의 대부대를 섬멸했다. 이것이 유명한 황산대첩이다. 일본 학계 일각에서는 황산대첩의 실상이 이성계의 무공을 드러내기 위해 조작, 과장되었다고 폄하하는데 비해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 승전을 계기로 왜구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 본다. 실제로 1389년 고려는 병선 100여척을 동원하여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를 직접 공격하는 공세에 돌입한다. 바야흐로 고려의 고질이었던 왜구의 위세도 쇠락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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