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 위키

한국사/고려 2012. 1. 1. 07:45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A%B6%81%EC%98%88 


궁예

후고구려의 국왕
재위901년 ~ 918년
왕후왕후 강씨(康氏)
부친신라 헌안왕 혹은 신라 경문왕
모친미상
이전 왕-
다음 왕- (고려 태조)

궁예(弓裔, 861년 ~ 918년 6월 14일, 재위: 901년 ~ 918년)는 신라의 왕족이며 태봉(후고구려, 마진)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과 후궁(궁복(장보고)의 딸)사이에 태어난 유복자였다.[1] 성은 김씨, 본관은 경주, 이름은 선종(善宗)이고, 별칭은 미륵, 일목대왕(一目大王[2][3])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에 의해 피신되어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였다가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호족이 되었다. 892년 스스로 왕을 칭하고 900년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 등으로 변경하였으나 호족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을 추대한 부장들에 의해 축출, 살해되었다. 궁씨(弓氏)의 시조이며, 광산 이씨의 시조가 된 이종금(본명은 김일형)은 그의 5대손이었다. 금성 출신.

생애 
 
궁예
857년 ~ 918년 6월 14일
별명 법명은 선종(善宗), 별칭은 미륵, 일목대왕(一目大王)
태어난 곳 신라 금성
죽은 곳 후고구려 철원성
복무 기간 891년 ~ 901년/901년 ~ 918년
최종 계급 장군
지휘 사병(私兵)
기타 이력 후고구려의 군주

생애 초반

삼국사기에 기록된 출생일화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족으로 성은 김씨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신라의 제47대 국왕 헌안왕 혹은 제48대경문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궁예가 5월 5일날에 태어났을 때,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단오날 태어났으며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한 빛까지 나타나므로, 그는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하였다. 왕은 궁예를 죽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군사는 갓난아기의 궁예를 죽이지 못하고, 궁전 아래에 내던져 버렸다. 궁전 아래에서 떨어지는 궁예를 유모가 보고 달려갔지만, 유모의 손가락이 눈에 박혀서 애꾸눈이 되었다. 유모는 궁예와 함께 멀리 도망가 궁예를 길렀다고 한다. 

궁예가 10세가 되었을 무렵, 유모는 주위와 말썽을 일으키고만 있는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렸다. 유모는 "너는 왕자로서 태어났고, 살해당하는것이 안되게 생각되어 그래서 너를 목숨을 걸어 길렀는데, 너는 매일 소동을 일으켜 나에게 걱정만 끼치고 있다. 그것이 슬픕니다. 너의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는 살해당할것이다." 라고 했다. 궁예는 울면서 "내가 나쁘다. 더이상 두 번 다시 어머님에게 걱정을 끼칠 것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집을 나왔다.

승려 생활  

이후 여러 곳을 떠돌다가 세달사(世達寺)에 이르러 출가를 하여서 법명을 
선종(善宗)이라고 하였다. 세달사에서 그의 스승은 세속의 원한을 잊으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자신이 신라의 왕손이라는 점과 승려 생활에 뜻을 두지 못하던 그는 세달사를 나와 방황하게 된다.

세달사 출가 이후 행적

891년(진성여왕 5년)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 그러나 기훤의 난폭함에 염증을 느낀 그는 죽주를 떠나 북원으로 가 892년(진성여왕 6년)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893년(진성여왕 7년) 양길의 신임을 얻은 뒤, 양길 군사를 거느리고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지금의영월)·어진(지금의 울진) 등을 공략하여 항복 받았다. 양길의 지원으로 강원·경기·황해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하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한반도 중부 지방에서 크게 위력을 떨치게 된다. 궁예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신라에 등을 돌린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2] 그는 세상이 끝나는 날 현신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이라 자처하였고, 백성들은 그런 궁예를 자신들을 구원해줄 대상으로 삼았다.[2] 

894년(진성여왕 8년) 명주(溟州;江陵)를 점령하면서 강릉지역까지 수중에 넣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화천, 철원 강원도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895년(진성여왕 9년) 양길은 자신의 딸을 궁예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나 궁예의 세력이 이처럼 급성장하자 패서지역(예성강 이북 지역)호 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다. 이렇게 되자 궁예는 더 이상 양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드디어 양길과 결별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896년(진성여왕 10년) 임진강을 따라 북상하여 당시 송악(松嶽; 지금의 開城)의 호족이었던 왕륭(왕건의 아버지)의 투항을 받았다. 예는 왕륭의 아들 왕건 철원군 태수로 임명하였다. 그는 왕륭 왕건 부자의 도움을 얻어 손쉽게 경기북부지역과 서해안 일대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경기지역 호족들의 경제적 지원에 힘입어 충주지역 일대까지 무력으로 병합하였다. 이때 양길과도 일전을 벌여 승리하고 그의 세력까지 모두 흡수했다.

궁예는 해상무역으로 크게 일어선 왕건 집안의 협조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얻으면서 896년 철원(구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강성한 나라를 건설한다. 898년 철원에서 송악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고, 899년 북원의 양길을 비뇌성 전투에서 참패시켰다.
[2]

즉위와 전쟁

898년(효공왕 1년) 2월 송악 후고구려의 사실상 수도로 삼고, 왕건으로 하여금 양주 청주(淸州;溫陽) 등 30여 성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899년(효공왕 2년) 청주 지방을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 강 유역 전역을 수중에 넣었다. 궁예는 이 과정에서 공이 많은 왕건에게 신라의 최고관직인 아찬 벼슬을 주었다. 그해 궁예는 송악성을 중수한 뒤 이곳을 도읍으로 정한다. 그해 3월 왕건을 정기대감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공략하게 하였다.

900년 광주·충주·청주 등 3개 주와 당성(화성군 남양)·괴양(괴산) 일대를 정벌하였다.[2] 901년(효공왕 4년)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이라 칭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했다. 삼국유사 연표에 고려라는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국모의 자리가 궐위라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천의 장자인 강씨(康氏)가문의 딸과 결혼한다.[4] 

902년부터 왕건을 서해안에 파견, 후백제의 해상교역로 차단과 동시에 후백제를 제압하게 한다. 903년 왕건군이 금성(나주)을 점령하면서 영토가 확장된다. 


904년(효공왕 7년) 국호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고 철원을 도읍으로 정한 다음 청주인 1000여 호를 그곳으로 옮겼다. 국호 마진(摩震)은 ‘마하진단(摩訶震檀)’의 줄임말이다.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뜻한다. 이는 곧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까지 아우르는 대동방국을 말한다.[5] 

905년(효공왕 8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또한 평양 성주 금용이 궁예에게 투항하여 왔다.

906년(효공왕 9년)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후백제 이라 칭한 견훤 군대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에서 맞아 크게 격파했다.

910년(효공왕 13년) 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으로써 서남 해상을 공략케하여 진도(珍島)와 고이도(皐夷島)를 점령하였다. 궁예는 또 한 왕건으로 하여금 해상부대를 이끌고 또한 금성(錦城; 지금의 羅州)를 빼앗아 견훤을 견제하였다. 이 무렵 궁예의 판도는 남으로는 공주(公州)와 상주, 동북으로는 증성(甑城;安邊), 서북으로는 황해도·평안도까지 이르러 국세를 크게 떨쳤다.

911년(효공왕 14년) :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 (水德萬歲)로 개칭하고 궁궐을 증축했다. 태봉(泰封)의 뜻은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뜻이라 하고, 봉(封)은 봉토, 곧 땅이다. 결국 궁예는 철원을 기반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세상인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5] 궁예는 왕건과 더불어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이로써 견훤의 후백제를 후방에서 압박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그는 왕건에게 공로를 높이 인정하여 대아찬 벼슬을 내렸다.


정변과 죽음

그는 호족들의 도움으로 왕권을 구축하였으나 자신에게 실력을 행사하려는 호족 세력과 수시로 갈등하였다. 904년 이후 호족들과의 갈등은 노골화되었고, 그가 신천 강씨와 두 아들을 처형한 이후 호족들을 숙청한다. 

당초 궁예가 현재의 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왕건 세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북원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떨친 양길을 제압하려면 송악 호족들과 제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는 뜻을 이루자 905년 다시 철원(구철원 북쪽 30리에 있는 풍천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청주 지역의 1천 가구를 철원땅으로 이주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 세력 외에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2] 

918년(경명왕 1년) 강대해진 호족세력을 견제하려다 부하였던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배현경(裵玄慶) 등의 모의로 호족의 우두머리인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철원을 탈출, 그해 6월 14일 그는 부양(斧壤 :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 삼국사기에는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에서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다.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따르자면 궁예는 사실 지방 호족들에게 맞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쫓겨났다고도 한다. 당시 그의 나이 61세였다.

사후

왕건은 장군들과 호족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지만, 환선길 이흔암 등은 왕건의 즉위에 반대하여 거병하기도 했다. 환선길은 왕건 즉위 직후 병사와 결탁하여 거병하였으나 복지겸(卜智謙)의 밀고로 실패한다. 환선길은 태조가 즉위 4일 후에 50여명을 이끌고 내정(內庭)에 침입하였으나 왕건의 복병에게 잡혀 죽었다.

궁예(弓裔) 말년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으로써 웅주(熊州:공주)를 공격 탈취하여 그곳에 주둔하던 이흔암 918년 6월 왕건의 즉위를 찬탈로 규정하고 거병을 준비하였으나 실패하고 후백제에 투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찬(韓粲)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 염장(閻萇) 등이 웅주를 잃은 것에 대한 처벌을 요청함과 더불어 그에게 반란의 뜻이 있음을 밀고하였다. 왕건은 사람을 시켜 이흔암의 집을 엿보게 하였다. 결국, 그의 처 환씨(桓氏)의 대화 내용을 엿듣고 이흔암일가를 체포하여 처형한다. 이후 궁예의 억울한 죽음과 왕건에 반발하는 정변이 있었으나 모두 진압된다. 


평가와 비판  

어떤 역사학자들은 그가 왕비와 두 왕자를 죽인 것은 호족들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서 죽인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반신라 정책에 대해서도 설이 분분하다. 

고려사 말기의 기록을 신왕조 성립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어느정도 왜곡하였다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 쓰여진 삼국사기에 기록된 궁예에 관한 모든 사실을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의견도 많다.[6] 그 근거로서 왕건이 정권을 탈취한 이후에 몇 년동안이나 줄지어 일어난 반란, 철저한 궁예파 숙청, 삼국사기의 혹독한 궁예에 대한 표현, 궁예에게 호의적이거나 기록과 다른 야사를 제시한다. 

기록에 나타난 '고경문(古鏡文) 사건'의 경우 왕조교체기의 중국 기록에도 자주 보이는 사건이라 왕건의 정권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후세의 가필이라는 것이 의견이 많다.[7] 

궁예에 관련된 전설이나 야사로는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슬퍼하여 산새들이 울었다 하여 붙여졌다는 포천산정호수 인근의 명성산의 전설이 있다. 또한, 철원의 보개산성, 성동리성에는 궁예가 왕건에 맞서 항전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포천철원 일대의 지명에 관한 전설로는 패주골은 궁예가 싸움에 패해 달아나서 붙은 이름이고, 궁예와 그의 군사들이 한탄하며 도망쳐서 군탄리가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또한 명성산 주변에는 궁예가 피신해서 이름 붙었다는 개적동굴, 궁예가 왕건의 군사가 쫓아오는 것을 살피던 곳이라 하려 이름 붙여졌다는 망무봉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8]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는 태봉국을 세운 건국주로서의 궁예는 온데 간데 없고, 백성들을 못살게 군 도적으로만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누가 뭐래도 고려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과장이요, 포장임을 알 수 있다. 궁예는 원대한 포부를 지닌 개혁가였으나 자기 관리 실패로 기득권 세력인 송악의 호족과 세 대결에서 끝내 패하고만 것이다.[5] 기록에는 궁예가 완전히 신망을 잃어 미복차림으로 도망 중에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궁예와 왕건이 싸움을 벌였다는 각지의 전설과 야사는 이와 다르다는 점과 후기의 궁예가 기록대로 악독한 폭군이었다면 궁예가 주어가 되는 이런 전승이 현재까지 내려오기가 힘들었을 것을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궁예의 폭정이 몰락의 원인이 아니라 궁예가 점점 불교를 중시하면서 새로운 중세의 사상으로서의 유교적 정치를 추구하였던 개혁적 유학자들이 그에게 이탈하게 된 것이 원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궁예가 성인이라고 칭찬하였던 유학자 최응도 궁예가 불교 중심으로 기울자 궁예를 버리게 된다.[7] 

제2회 철원역사문화토론회 `궁예, 그리고 DMZ'가 열린 토론회에서 이재범 교수는 이날 “정사류에서 궁예의 이미지는 전제주의적 정치, 도덕적 타락, 직계 존비속 살해 등 전형적인 폭군”이라며 “반면 철원지역의 구비전승에 따르면 궁예는 폭군이라기보다는 자기 부하를 끝까지 아낄 줄 아는 덕장”이라고 말했고, 조인성 교수는 “북한 역사학계에서 궁예와 태봉국은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던 것으로 인식된다”며 “고려 역시 이념적으로나 실제적으로태봉국을 계승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9]



주석  
  1.  《삼국사기》권50 열전 제10 궁예편. 궁예에 관하여 가장 기본적인 사료로, 여기서 인용되는 문장은 특별한 표시가 없다면 이곳에서 인용된 것이다.
  2. ↑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7/2008121701603_3.html
  3.  20세기 초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가 붙인 별명이다.
  4.  신천의 강씨는 왕건의 외가로, 왕건의 외증조모 정화왕후 진의의 친정이기도 하다.
  5. ↑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7/2008121701603_4.html
  6.  이재범, 《슬픈 궁예》, 2000, 푸른역사
  7. ↑   KBS 제1라디오 역사를 찾아서
  8.  유인순, 《전설에 나타난 궁예왕》, 2006
  9.  "궁예는 폭군이라기 보다는 덕장이었다" 철원역사문화 토론회 `궁예, 그리고 DMZ' 강원일보 2010년 12월 16일 작성
 
가계
  • 외 조부: 헌안왕(憲安王) 경문왕의 장인
  • 부왕 : 경문왕(景文王)
  • 모후 : ? 미상
  • 형 : 헌강왕(憲康王)
  • 형 : 정강왕(定康王)
  • 누이 : 진성여왕(眞聖女王)
  • 숙부 : 김위홍(金魏弘) 혜성대왕(蕙成大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 숙모 : ? 미상
  • 왕후 강씨(王后 康氏) - 피살당함
    • 청광(靑光) - 피살당함
    • 신광(神光) - 피살당함
    • 순백(珣白) - 광산 이씨(光山 李氏) 시조인 종금(宗金)의 조상이다.
 
참고

참고 서적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동사강목
  • 신채호, 《일목대왕의 철추》(1918)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74)

전 임
(초대 군주)
제1대 태봉 국왕
901년 - 918년
후 임
(왕조 멸망)
(고려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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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왜 왕비 강씨를 죽였을까?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982 
궁예 : 후고구려를 세운 영웅인가? 약한 군주의 표상인가? - 네이버캐스트   http://tadream.tistory.com/1980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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