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31589
"명성황후 시해범들, 돈 어디서 나왔는지 조사할 것"
[인터뷰] 명성황후 시해범 행적 쫓는 일본인 가이 도시오씨
17.06.05 15:43 l 최종 업데이트 17.06.05 15:43 l 글: 심규상(djsim) 편집: 김도균(capa1954)
▲ 명성황후 시해사건 시해범의 행적을 쫓는 일본인 가이 도시오(甲斐利雄·88)씨. ⓒ 심규상
2일 오전 11시. 일본 구마모토현 교육회관 정문 앞에 작은 승용차가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이는 가이 도시오(甲斐利雄·88)씨였다.
행사 시간까지는 아직 3시간 남짓 남았다. 그가 이날 행사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가늠이 됐다.
이날 오후 한국에서 온 명성황후 후손인 '홍릉봉향회'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이 '명성황후 122주기 기념 한일 심포지엄'이 예정돼 있다. (관련 기사 : 명성황후 후손, 시해자 후손 영정에 고개 숙인 이유)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준비해온 행사 물품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명성황후 초상화, 널판지,종이 상자... 등이 쉴 새 없이 나왔다. 그는 곧장 행사장인 회의실로 향했다. 이어 짐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어헤쳤다. 큰 종이상자에서는 손수 만든 연이 담겨 있다.
그는 "오늘 참석자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두 달 동안 만들었다"며 "연은 일본과 한국을 잇는 우호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바람에 날리는 연(鳶)보다는 인연을 잇는 연(緣)이라는 의미가 크다는 설명이다.
두 달 동안 만든 연 참석자에게 "연은 일본과 한국 잇는 우호의 상징"
▲ 가이 도시오(甲斐利雄·88)씨가 손수 만든 한일 심포지엄을 기년해 만든 연. 참석자 전원에게 기증하기 위해 주달 동안 120개를 만들었다. 1개의 연에 200여자의 글자를 새겼다. ⓒ 심규상
가이씨는 중학교 교사를 은퇴한 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시해범 48명 중 21명이 구마모토 출신임을 처음 알게 됐다. 이때부터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구마모토 지역 관련자의 행적을 쫓는 일에 집중해 왔다. 지난 2004년에는 지역 시민 100여 명을 모아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명성황후 시해자의 행적을 찾는 일이었다. 일본에는 한국과 같은 '족보'가 없다. 백여 년 전 가해자의 행적을 찾는 일은 순전히 발품을 팔아야 하는 고행길이었다. 한 명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약 700여 통의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고생 끝에 아소 국립공원 입구에 서 있는 마츠무라 다츠키(松村辰喜,1868∼1937)의 행적과 기념비를 찾아냈다. 기념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일을 '치적'으로 새겨 놓았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공모하고 사건 당일 직접 왕궁을 쳐들어간 구니토모 시게아키(1861-1909)의 외손자(가와노 다쓰미,河野龍巳)를 찾아낸 것도 그다. 그는 가와노씨를 설득해 경기도 남양주 홍릉을 찾아 명성황후 묘소에 무릎을 꿇게 했다. 함께 사죄의 절을 올렸다. 그는 지난 2005년부터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홍릉을 찾아 참회의 시간을 갖고 있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일은 지역 내 선대들이 한국에서 한 악행을 알리는 일이다. 도쿄는 물론 그를 찾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시해 사건을 알리고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그는 이후 활동 계획에 대해 "명성황후 시해범들은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감옥에 있는 내내 매일 진수성찬으로 식사를 했다"며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조사할 생각"이라고 답했다.
건강을 염려하자 "살고 있는 아소산 근처에서부터 두 시간 넘게 직접 운전을 하고 왔다"며 "아직 끄떡없다"고 주먹을 쥔채 팔을 흔들어 보였다.
이날 행사장에서 틈틈이 그를 만나 그의 최근 근황을 들어 보았다.
"다음 활동 목표는 '보다 깊은 역사 공부'"
▲ 가이 도시오(甲斐利雄·88)씨. 행사시작 3시간 전부터 행사장 준비에 분주하다. ⓒ 심규상
-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아내 병수발로 바쁘다. 아내가 수년 전에 치매가 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병수발로 힘들지만, 같이 있으면 서로 힘이 된다. (활짝 웃으며)아내를 사랑한다."
- 외부 활동은?
"근래는 연을 만드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홍릉봉향회 한국 방문단과 심포지엄 참석자 모두에게 주기 위해 어제까지 120여 개의 연을 만들었다."
-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나?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질 좋은 종이를 사서 자른 후 오차가 없이 밑그림을 그려 프린트해야 한다. 오차가 생기면 연을 만들 수 없다. 잘 접은 후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 한 글자라도 틀리면 다시 해야 하기때문에 신경이 곤두선다.(대략 연 1개에 200자 가까운 글씨를 새겼다) 틀리지 않기 위해 한글 공부를 많이 했다. 색칠도 해야 하고 대나무 살도 다듬어야 한다. 시간 날 때마다 했는데 약 두 달 정도 걸린 것 같다."
- 매년 한국 홍릉을 방문할 때도 연을 만들어 전달해 왔다. 왜 연을 만드나?
"연은 일본과 한국을 잇는 우호의 상징이다. 홍릉봉향회 측에서 내가 만들어 그동안 보낸 연을 명성황후 박물관에 전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 이번 심포지엄은 어떻게 준비하게 됐나?
"봉향회에 측에서 먼저 구마모토에 찾아오겠다고 했다. 매년 구마모토 시민들이 홍릉을 방문해 참배한 데 대한 답방의 의미다. 오시는 분들을 어떻게 맞을까 고민하다 심포지엄을 준비하게 됐다. 5년에 한번 꼴로 한국 측에서 구마모토를 방문했으면 좋겠다."
▲ 2일 일본 구마모토 교육회관에서 열린 명성황후 122주기 한일 심포지엄에는 한국에서 간 홍릉봉향회원 15명을 비롯해 120여명의 일본 시민들이 참석했다. ⓒ 심규상
-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한 지 13년째다. 단체 회원은 늘어났나?
"현재 90명 정도다. 늘지는 않고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한 분들로 인해 약간 줄었다. 다행히 주요 임원들의 나이는 젊다. 그래도 70대다(웃음)."
- 단체 활동 이후 많은 성과를 남겼다. 이후 계획은?
"회원들과 명성황후 사건에 대한 역사 공부를 보다 깊숙이 하려고 한다. 일본 정부가 왜 명성황후를 시해했는지, 당시 대내외적 환경은 어떠했는지 등을 집중 공부하고 조사할 계획이다. 재판관들은 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엉터리로 판결했는지도 조사대상이다.
당시 재판관들은 명성황후 시해범들이 스스로 '민비(명성황후)를 시해했다'고 자백했는데도 재판관이 나서 '무슨 소리냐, 네 혐의는 민비(명성황후)의 담배를 훔치러 간 것이니 쓸데없는 대답을 하면 안 된다'며 입을 막았다. 그래서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시해범들은 감옥에서도 매일 진수성찬으로 식사를 했다.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조사할 생각이다."
"명성황후 시해범들, 돈 어디서 나왔는지 조사할 것"
[인터뷰] 명성황후 시해범 행적 쫓는 일본인 가이 도시오씨
17.06.05 15:43 l 최종 업데이트 17.06.05 15:43 l 글: 심규상(djsim) 편집: 김도균(capa1954)
▲ 명성황후 시해사건 시해범의 행적을 쫓는 일본인 가이 도시오(甲斐利雄·88)씨. ⓒ 심규상
2일 오전 11시. 일본 구마모토현 교육회관 정문 앞에 작은 승용차가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이는 가이 도시오(甲斐利雄·88)씨였다.
행사 시간까지는 아직 3시간 남짓 남았다. 그가 이날 행사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가늠이 됐다.
이날 오후 한국에서 온 명성황후 후손인 '홍릉봉향회'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이 '명성황후 122주기 기념 한일 심포지엄'이 예정돼 있다. (관련 기사 : 명성황후 후손, 시해자 후손 영정에 고개 숙인 이유)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준비해온 행사 물품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명성황후 초상화, 널판지,종이 상자... 등이 쉴 새 없이 나왔다. 그는 곧장 행사장인 회의실로 향했다. 이어 짐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어헤쳤다. 큰 종이상자에서는 손수 만든 연이 담겨 있다.
그는 "오늘 참석자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두 달 동안 만들었다"며 "연은 일본과 한국을 잇는 우호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바람에 날리는 연(鳶)보다는 인연을 잇는 연(緣)이라는 의미가 크다는 설명이다.
두 달 동안 만든 연 참석자에게 "연은 일본과 한국 잇는 우호의 상징"
▲ 가이 도시오(甲斐利雄·88)씨가 손수 만든 한일 심포지엄을 기년해 만든 연. 참석자 전원에게 기증하기 위해 주달 동안 120개를 만들었다. 1개의 연에 200여자의 글자를 새겼다. ⓒ 심규상
가이씨는 중학교 교사를 은퇴한 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시해범 48명 중 21명이 구마모토 출신임을 처음 알게 됐다. 이때부터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구마모토 지역 관련자의 행적을 쫓는 일에 집중해 왔다. 지난 2004년에는 지역 시민 100여 명을 모아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명성황후 시해자의 행적을 찾는 일이었다. 일본에는 한국과 같은 '족보'가 없다. 백여 년 전 가해자의 행적을 찾는 일은 순전히 발품을 팔아야 하는 고행길이었다. 한 명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약 700여 통의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고생 끝에 아소 국립공원 입구에 서 있는 마츠무라 다츠키(松村辰喜,1868∼1937)의 행적과 기념비를 찾아냈다. 기념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일을 '치적'으로 새겨 놓았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공모하고 사건 당일 직접 왕궁을 쳐들어간 구니토모 시게아키(1861-1909)의 외손자(가와노 다쓰미,河野龍巳)를 찾아낸 것도 그다. 그는 가와노씨를 설득해 경기도 남양주 홍릉을 찾아 명성황후 묘소에 무릎을 꿇게 했다. 함께 사죄의 절을 올렸다. 그는 지난 2005년부터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홍릉을 찾아 참회의 시간을 갖고 있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일은 지역 내 선대들이 한국에서 한 악행을 알리는 일이다. 도쿄는 물론 그를 찾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시해 사건을 알리고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그는 이후 활동 계획에 대해 "명성황후 시해범들은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감옥에 있는 내내 매일 진수성찬으로 식사를 했다"며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조사할 생각"이라고 답했다.
건강을 염려하자 "살고 있는 아소산 근처에서부터 두 시간 넘게 직접 운전을 하고 왔다"며 "아직 끄떡없다"고 주먹을 쥔채 팔을 흔들어 보였다.
이날 행사장에서 틈틈이 그를 만나 그의 최근 근황을 들어 보았다.
"다음 활동 목표는 '보다 깊은 역사 공부'"
▲ 가이 도시오(甲斐利雄·88)씨. 행사시작 3시간 전부터 행사장 준비에 분주하다. ⓒ 심규상
-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아내 병수발로 바쁘다. 아내가 수년 전에 치매가 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병수발로 힘들지만, 같이 있으면 서로 힘이 된다. (활짝 웃으며)아내를 사랑한다."
- 외부 활동은?
"근래는 연을 만드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홍릉봉향회 한국 방문단과 심포지엄 참석자 모두에게 주기 위해 어제까지 120여 개의 연을 만들었다."
-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나?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질 좋은 종이를 사서 자른 후 오차가 없이 밑그림을 그려 프린트해야 한다. 오차가 생기면 연을 만들 수 없다. 잘 접은 후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 한 글자라도 틀리면 다시 해야 하기때문에 신경이 곤두선다.(대략 연 1개에 200자 가까운 글씨를 새겼다) 틀리지 않기 위해 한글 공부를 많이 했다. 색칠도 해야 하고 대나무 살도 다듬어야 한다. 시간 날 때마다 했는데 약 두 달 정도 걸린 것 같다."
- 매년 한국 홍릉을 방문할 때도 연을 만들어 전달해 왔다. 왜 연을 만드나?
"연은 일본과 한국을 잇는 우호의 상징이다. 홍릉봉향회 측에서 내가 만들어 그동안 보낸 연을 명성황후 박물관에 전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 이번 심포지엄은 어떻게 준비하게 됐나?
"봉향회에 측에서 먼저 구마모토에 찾아오겠다고 했다. 매년 구마모토 시민들이 홍릉을 방문해 참배한 데 대한 답방의 의미다. 오시는 분들을 어떻게 맞을까 고민하다 심포지엄을 준비하게 됐다. 5년에 한번 꼴로 한국 측에서 구마모토를 방문했으면 좋겠다."
▲ 2일 일본 구마모토 교육회관에서 열린 명성황후 122주기 한일 심포지엄에는 한국에서 간 홍릉봉향회원 15명을 비롯해 120여명의 일본 시민들이 참석했다. ⓒ 심규상
-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한 지 13년째다. 단체 회원은 늘어났나?
"현재 90명 정도다. 늘지는 않고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한 분들로 인해 약간 줄었다. 다행히 주요 임원들의 나이는 젊다. 그래도 70대다(웃음)."
- 단체 활동 이후 많은 성과를 남겼다. 이후 계획은?
"회원들과 명성황후 사건에 대한 역사 공부를 보다 깊숙이 하려고 한다. 일본 정부가 왜 명성황후를 시해했는지, 당시 대내외적 환경은 어떠했는지 등을 집중 공부하고 조사할 계획이다. 재판관들은 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엉터리로 판결했는지도 조사대상이다.
당시 재판관들은 명성황후 시해범들이 스스로 '민비(명성황후)를 시해했다'고 자백했는데도 재판관이 나서 '무슨 소리냐, 네 혐의는 민비(명성황후)의 담배를 훔치러 간 것이니 쓸데없는 대답을 하면 안 된다'며 입을 막았다. 그래서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시해범들은 감옥에서도 매일 진수성찬으로 식사를 했다.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조사할 생각이다."
'근현대사 > 구한말,일제강점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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