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행진' 동참했다가 이야기 속에 빠진 사연
[강북을 걷다] 13. '경복궁의 서쪽' 서촌 마을 (1)
한국일보 | 박광희 | 입력 2016.12.17 10:02 | 수정 2016.12.18 19:27
주말마다 촛불집회 참가자들로 들썩이는 골목
조선 왕실과 친일ㆍ항일 역사도 만날 수 있어
맹학교와 농학교의 담장에 담긴 학생들의 마음
먹자골목으로 변한 금천교시장 입구. 촛불집회 참가자들도 많이 찾는다.
경복궁 서쪽과 인왕산 동쪽 사이에 있는 서촌 마을에는 요즘 토요일마다 사람이 몰려든다. 정답고 포근한 마을 풍경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기 위해서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사거리에서 청운효자동주민센터, 그리고 효자치안센터에 이르는 촛불집회의 주요 경로가 이 동네에 있다. 조선 왕실에서부터 현대의 시인과 화가까지 마을이 간직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촛불집회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지만 이번 기회에 서촌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서촌 중에서도 촛불집회 행진 경로와 가까운 곳의 풍경과 사연을 들여다본다.
- 촛불집회 열기 후끈한 금천교시장
경복궁역에서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쪽으로 가는 출구는 2개가 있다. 3번 출구로 나오면 경찰차가 많이 배치돼 있으니 2번 출구로 나오는 게 좋다.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금천교시장이다.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라는 안내판이 말해주듯 시장 기능은 사라졌고 먹자 골목으로 바뀌었다. 주말 저녁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동료들과 저녁을 먹는 곳도 대개 이 골목이다. 환한 촛불과 구호 적힌 팻말을 든 사람들로 골목이 떠들썩하다. 손님들은 ‘박근혜 퇴진’이라고 쓴 종이를 옆에 두고 들뜬 표정으로 음식을 먹으면서도 집회 장면을 보여주는 방송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음식점 주인과 종업원들 또한 집회에 직접 참가는 못해도 “사람이 많이 모였냐”고 물어보는 등 관심이 많다. 시장에서는 작은 골목이 또 뻗어나간다. 그 골목들로 접어들면 한옥과 다세대주택이 모인 70, 80년대 식 주택가가 나타난다. 그 길들은 또 다른 작은 길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북쪽으로 향한다. 그래서 처음 가본 사람이라도 방향감각만 유지하면 크게 헤맬 일은 없다. 골목에서는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가게에도, 전봇대에도 비슷한 내용의 종이가 붙어있다. 청와대가 가까운 만큼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컸을 텐데 이제는 실망이 그만큼 커진 것 같다.
금천교시장 부근 서촌의 골목을 동네 할머니들이 걷고 있다. 서촌에는 작은 골목이 많다.
서촌의 한 가게에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글이 붙여져 있다.
- 시인 이상이 어렸을 때 살던 집
2번 출구에서 금천교시장을 지나쳐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왼쪽 이면도로로 들어가면 시인 이상이 살던 집이 나온다. 근처 사직동에서 태어난 이상이 큰아버지의 후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들어와 세 살 때부터 20년 정도 살았던 집이다. 전면이 유리로 돼 있어 카페처럼 보이지만 ‘이상의 집’이라는 작은 글씨가 있어 찾는 데 어려움은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 정면의 검은 문을 열면 좁고 어두운 공간이 나온다. 그곳을 ‘이상의 방’이라고 부른다. 이상이 지냈던 실제 방도 이렇게 좁고 어두웠다고 한다.
본명이 김해경인 그가 이상을 필명으로 사용한 계기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공사장 유래설’로 김해경이 일제시대 공사장 인부로 일할 때 일본인들이 그의 성을 잘못 알고 긴상(金さん)이 아니라 리상( さん)이라 불렀는데 이를 필명으로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이상의 여동생 김옥희씨가 1964년 신동아에 밝힌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김주현 경북대 교수가 주장한 ‘스케치 상자 유래설’로 서양화가 구본웅이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한 친구 김해경에게 미술도구를 넣을 수 있는 상자를 선물하자 그 보답으로 나무 목(木)이 들어가는 성씨 중 가장 흔한 이( )에 상자 상(箱)을 붙여 이상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시인 이상이 살았던 집. 300여평 규모의 저택이었으나 큰아버지와 배다른 동생이 분할 매각하는 바람에 지금처럼 작은 공간만 남았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문화예술공간으로 되살렸다. 정면의 검은 문 뒤에 이상이 지냈던 어두운 방을 재현해 놓았다.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 이름을 정한 대오서점. 1951년 문을 연 한옥 책방으로 서점 안에 수십 년은 된 듯한 책장과 오르간, 장롱 등이 있다. '이상의 집'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온다.
서촌의 오래된 맛집인 영화루. 대오서점과 가까우며 매운 짬뽕으로 유명하다.
- 통인동커피공방에서 핫팩 나눠주는 세월호 부모들
이상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참여연대를 지나 오른쪽 큰 길로 나가면 촛불집회 참가자들에게 무료로 커피를 나눠줬던 통인동커피공방이라는 카페가 나온다. 커피 맛이 좋은데다 전에도 카페 창립일이나 노동절 등에 무료 시음 행사를 연 적이 있어 어느 정도 알려진 곳이다. ‘두려워하지 말아요’라는 인쇄문 아래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짧은 글을 적어 창에 붙여놓았다. 탄핵소추안 가결 다음날인 10일 촛불집회 때는 세월호 가족들이 이곳에서 핫팩과 따뜻한 물을 나눠주었다. 그동안 받았던 격려와 사랑을 국민에게 되돌려주려는 일종의 보답 행사였다.
커피공방 북쪽에는 통인시장이 있다. 5,000원을 내고 엽전을 구입한 다음 밥, 국, 반찬 등을 사서 도시락으로 먹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시장이다. 이웃 금천교시장과 달리 장을 볼 수 있고 김밥, 만두, 떡볶이, 어묵 등 먹을 것도 많다. 요즘은 장보러 오는 사람보다 배를 채우거나 구경하기 위해 오는 손님이 더 많다. 중국인 등 외국 사람도 많이 찾아온다.
세월호 가족들이 통인동 커피공방 앞에서 촛불집회 참가자들에게 따뜻한 물과 핫팻을 나눠주고 있다.
통인시장에서는 장도 볼 수 있고 맛있는 음식도 사먹을 수 있다. 요즘은 유명세를 타면서 구경 온 사람들이 많다.
통인시장 옆 작은 커피점. 촛불집회 참가자들에게 힘을 주는 글을 써 붙였다.
한국의 대표 시민단체 중 하나인 참여연대도 서촌에 있다. 환경운동연합과 아름다운재단도 근처에 있다.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라고 알려주는 표지석. 통인동커피공방 바로 앞 찻길 가에 설치돼 있다.
- 아직도 남아있는 이완용 가옥
통인시장을 관통해 오른쪽으로 꺾으면 낮은 아파트가 나타난다. 태조 이성계가 일곱 번째 아들 방번의 거처로 마련해준 자수궁이 있던 곳이다. 자수궁은 방번이 1차 왕자의 난 때 목숨을 잃은 뒤 세종의 후궁들이 모여 살면서 후궁의 거처로 바뀌었다. 경복궁과 자수궁 사이의 자수궁교라는 다리는 줄여서 자수교 혹은 자교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그 이름이 근처의 자교교회로 남아 전해진다.
자수궁터와 동쪽으로 닿은 곳에 매국노 이완용의 집이 있었다. 자하문로 큰 길에서 종로구보건소에 이르는 대지 3,000여 평의 대저택이었다. 이완용은 중림동에 살다가 분노한 민중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남산의 왜성구락부와 장교동의 이복 형 집 등을 전전하다 1913년 여기로 이사했다. 한국전쟁 당시 간첩으로 몰려 처형된 김수임이 미군정 헌병사령관 존 베어드 대령과 살았던 곳도 바로 이 집이다. 집터는 지금 은행, 약국, 교회 그리고 주택 여러 채 등으로 나눠져 있다. 그러나 이완용 가옥 중 바깥채는 그대로 남아있다. 골목에서 높은 대문과 담장 너머 바깥채 꼭대기 부분을 볼 수 있는데 서양의 웅장한 근대 건축물 같다. 글로만 보고 말로만 듣던 이완용의 흔적이 조용한 주택가에 남아있다는 것이 놀랍다. 집 앞에 있던 남자들이 막아서는 바람에 사진은 찍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이 건물을 친일파박물관으로 꾸미자고 주장한다. 부끄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는 교육의 장으로 삼을 만하다.
태조 이성계가 일곱째 아들 방번의 거처로 지어준 자수궁이 있던 자리에 낮은 아파트가 들어서있다.
-항일운동가 이회영의 삶을 간직한 우당기념관
이완용 가옥이 친일의 흔적이라면 우당기념관은 항일운동의 교육장이다. 우당 이회영과 형제들은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지금의 명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일대 토지를 모두 소유할 정도로 부유했지만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자 땅을 처분해 자금을 마련한 다음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여섯 형제와 가족, 심부름꾼 등 60여명이 말 100여필에 짐을 나눠 얼음 덮인 압록강을 건너던 장면은 그 자체가 엄숙하고 장엄한 장관이었다. 넷째인 우당은 한인자치조직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투쟁의 기틀을 마련했다. 나중에는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목적으로 하며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며 아나키즘 사상가로 거듭난다. 가난 때문에 모진 고생을 하던 그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조직하려다가 일제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아담한 크기의 우당기념관은 그의 후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살았던 집터에 지어졌는데 누구든 들어가 편하게 구경할 수 있다.
우당기념관 내부. 우당 이회영 선생과 형제들은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내놓고 치열하게 일본과 맞서 싸웠다. 기념관에는 김원봉, 김산, 유림 등 항일운동가들의 얼굴 사진이 많다.
-장애 학생들의 마음을 담은 맹학교 농학교 담장
우당기념관 맞은 편에는 시각장애인이 공부하는 서울맹학교와, 청각장애인이 공부하는 서울농학교가 나란히 있다. 맹학교 담장에는 학생들의 손바닥 도장이 찍혀 있고 점자가 적혀있다. ‘앞을 못 본다고 희망조차 못 볼 쏘냐’ ‘안 보여도 마시멜로는 먹을 수 있다’ ‘친구들아 보고 싶다 치료 끝나면 우리 만나자’ ‘친구들아 고마워 부모님 선생님 사랑해요’ 등이 적혀 있다. 손바닥을 대보고 점자를 차분하게 읽으면 씩씩하고도 고운 학생들의 마음이 들리는 것 같다. 농학교 담장에는 아이들의 그림과 수화가 그려져 있다. 다섯 손가락 중 엄지와 검지, 새끼 손가락은 펴고 중지와 약지를 접으면 ‘사랑해’라는 뜻이라고 그려져 있으니 따라 해도 좋다. 길 가던 젊은 엄마가 걸음을 멈추고 담장의 손도장과 그림에 대해 설명해주자 아이가 조용히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원래 농학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선희궁이 있던 곳이다. 영빈 이씨의 신위는 청와대 옆 육상궁으로 옮겨졌으며 학교 안에는 사당 본채만 남아있다.
장애인 지원 전문단체인 푸르메재단이 두 학교 부근에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닌 듯 하다. 푸른 산을 뜻하는 푸르메라는 이름의 재단은 2005년 설립된 이후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을 돕기 위해 애를 썼다. 맹학교, 농학교, 푸르메재단을 차례로 지나면 장애인들이 불편 없이 살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힘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금 밀려온다. 푸르메재단 건물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경찰이 잔뜩 지키고 서있는 청운효자동주민센터가 나온다. khpark@hankookilbo.com(mailto:khpark@hankookilbo.com)
서울맹학교 담장에 설치된 손바닥 모형과 점자에서 학생들의 곱고 씩씩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서울농학교 담장에 그려진 그림과 수화를 엄마와 아이가 함께 보고 있다.
국립서울농학교 안에 있는 선희궁 사당 본체. 선희궁에서는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제사를 지냈다.
청운효자동주민센터 맞은 편에 있는 푸르메재단은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을 돕기 위해 2005년 설립됐다. 바로 뒤에 서울농학교와 서울맹학교가 있다.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자하문로를 행진하고 있다. 북악산과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개천을 복개한 도로로 이 길을 따라가면 청운효자동주민센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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